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7:1-10 2012.10.07.설교녹취, 출처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생은 고난과 괴로움을 피할 수 없는데,
그 역경을 통과하면서, 더 진지해지고, 더 하나님께 귀의하게 되므로.. 결국은 득이 된다는 주제입니다.
본문 전도서 7장 초반부에 보니까 7~8가지 역설을 소개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잔칫집보다 초상집이 낫고
-웃음보다 슬픔이 낫고,
-우매자의 노래보다 책망이 낫고,
-시작보다 끝이 좋고
-교만보다 인내하는 마음이 좋다.
보통사람들이 추구하는 경향보다는,
썩 불편한 부정적이고 원치 않는 내용들이 낫다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1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기름은, 재물을 뜻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드려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예수님 머리에 기름을 붓죠..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제일 먼저 명령했던 내용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명령했어요.
동물의 이름을 하나 하나 짓는 것은,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이 아니라
그 속성과 가치를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얘기죠.
그래서 히브리 사람이 이름을 갖는다는 말은
‘그 속성과 가치를 꿰뚫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이름에는,
그 인물의 성격과 가치가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든 족속의 아버지 등 주1)
기업의 이름에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제각각 있습니다.
보통 기업의 브랜드 가치가 매년 발표되는데,
거기에 빠지지 않는 회사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코카콜라,
이번에는 우리나라 기업도 10위권 안에 하나 들어갔더군요.
나이키 같은 경우엔 본토에 공장이 없죠, 오직 브랜드 가치 하나로
동남아시아 그 노동력이 싼 국가에 공장을 두어서 사업을 하는 기업이죠.
이름값 하나가지고 돈을 버는 거죠. 그래서 이름의 가치는 중요합니다.
오델로가 쓴 글에 보면,
나의 지갑을 훔치는 것은 쓰레기를 훔치는 것 같지만
내 이름을 훼손하거나 훔치는 것은 생명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름은 생명이에요. 중요한 겁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이름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산 가치를, 이름의 가치보다 더 무겁게 여기시나요?
세상 사람들은 그럴지라도, 성경은
이름의 가치가, 재산의 가치보다 더 높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 가치를 둘 다 가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의 가치는.. 가지는 자가 있지만, 못 가지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가치는.. 신앙 안에서, 우리 모두가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에 못지 않은 이름의 가치를, 여러분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남은 생애를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을 늘 기억하시면서,
자기 이름의 가치를 높일 수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2절, 초상집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여러분 그 911테러가 났을 때
뉴욕 시장이 루돌프 줄리아니, 아마 들어본 분들이 많을 겁니다.
루돌프 줄리아니의 아버지는 무명 복서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인데
아버지는 무명 복서로 매를 맞아가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 매 맞아 번 돈으로 아들을 최고 학부까지 키웁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평생 2가지를 가르치죠.
① 맞을수록 침착해라.
뉴욕 시가 대 혼란에 빠졌을 때
줄리아니 시장은 신속하게 몇 가지 정책을 발표하고
그 뉴욕 시를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가르쳐 주었던 게 ‘맞을수록 침착하라’
②두 번째로 가르쳤던 것은 ‘결혼식은 선택이지만 장례식은 필수다.’
그래서 아들을, 항상 죽음과 직면하게 합니다.
저도 이번주간에 제 은사님이요 아버님 같은 김창인 목사님
충현교회 원로 목사이셨죠. 96세 일기로 지난 화요일 날 새벽에 소천 하셨어요. (2012.10.03.)
그래서 두 번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느낀 소회는,
그 장례식에서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한때 새파랗게 젊었던 부교육자들이, 어떤 분은 머리가 백발이 되어있고,
어떤 분은 허리가 구부정해져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로 걸어오고 있는 죽음의 소리를 장례식장에서 듣게 됩니다.
종교 개혁가로 알려져 있는 마르틴 루터는 원래 법학도였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와 길을 걷는데, 갑자기 벼락이 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 곁에서 벼락에 맞아서 죽어요.
이 친구의 죽음 앞에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본질적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죽음 앞에서 법이 무언가?’
내가 공부하는 법이 도대체 뭔가 그래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신학도가 됩니다.
