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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자연법칙의 조화

LNCK 2014. 6. 4. 12:17

◈기적과 자연법칙의 조화           눅9:10~17                  14.04.27.설교스크랩 녹취, 출처보기

                                                                                *원제목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사람들은 기적을 잘 믿지 않습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이유는,

기적이 자연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연 법칙은 믿을 수 있지만, 기적은 믿을 수 없다. 라고 말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적 기사들 때문에, 성경 또한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중심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적,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 육신의 기적,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부활의 기적.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적.

 

이 모든 기적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있기에

만약에 우리가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적만 바라는 것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믿지 않는 것, 또한 참된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칙과 조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안 믿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적은 결코 자연 법칙과 충돌 되거나, 자연 법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과 자연법칙 모두 다, 하나님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드심으로 만물을 다스리시지만

또한 기적을 일으키시며, 기적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시기도 합니다.

 

기적과 자연법칙 모두가, 다 하나님께 기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자연 법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 속에 그 기적이 개입하는 것이고, 자연 속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 명제.

 

▲1.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기적.

<기적>이라는 책을 쓴 C. S. 루이스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적이란 자연의 패턴을 중단시키는 예술이 아니라,

그 패턴 속으로 새로운 사건들을 들여오는 예술이다.”

 

기적은, 자연 법칙을 깨뜨릴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적이라면, 자연 속에 하나가 되고(동화되고) 흡수가 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동풍 바람이 불어서, 물을 물러가게 하는.. 자연법칙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렇습니다.

출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동정녀의 몸에서 기적으로 잉태된 예수님은

어느 아이와 다름없이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고 그 몸에서 자라나는,

수개월 동안 어머니 배 속에서 자라나는 순산의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만드신 포도주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포도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만드신 빵은

그것을 먹을 때, 우리의 몸에서 소화되는 그런 자연적인 빵이고

내버려두면 썩어 없어지는 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모든 기적들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거나, 자연 법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 법칙에 개입했지만, 그러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 자연법칙에 개입하는 기적.

(성경책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모션을 취하면서)

이 성경책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의 법칙에 의한 것이죠.

그런데 제가 지금 이 성경책을 붙잡고 있는 것은, 중력의 법칙을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중력의 법칙에 개입한 것뿐입니다.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 자연의 법칙을 잠시 중단시키고 있는 것이죠.

 

아마 땅 밑에서 보고 있는 개미에게는,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자연 법칙이 깨진 것이죠.

그러나 깨진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으로 개입한 것뿐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 성경책을 붙잡은 손을 놓으면,

또 다시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겠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은, 마치 자연법칙에 초자연이 개입하심으로서

그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적과 자연은 절대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C. S. 루이스는 <기적>이라는 책에서 두 가지 기적으로 나눕니다.

 

▲1. 첫 번째는 옛 창조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신 자연의 방식대로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으셨어요.

식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지 않으셨어요.

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며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몸이 치유되는 기적 또한 옛 창조의 기적에 속합니다.

몸은 원래 자기 치료의 능력이 있죠.

의술과 약이 치유를 돕지만, 엄밀히 말해서 모든 상처는

몸이 스스로 치료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적이란 치유의 기적이란 자연 법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로 빨리 회복 되도록 돕는 것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빵과 물고기를 증가시킨 것도 마찬가지요.

예수님께서 돌을 빵들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있는 빵을 → 빵으로 만드셨고,

있는 물고기를 가지고 → 또 다른 물고기로 증가시킨 것입니다.

 

즉 옛 창조의 질서, 자연 법칙의 방식대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2. 새 창조의 기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통하지 않고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동정녀의 탄생. 그것은 또 다른 한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 A Man이 아니라, The Man 유일한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이기에

그것은 새 창조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 그리고 부활하신 것. 그리고 승천하신 것.

이것이 새 창조의 기적들입니다.

 

 

◑저는 기적을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이 직접 일으키신 기적과

2.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과 함께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기적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입니다.

 

복음서에 대부분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홀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1.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또 제자들을 통해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요9장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파송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도록 파송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원래 있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해주신 능력이에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시며

그리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내어쫓을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들려오는 복음에 관해서 듣고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그들은 제자들의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제자들은 아마 놀랐을 것입니다. 흥분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통하여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놀라워하고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우리를 통해 이러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벳세다 빈들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들이 흥분 속에 젖어있지 않도록,

그 기적이 주는, 기적이 가져다주는 그런 흥분 속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데리고 빈들로 가셔서 일종의 수양회를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얼마나 이 균형을 중요시 여겼는가를 볼 수 있어요.

