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변해야 합니다 P1 사11:1~4 설교 스크랩, 녹취
*부제 : 기름부음이 임한 지도자 나라가 변해야 합니다 P2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본문 말씀을 보면, 세상의 거대 권력, 거대한 제국, 강력한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독특한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연한 순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거예요.
이 사실을 깨달은 기독교 역사가들은,
‘세상 역사는 권세 있는 장군이나 군주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자에 의해서 이끌어진다’고 갈파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힘은,
어떤 정치적 힘이 아니라, 바로 성자의 감화력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더라도,
성 어거스틴이나, 암브로시우스, 성 프랜시스의 삶을 보더라도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심지어 신자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가야만,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에요.
왜냐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어요. 인간은 다른 동료를 위로해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늪에 빠져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에요.
인간에게 구원의 선물이 주어지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죠.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런데 본문 1절과 2절을 연결해서 보면,
‘그 연한 싹이 돋아났는데,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할렐루야.
이사야 61:1절의 말씀,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내게 기름을 부으사.’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 회당에 들어가서 선포하신 말씀인데,
오늘 본문에 사11:2절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시면, 드디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설교 주제
다른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슥4:6
우리 생각에는, 장군의 힘으로, 군주의 능력으로 일을 해야 .. 뭐가 될 것 같은데,
‘연한 순bud 같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아무 일도 안 될 것이 명백한데,,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한
연한 순(싹) 같은 예수님의 능력을 가진 자들은,
굉장히 작은 자 같은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상상할 수 없는 잠재력이 터지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이 날마다, 순간마다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에게 한 달란트냐, 두 달란트냐, 다섯 달란트냐의 문제가 아니고
그 위에 기름 부으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요.
내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축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달란트,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의 문제가 아니라
혹시 다섯 달란트라도, 그저 땅에 묻어두고, 그냥 죽은 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에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데
11:2절 중반부터 보면
-지혜와 총명의 영, spirit of wisdom and understanding
-모략과 재능의 영, spirit of counsel and might
-지식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할렐루야. spirit of knowledge and of the fear of the LORD
원어적으로 보니까 이런 뜻이에요.
-지혜와 총명의 영은 .. 분별력과 통찰력을 주시는 성령이 임하십니다.
-모략과 재능의 영은 .. 분별력과 통찰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힘,
여러분이 이런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통찰하고 분별하는 것을, 이루어갈 수 있는
기획력과 실행력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에게 머물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성령님의 임재하시는 그 가운데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공부하는 사람이나, 일 하는 사람이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나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이런 놀라운 통찰력과 실행력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서 살아갈 때
비로소 그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이지요.
“지혜와 총명의 영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일동) 아멘!”
“모략과 재능의 영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우리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구하셔야 되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그릇을 준비한다고 해도,
기름이 부어지지 않으면.. 빈 그릇일 뿐이에요.
물론 그릇 자체가 가능성이요, 자질이긴 하지만,
가능성과 자질 ability만으로는 안 되고
성령께서 그 가능성을 사용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 말씀은 ‘그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향기를 맡는다. 냄새 맡는다’라는 뜻입니다.
아주 시적인 표현이지요.
우리가 향기 나는 대상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며 따라갈 때가 있잖아요.
그럴 정도로 여호와 경외함을 아주 좋아한다.. 아주 즐거워한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증거는.. 주님을 섬기는데 즐거움이 있어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요.
그런데 반대로, 사람이 숨을 내쉬며 들이쉬면서
죄악을 뿜어내고 죄악을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있어요.
죄의 쾌락이 있는 곳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찾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사실 인간 본성이 그렇지요.
그건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성령이 소멸된 사람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좋아합니까?
-하나님 경외함을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본성을 따라,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즐거워합니까?
내가 냄새를 맡고, 좇아가는 그 대상에 따라서
내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니면 육신의 사람인지.. 스스로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충만해서, 임재하심이 분명해서
코로 숨을 들이키거나 내 쉴 때도
성령님으로 호흡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표현이에요.
내가 육체로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이 살아있는 것이죠.
몸뚱이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살아있는 거예요.
이게 본문의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육신을 입으셨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셨던 거예요. 그의 존재 자체가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본문 1절과 2절과 3절 말씀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니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아니면 사회 공동체를 보면서도,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공감하고 있는데
이 사회가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에 임하셔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이 우리 가운데에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성도들을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형상과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 이 사회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온통 사람들이 숨을 내쉬며 들이마시면서 거짓을 들이키고 거짓을 내뿜고,
죄악을 들이마시고, 내뿜고 있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면, 담배 냄새가 들어가고/ 나오고 하잖아요.
옆에 있으면 힘들죠.
술을 진탕 마신 사람들은 술 냄새에 반응하고 풍기며 살아가죠.