죽음이 주는 메시지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잔칫집에서는, 깊은 인간의 본질적 묵상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죽음의 현장에서는, 우리는 내게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마지막 길은 뭘까?
죽음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인간이 반드시 한번 묻고 지나가야 되는 질문들을 갖게 됩니다.
요새 세대를 가르쳐서 ‘검색만 있고, 묵상이 사라진 세대’로 명칭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검색만 남고 묵상이 없어요.
학문의 세계도 그렇고 피상증에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 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5절,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책망을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도 이 나이가 먹었는데, 누가 나를 책망하면 듣기 싫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흔이 넘어서는 남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되요.
40이 되면 '불혹'이라 그럽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집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거든요.
자기 경험의 세계가 축적되고, 주관적인 세상적 이해가 생기기 때문에
남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충고가 쉽지 않아요.
50살이 넘어보세요. 그 정도는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책망을 달가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근데 유일하게 아직도 책망하는 분이 계신데, 저희 어머니가 아직도 저를 책망을 하십니다.
지금도 토요일 설교준비 한다고, 저녁에 밥을 먹고 ‘어머니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나오면
가끔가다가 ‘설교준비는 다 했냐?’ 라고 하세요.
아직도 어머님 마음에는 염려스러운 것 같아요. 근데 그 잔소리가 그리운 날이 오겠죠.
<친구>란 영화아시죠? 장동건 씨와 친구 유오성 씨가 나오죠.
둘이서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빗겨가고 수렁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학창시절을 회상하면서 얘기하는 겁니다.
영화 속에서, 유오성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출을 자주했대요.
한 번은, 자기가 가출했다가 며칠 만에 집에 들어가니까,
집안식구가운데 아무도 ‘너 어디 갔다 왔냐?’ 하며 책망하는 사람이 없더래요.
그래서 그 길로 다시 집을 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요. 책망하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비애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아무리 진흙탕에 뒹굴더라도, 누구하나 간섭하지 않고, 나를 책망하는 사람이 없을 때
그 인생의 쓸쓸함이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그래서 여러분, 싫어도 잔소리하고 책망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복입니다.
언젠가 그 책망이 그리워질 날이 와요.
그리워질 때가 오면, 책망하는 사람은 내 곁에 안계십니다.
성경에도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무슨 얘깁니까. 립 서비스로 인생은 절대 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요약하면, 웃음보다 슬픔이 낫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퍼니즘 시대죠. 사람은 웃음과 재미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재미가 중요한 가치가 되어 버렸어요.
심지어는 이 설교마저도 재밌게 해야 교회가 부흥이 된다는
잘못된 교역자들이 있어요.
가수도 이왕이면 재밌는 가수가 가치가 높고
회사에서도 면접 볼 때, 이왕이면 재미있는 인간형을 뽑아요.
재미가 전혀 쓸데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용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세대가, 그것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되었다는 것에 위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가벼워졌어요. ‘검색만 남고 묵상이 사라진 시대’가 되어버렸어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책도 두꺼운 책은 안 팔려요. 얇은 책, 200페이지 안에
글자도 크고 디자인을 잘 해야 책이 팔리는, 그런 이상한 세대가 되어버렸어요.
여러분 돈키호테란 책 아시죠?
돈키호테 옆에는 항상 산쵸가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늙은 귀족인데 이상주의자입니다.
이 세상의 부패를 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이상주의자로서,
그 허름한 시골판사 산쵸를 데리고 다녀요.
늘 사고를 저지르고 이상주의를 펼칩니다.
그때마다 이상주의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인물이 누구냐면.. 산쵸입니다.
돈키호테가 이상주의에 빠져서 허황된 말을 하고 있으면,
항상 옆에서 산쵸가 뭐라 그러죠? ‘배고픈데요.’ 늘 그럽니다. 이런 식으로 초를 칩니다.
두 사람의 해학적 대화는, 굉장히 인생의 절묘한 균형을 잡아줘요.
사람이 웃음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이상론으로만 세상이 가능 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역설을 통해서, 인생의 균형을 어느 한곳(영원, 하나님)으로 몰아갑니다.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참는 마음이란, 인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인내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용어 교만입니다. ↑
우리 생각에는 인내, 교만.. 서로 반대개념이 아닌 것 같은데
본문은, 인내의 반대 개념을 교만으로 말씀하고 있어요.