많은 무리들과 함께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많은 무리들 속에서 도취되지 않도록, 언제나 홀로 계셨어요.

 

제자들이, 기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주목을 받자 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데리고 빈들로 가셔서

그들과 함께 머물며 자신을 되돌아보며

 

기적의 근원이 자기 자신들이 아님을 인식하고,

그래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를 알고 따라서

벳세다의 빈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본문 /  5병2어의 기적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또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해가 지고, 모두가 다 배고플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가도 별로 먹을 것이 없는, 굶주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건의합니다.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우리가 외딴 곳에 와 있으니 사람들을 보내 주변 마을과 농가로 가서

잠잘 곳을 찾고 먹을 것을 얻게 하십시오.’  눅9:12

 

제자들의 건의는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건의입니다.

흩어져서 각자가 자기의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적을 베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당황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헬라어 원문에 보면

헬라어는 강조되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어순에서 앞으로 뺍니다.

 

원문상으로 예수님의 말씀 중에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너희가” 라는 단어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 했을까요.

‘바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할 때, 누구의 아이디어가 훨씬 현실적입니까.

제자들의 아이디어가 현실적입니까, 예수님의 아이디어가 현실적입니까.

상식적으로는 제자들의 아이디어가 현실적이에요.

 

먹을 것이 있건, 없건, 각자가 흩어져서 다시 오고 싶으면 다시 오더라도

이제는 각자가 흩어져서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그 문제 해결을 적극 나서서 도와주어라는 말씀입니다.

 

눅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실 때, 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너희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마라. 돈도 가지지 말고

전대도 차지 말고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거지처럼 너희들이 전도하라.’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의 공급과 임재하심을 의지하고 너희들은 사역하라.’

그 말씀을 바로 본문 얼마 전에 주셨어요.

 

아니 우리를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셔놓고 (눅9:1~6)

이제 와서 광야에서, (빈털터리가 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니 (눅9:10~17)

이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처럼 보이기도 한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현실을 모르고 말씀하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을 향한 의도가 있는 것이죠.

너희가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제자들을 위한 어떤 시험, 훈련, 믿음의 연단.

예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 <계산>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우리가 만일 제자들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날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 아프리카에 굶주린 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저 북녘 땅에 수많은 굶주린 아이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할 것입니다.

‘아니 그 일을 어떻게 제가 감당합니까.’

‘제가 먹을 것도 쪼들리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습니까.’

 

내가 가진 자원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처한 현실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때 빌립은 <계산>에 빨랐습니다.

요6:5~6,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로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은,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이렇게 질문하신 것일 뿐,

사실 자기가 하실 일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주목하신 것은, 아마 빌립의 고향이 벳세다,

그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질문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질문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어디에서입니다.

그런데 빌립의 대답을 보십시오.

7절 ‘빌립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당 조금씩만 먹는다고 해도 2백데나리온 어치의 빵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빌립의 대답은 동문서답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어디에서라고 질문 했는데

빌립은 얼마 들 것을 계산한 거예요.

 

이만 한 돈이 들기 때문에 어디에서라는 질문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이에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 신뢰가 없는 거예요.

‘현실 상황’ 속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디에서, 라고 질문을 했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해야죠.

그런데 빌립은 스스로 그 질문을 바꾸어서

얼마나 들 것인가를 계산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에서 일은, 산술적인 계산이 가장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믿음)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계산입니다.

 

계산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계산인 것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계산에 예수님의 능력을 포함시키지 않았어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 하되, 예수님의 능력을 포함시키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3. 오십 명씩 앉히신 이유.

‘사람들을 오십 명씩 둘러앉게 하라.

제자들은 그대로 사람들을 모두 앉혔습니다.’ 눅9:14~15

 

제자들이 기대했던 말은 어떤 말일까요. ‘이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라.’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0명씩 둘러앉게 하라.’

 

50명이라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 지켜볼 수 있는 규모에요.

조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모인 사람들 숫자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시내에서 집회가 일어나면, 항상 주최측 인원 계산과, 경찰의 인원 계산이 서로 틀립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 때에도

종들에게 물을 떠다가 줘라.