술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이 나라를 정말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치 아스팔트처럼 영적 토양이 척박해진 그런 땅일지라도
그 빈틈에 싹이 돋아나는 생명의 강력한 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영적으로 척박해진 땅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하면
세상을 바꿀 줄로 믿습니다.
▲복음 생명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결국 이 나라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의 사랑이, 결국 이 나라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의 사랑이
결국에 이 나라를 분열되어 있는 나라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람들이 긍정론을 이야기하고
아무리 ‘손에 손 잡고’를 노래해도,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부모와 자식도 하나가 되지 못하잖아요.
사랑한다고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이야기한 부부도, 하나가 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나 자신도 내가 마음에 안 들고, 제일 인생에 장애이고, 한계이고, 어려움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인생을 살아보니까 저만 사라지면 될 것 같더라고요. 이게 제일 힘든 문제잖아요.
인간이 내적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내적 분열을 겪고 있어요.
죄가 있는 것은 반드시 분리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분열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해야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온전한 존재로 회복이 되는 거예요.
가정이 하나가 되고, 교회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가 되고
민족 안에 이 작은 땅 덩어리에 있는 동서간에도, 남북간에도,
진보와 보수 간에도 하나가 되지를 못하잖아요. 세대 간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잖아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도 하나가 되지 못하잖아요.
인간은 이 한계를 넘을 수 없어요. 복음이 임하지 않고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이상론이 아니라,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힘인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인 것이지요.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은 교리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종교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혼자 인생을 살아본 결과도 그렇지만,
제가 결혼해서 15년을 살면서도, 부부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는 없어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에 미쳐야 되요.
세상 것에 미친 것이 아니라. 복음에 푹 빠져보세요.
하나님의 이 깊은 사랑 가운데에 절여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치유하심이
이 나라의 백성들의 상한 마음을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나라가 변화 되려면, 십자가 복음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가야 되요.
변화를 아무리 갈망해도 인간의 변화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인간이 지혜, 능력의 문제는 다 한계가 있어요.
영원히 가는 것은 없어요. 오래가지 못해요.
여러분, 인생이 오늘 보았지만 새 해가 된다고 새로워집니까?
새 날이 온다고 해서 새로워집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어요. 새 날이 되면 새로워지게 만드셨어요.
그런데 새 날이 되어도 우리는 새롭지가 않아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새해 첫날이 제일 피곤해요. 여러분 새해가 되면 인생이 새로워지나요?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정치가 새로워지나요?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정말 변하고 싶다면 정말 상대적인 세상이, 존재가, 공동체가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하늘의 절대성을 받아들여야 되요.
상대성이 변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인, 절대성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의 상대성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이 깨어져야 합니다.
상대성의 그릇에 절대성을 담을 수 없거든요. 부숴지는 거예요.
상대적인 모든 관점, 가치, 그런 것들은 깨어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작은 싹 같지만, 작은 돌멩이 같지만
그 돌멩이가 거대한 신전을 부숴서 산을 이루게 될 것이다.
다니엘이 봤던 하나님의 환상이었죠.
그래서 이 땅의 상대성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이 다 깨어지고 나면
나라도 정치도 사회도 교회도 다 새로워질 수 있어요.
*상대성 : 인간의 지식, 이론, 사상
*절대성 : 하나님/성경의 지식, 신앙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가인은 ‘획득하다’ 라는 뜻이에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아들을 얻었다. 이 감격, 감탄사가 가인의 이름이었어요.
아벨에 대해서는
‘하와가 가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다’ 끝. 아무 감탄사도 없어요.
아벨의 이름이 뜻은 ‘허무하다’이에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전도서 1:2절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아벨, 아벨, 아벨”로 나와요. 놀라셨죠?
*전1:2절이 히브리어 성경에 총 7단어로 되어있는데, 그 중에 5단어가 아벨(헤벨)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완벽한 동산에서 쫓겨나서
다른 환경 가운데에 살면서 너무 긴장했어요.
그러다가 가인이 태어날 때 엄청난 긴장감이 있었어요.
그 아들에 대한 높은 기대치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을 낳고 인생을 살아보니까, 아들이 태어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게 없어요.
이 환경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인생이 허무한 거예요.
그 심리가 둘째로 반영되어서 둘째 이름이 ‘허무’에요.
여러분. 결혼한다고 새로워집니까? 싱글들에게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인생 늘 꿈꾸는 것. ‘결혼하면 새로워지겠지..’
새로워지는 인생을 기대하다가, 곧 고난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 희생하며 살아야 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연한 순 같이 되고,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영)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 가정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때, ‘내가 대학만 들어가면 내 인생이 바뀌겠지..’
대학 들어가면 인생이 새로워집니까?
오히려 더 엄청난 방황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죠.