왜 인내의 반대가 교만일까요? 아브라함의 예를 봅시다.
그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의 별들을 보아라. 셀 수 있느냐? ‘너의 자녀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웃었겠죠?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씨라고 칭함을 받으리라’
거기서 ‘씨’는 히브리어로 ‘제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집안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러자 아브라함의 아내가, 어느 날 아주 희한한 제안을 합니다.
‘여보, 이러다가 사실 우리아이가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이 깨지게 생겼어요.
내 몸종인 하갈에게 들어가서 생명을 생산하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결혼질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1부1처입니다.
그것은 정당한 모델이 아니에요.
그런데 아내의 제안에 슬그머니 원칙을 내려놓고 하갈을 맞아서 생산을 합니다.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합니다.
벌 중의 가장 무서운 벌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가장 무서운 형벌이에요.
우리 집에서 부모님 밑에서 자랄 때,
때리지도 않고 입 다무셔서, 공포의 위협을 가할 때 얼마나 무서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3년간 침묵하십니다.
13년 뒤 나타나셔서 처음 하신 말씀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무슨 뜻입니까?
‘너 왜 내 약속을 기다리지 않았느냐,
왜 나를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느냐!’하는 책망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책망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네 인생에 개입해서 너와 관계하겠다. 회복을 전제한 책망이었습니다.
잘 보세요. 아브라함이 왜 기다리지 못했습니까. 왜 인내하지 못했습니까?
교만해서 그럽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잘난체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삶의 태도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내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인간이 제일 못하는 게 뭐죠? 하나님의 시간을
하나님의 방식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실수를 저지릅니다. 기다리고 인내하지 못했어요.
그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을, 인간이 가장 못해요.
시편에 정제된 언어를 통해, 그들의 인생의 경험을 녹여낸 딱 한 줄은
‘너희는 잠잠히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게 겸손한 태도에요.
성경은 전부 기다림의 역사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역사입니다.
그 기다림을 여기선 겸손이라고 얘기합니다.
◑자 그렇다면 정리를 하겠습니다.
이 전도서7장의 7~8가지 역설을 통해서 모아져야 될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보편적으로 찾는 가치 말고, 그렇게 가고 싶지 않고, 되어지고 싶지 않는
부정적인 성향을 성경은 더 낫다는 겁니다.
좋은 이름. 죽는 날, 초상집, 슬픔, 책망, 끝, 인내,
이 공통점이 뭡니까. 수고와 고난입니다. 그게 더 낫다는 겁니다.
베드로전서에는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 너희를 즐거워하고 기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이 고난이 왜 왔습니까?
범죄한 첫 인류가 직면한 모든 결과가,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봅시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7, ‘먹지 말라 한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평생 수고해야한다.’
범죄 한 인류가 맞닥뜨릴 수 있는 생의 실질적 현장은
수고의 현장이고, 고난의 현장입니다.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 수고와 고난의 삶의 장면은, 그 근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왜 시작된 겁니까?
인간의 죄의 문제에요.
우리는 그 슬픔과 분노와 수고와 인내의 현장을 맞닥뜨릴 때마다
무엇을 직면해야 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 덩어리였기에 이런 결과를 맞게 되었는가,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을 만나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수고와 고난이 주는 현장의 중요한 메시지에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었나...
그래서 주님 앞에 겸손히, 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죠.
그 수고와 고난이, 과연 우리를 벌 주기 위함일까요?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경을 잘 보세요. 현재 우리가 인생의 장면에 맞닥뜨리는 눈물/ 수고/ 고난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누구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어,
우리의 눈에 흘렀던 눈물을 닦아주러 오시는 날입니다.
‘너희 눈에 흘렀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계21:4
고난이 무엇을 바라보게 합니까?
고난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어요.
장차 완성되고 회복될 영광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마5:4
솔로몬이 전도서 1장~6장까지 수많은 인생의 방황에 자리마다 물었던
큰 철학적 질문이 뭐였습니까?
-누가 위로자가 되겠는가,
-이 곤고한 인생의 삶 속에, 누가 진정한 참 위로자가 되겠는가?