포도주로 되어있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물을 떠다가 가져다주는 중에.

분명한 증인을 만드시는 거예요.

 

물 떠온 하인들은, 분명히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것처럼 50명씩 나눔으로써

효율적인 배분뿐만 아니라,

장차 일어날 기적을, 확실하게 기적으로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죠.

 

▲4.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 기적을 일으키시는 방법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 앞에 갖다 놓게 하셨습니다.’

 

감사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현실은 아니지만, 그 감사에 대한 고백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담겨있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기적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기에

이 감사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어려운 지금 어려운 현실 속에 있습니까?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일으키실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십시오.

감사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감사로 기적을 일으키셨어요.

상황은 변화 되고 문이 열리고, 그리고 기적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셔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는 기적을 통해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합니다.

 

구약의 엘리사도 (수넴 여인에게) 동일한 기적을 일으키셨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떡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5.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그런데 남는 것을 버리지 말고, 다 주워 담으라니요.

사람들이 먹되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제자들이 먹다 남은 것을 주워 담으려고 할 때

‘얘들아, 그냥 내버려둬라. 너희가 배고프면 내가 또 만들어줄게.

그까짓 꺼 왜 주워. 그냥 버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께 더 자연스러운 모습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정 반대로 말씀하셨어요.

 

꼭 필요할 때 기적을 일으키시지만, 자연법칙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아끼고 절제하며 살아야 된다는 자연법칙 말입니다.

 

제자들은 배불러서 이제 12광주리 분량이 버려지는 것이 되고 있을 때

너희들은 저것을 주워라. 담아라.

그 말씀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가장 클라이맥스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은

인생의 자연 법칙을 절대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

동일하게 중요시 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것이 단순이 절제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배부른 자들이 가져올 영적 위험을 아셨기 때문이죠.

 

여러분, 굶주린 자들에게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배부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어려운 거예요.

 

굶주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만을 정하면,

빵을 주지 않고 복음만을 전하면 그것이 들리지 않는 거예요.

 

동시에 배부른 사람들에게 절제를 가르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들려지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에게는 배부르게 해주심으로 복음을 전하셨지만

또한 배부른 자들에게는 절제하게 하심으로서 복음을 들려주셨어요.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것은 너무나 위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길어서)  더 읽으실 분 ....................

 

호세아서 13장 5절, 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배부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5절, 6절 다 같이 읽습니다.

‘내가 광야에서, 그 가뭄의 땅에서 너를 알았다. 내가 그들을 먹이자 배가 불렀고

그들이 배가 부르자 교만해졌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잊어버렸다.’

 

배부름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입니다.

그런데 배부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영적 위험이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하는 거예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배부른 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따랐는지 아십니까.

6장에 가보면 그들이 강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보고 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는 것이죠.

이 분이 우리의 왕이라면 우리는 매일 배고프지 않겠구나.

얼마든지 우리는 기적을 통해 매일 배부르게 될 수 있겠구나.

그들이 실상 찾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배부름이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자꾸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배부름 때문이라면

그것은 참 된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것이죠.

우리는 언제든지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죠.

 

배부른 사람들이 남은 조각을 버린 분량을 생각해보니 열 두 바구니가 되었어요.

배고플 때는 열 두 바구니만 있어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자 열 두 바구니도 버려지는 것이 되었다는 거예요.

배부름이 가져다주는 영적 위험, 그것을 경계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것을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왜, 버려질 때 그 빵은 썩어지는 빵이오,

자연 법칙에 의해서 썩어지는 빵이요. 계속 빵으로 있는 기적의 빵이 아닙니다.

 

그것을 주워 담음으로서 전략하고 절제함으로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또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과 또 버리는 것이 없게 하는 자연 법칙을 따라 순종하게 하시는 예수님,

이것이 얼마나 균형을 이루는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어요.

창조 때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적은 또 하나의 자연일 뿐입니다.

 

기적은 자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일합니다.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법칙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적으로 이후에,

기적으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또한 우리와 함께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적에 우리 모두가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우리가 일으키는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으키시는 기적으로 먹게 되고 회복되고 치유되고

구원받게 되는 수많은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우리가 가진 자원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으로 인하여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절약하고 절제함으로써

또 다른 기적이 우리를 통해 계속 일어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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