정권이 바뀌면 새로워집니까? 새로워 졌습니까?
내일이 새 날이 오면, 새로워집니까?
선거 기간에 꼭 목숨 걸고 이 사람 뽑아야 새로워진다..
외치는 사람을 보면 저는 상당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인간은 다 상대적이잖아요. (절대적/진리/해답이 아니라는 뜻)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다 거기에서 거기에요. 도토리 키재기예요.
완벽한 존재는 없어요. 절대적 존재는 없어요.
변화는 갈망하는데, 그 진정한 변화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르는 거예요.
상대성(인간의 유한성)은, 상대적인 만족밖에 줄 수 없어요.
절대자를 끌어 앉지 않는 이상,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리더십/통치/하나님 나라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 내게 임하셔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이 나라의 공동체는 변해야 되는데, 변할 능력이 없습니다.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늪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오셔야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인간은 더럽기 때문에, 마치 세제를 풀어야 빨래감의 때가 다 씻겨나가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말씀, 성령이 임해야만
사람의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 여기 오셔야 합니다. 내 스스로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부부싸움..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해요.
하나님이 그 가정의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말이
그저 영적인 모토, 슬로건 걸어놓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하나님이 그 가정의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남편은 늘 자기만 옳고, 아내는 다 자기만 옳은 거예요. 다 상대적인 존재잖아요.
절대적인 그 분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셔야만, 부부싸움에 마침표가 찍히게 되어있어요.
나라 안에 야당과 여당의 싸움, 진보와 보수의 싸움, 서로 용납을 못하게 되어있어요.
서로 물어뜯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오셔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요, 우리 각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주셨어요.
세상 사람들은.. 사회도, 문화도, 다원주의가 휩쓸고 있는데,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다원주의가 유행인데,
왜 나라 안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의견에 대해서, 서로의 관점에 대해서
상대적 관점으로 보지를 못하는가.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보지를 못하는가..
(물론 상대주의가 정답은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절대주의만 정답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열이, 대부분 다 자기 의견을 ‘절대화’시킴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이 복음으로써
사회 모든 사람들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그 영역의 기초를 재건해야 합니다.
본문 사11:1~3절을,
자기 영역에서 실현시키는 겁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을 높이 올리는 것이에요.
여러분, 복음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모두가 죄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가정 안에서, 학교 안에서, 교회 안에서, 나라 안에서.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간구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시고,
그가 속한 그 공동체에
구원과 회복과 일치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혜와 총명의 영으로,
모략과 재능의 영으로 행하여
반드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입니다.
◑11:3b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11:4a.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판단력’입니다.
판단을 그르치면, 모든 공동체가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이 임하면,
판단, 결정을 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한 쪽이 좋아하고, 다른 한 쪽이 싫어합니다만,
하나님의 판단은.. 모두가 거기에 수긍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자가 일시적으로 나타나지만, 결국은 그를 훌륭한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링컨, 처칠 등 그런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식으로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힘 있는 변호사, 판사에 줄을 대려고 합니다.
그런데 힘으로 일어나면, 힘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칼로 일어나면..
성령 받지 않은 지도자는, 힘으로 누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힘으로 눌러서, 무슨 선한 결과가 나타난 적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 가정 안에도 똑같은 문제가 있어요.
부모가 힘으로, 즉 나이의 힘, 물질의 힘, 부모라는 인륜의 힘으로
자녀들을 복종시키려 한다면.. 문제는 끊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본문 말씀이 이루어져야.. 거기에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약자가 곧 정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약한 자는 늘 정의다’ 라고 절대화 시키면, 심각한 폐해를 일으키게 되어있어요.
‘힘이 곧 정의다’도 안 되고, ‘약한 자가 늘 정의다’도 안 되고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가 정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하나님의 나라)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11:5 ‘그는 정의로 그의 허리띠를 띠고, 신실함으로 그의 몸띠를 삼을 것이다.’
저를 한 번 따라 해보세요. ‘정의를 세워야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정의로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정의로 몸의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허리띠를 두르지 않으면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정의’란
힘의 정의도 아니고, 약자의 정의도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가지 않으면
이 나라, 이 사회, 가정, 인생,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되어있어요.
정의가 절대적으로 인정되고 시행되는 세상이 와야만
질서와 안정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렇지 않고) 여론 정치를 하잖아요.
저는 여론정치를 보면서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는 여론정치를 하기 때문에,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는 것이죠.
민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치를 합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좋은 것 같지만, 백성을 존중한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백성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공의를 버리게 되는 거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바르게 국정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시류에 편승하는 수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표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는 수준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아왔던 현실 정치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집단들은, 자신들의 손을 들어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또 다른 힘으로 활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 사이에는 정의라는 것이 없어요.
오늘 날 대한민국은,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바른 것인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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