근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 고난의 삶의 현장에서,
‘애통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그래서 그 고난은 그 수고는, 결국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진정하고 영원한 위로자에게로 인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아무리 우리가 받는 환란이 엄청날지라도, 장차 누릴 영광의 시간을 비교하면
그것은 경한(가벼울 경)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당해야 70~80세 까지 당하다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죽음 저 너머 우리에게는, 더 영원한 본질적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은 경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환란과 수고와 눈물과 고난이 주는 몇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2가지 선물이 있는데
하나는 구원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고난이라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고통이라는 감각기관이 죽으면, 그건 저주인 것 아시죠?
나병의 특징은 무감각입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뭉그러져 가는데도
자신은 고통을 못 느끼는 겁니다. 한센병이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아픔, 고통은 우리에게 복입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중에 미즈노 겐죠 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괴롭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눈알만 움직일 수 있는 전신마비 환자였습니다.
벽에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붙여놓고
눈으로 시선을 주면, 옆에 도와주는 분이, 철자를 조합해서, 시를 적은 것입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전부 논조가 그렇습니다.
고난과 수고와 환란의 이 통로는
우리를 결국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안내하는 겁니다.
▶고난이 주는 첫 번째 유익은 우리를 정결케 한다는 겁니다.
윤리나 도덕적인 개념의 정결이 아니고
오직 그분만이 마지막 위로자임을 깨닫고 붙잡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정결을, 보통 ‘흠도 티도 없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자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결은 반대로,
‘이분만이 내 인생에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고 참된 답이 되신다’ 라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야 내가 평소에 가장 소중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게 자기 보물입니다. 가치입니다.
제일 중요한 생명, 그렇듯이 우리 인생의 불구덩이가 뒤집어씌워지면
내가 평소에 무엇을 가장 소중이 여기고 살았구나 그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정결케 되는 겁니다.
▶두 번째 고난이 주는 유익은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고난이 가르쳐 주는 유익입니다.
때문에 환란이 임하는 백성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즐거워 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의 7가지 역설을 통해
왜 계속 죽는 날/ 초상집/ 슬픔/ 책망/ 인내 등
즉 늘 우리가 맞닥뜨리고 싶지 않는 부정적 생의 요소들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 얘기했을까요?
이것을 만나야 인생은 깊어지고, 본질적 물음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끝은 누굽니까,
우리에게 참된 위로자
‘애통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니,’
그 위로자는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짐과 우리의 눈물과 고난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가 마지막에 붙들어야 할 분이며, 유일한 해답임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주님으로 해답을 얻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시기를,
나그네 길이 되시기를, 순례의 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일어나 찬양하십시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때로는 살아가다보면,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픔 초상집 책망 끝없이 기다려야하는
인내 죽음 슬픔 이런 걸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봐야합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요, 위로자이신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우리는 매 순간마다 잊게 됩니다.
하나님 지금 나는 끝도 없이 긴 터널에 있는 것 같지만
언젠가 이 터널의 끝에 어둠을 몰아내고 들어오는 빛을 만날 줄 믿습니다.
빛 되신 예수께서 내마음속의 성령으로 조명하시어
이 말씀 붙들고 주님만 사랑합니다.. 하며
일어서서 저 문을 나서는 고백이, 여러분 기도 속에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
주1)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이름에는,
그 인물의 성격과 가치가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든 족속의 아버지 등
아담이, 너는 곰, 너는 사자, 너는 말.. 피조물들을 이름을 다 짓고 나서 보니까
그중에 돕는 배필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쉐나: 죽음을 의미)
옆구리를 열어서 갈비를 빼 여자를 만듭니다.
그 여자는 장차 그리스도의 의해서 만들어질 교회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 아담은, 둘째 아담을 예표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의미가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연합하는 그림을.. 창세기 속에 감춰놓고 있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 아담에게 주어진 첫 번째 명령이, 이름을 짓도록 한 겁니다.
속성과 가치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아담에게 요구한 거죠.
그래서 히브리 사람이 갖는 이름은 단순한 명사를 갖는 개념이 아니라
그 의미와 본질과 가치를 본다/ 둔다.. 그런 개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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