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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리고

LNCK 2014. 11. 10. 20:35

◈곧, 그리고              막1장 16-20                   2011.11.27. 출처보기

                                                                        *원제목 / 사람을 낚는 어부

 

https://www.youtube.com/watch?v=F99igrSbWnE 

 

 

◑곧... 그리고...

 

마가복음은 ‘곧’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헬라어로 ‘유쑤스’인데

‘곧’은 우리말로 ‘즉시, 바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이라는 단어가 마가복음에서 40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1장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10절, “ 물에서 올라 오실새”

12절,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8절, “ 그물을 버려 두고”

20절, “ 부르시니”

21절, “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굳이 ‘곧’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 ‘곧’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급박성

 

하나는 ‘급박성’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을 쉼 없이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예수님께 보고하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 하시며 온 갈릴리를 돌아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빨리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곧 급박하게 임하는데 한가롭게 보내실 여유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또 다른 표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라는 단어인데 헬라어로는 ‘카이’인데, 이 단어를 매우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총 16장에서만 555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복음서를 쓰는데 참 솜씨 없게 썼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하며 접속사로 이어지는 문장은 얼마나 재미없습니까?

오늘 말씀에서도 ‘카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번역문장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살려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그리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리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그리고)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리고)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그리고) 곧 부르시니

(그리고) 그들이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짧은 문장에 무려 1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는 주님의 행동과 말씀을 별다른 수식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and ... and ...”입니다.

 

어린 아이가 사건을 서술할 때 그렇듯이, 예수님의 행동만을 그대로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삶이 압축된 형태로 또 급박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and”라는 수만큼 바쁘게 사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33년의 생애를 사셨지만 매우 밀도 있고 바쁘게 33년을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보람 된 일에 바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모셨던 분도 매우 성미가 급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이분은 갑자기 생각이 나면 저녁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합니다.

 

이분은 목회자들이 월요일에 쉬는 것도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주일에도 쉬지 않고 봉사하는데

목회자들이 월요일에 한가하게 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급하고 부지런하게 사셔서 그런지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부지런하게 생전에 해야 될 일을 다 끝내놓으니

더 이상 할 일 없다고 데려가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과욕이나 지나침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서 바쁘고 부지런한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2. 즉각성

 

마가복음에서 ‘곧’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즉각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나 부름 앞에 우리는 생각할 겨를이나 이것저것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부르시고”(20)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18) 예수님을 좇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immediately’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는 어떤 설명도 없습니다.

다짜고짜 나를 따르라고 하고

제자들은 어떤 이유나 설명도 없이 즉각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이 첫 번째 만남이었는지, 아니면 예전에 몇 차례 만남이 있었는지,

그 때가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 선선했는지 날이 몹시 뜨거웠는지,

제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즐겼었는지 아니면 권태를 느끼고 지루해 했었는지,

어부로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는지 실패한 인생이었는지,

부유했는지 가난했는지,

부모와 관계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일체 서술이 없습니다.

 

이것이 곧 제자 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는 즉각적인 순종만 요구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보다 자세히 제자 됨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1-62)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인륜적으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거나

가족과 철저히 단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 사역의 중요성과 즉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핑계를 대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일 내일 하며 미루고만 있지 않습니까?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내일로 미루는 것 또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변명하거나 미룰 수 없습니다.

즉각 돌격 앞으로 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즉각 달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순종,

그것도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물과 배와 아비를 버리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는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18절입니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20절입니다.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자기들의 생계수단이었던 그물과 배를 버렸습니다. 아버지 또한 버렸습니다.

마치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던 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부름을 좇아,

자신의 기반이 되었던 땅과 아비 집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이것들은 아브라함의 안전을 보장해주던 도구였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대를 이어 배와 그물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먹을 것과 안전을 보장해주었던 것이 바로 이 배와 그물이었고,

아비로 대표되는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인생의 최후 보루들을, 예수님의 부름 앞에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안전하지만 실상 자신을 매이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게 자신의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고향은 안전하지만 자족하여 변화를 거부하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4천년 전 갈대아 땅의

한 이름 없는 늙은이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배와 그물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2천년 전 갈릴리 호수의 한 이름 없는 어부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

그는 로만 가톨릭의 초대 교황이 되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부름 앞에 망설였던

어느 부자 청년은 여전히 이름도 없이 ‘부자 청년’으로만 불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또한 제자도의 대가를 의미합니다.

제자의 길은 버리는 것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가진 모든 것과 욕심을 채우면서 제자의 길을 가려면, 그 길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버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우리가 가진 물질이나 안전이나 명예나 위치 때문에

우리는 머뭇거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좇지 못합니다.

 

▲세상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중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저) 란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마리 생쥐와 두 명의 꼬마 아이 ‘헴’과 ‘허’가 어렵게 해매다 치즈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 치즈를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치즈가 점점 없어져서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위기를 재빨리 알아차린 생쥐들은 다시 치즈를 찾아 나섰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인간들은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침내 그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치즈를 훔쳐갔다고 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헴은 “나는 이곳이 좋아. 편해. 다른 곳은 몰라. 다른 곳은 위험해.”

하고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사람 ‘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났습니다.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수록 새 치즈를 발견할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이 비상상황임을 알고 빨리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침몰하는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의 키워드는 ‘창조와 변화’입니다.

안전한 것에 머물러 있으면 도태되고 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떠나고,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진리 가운데로 들어 설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우리 주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으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고기를 잡는 그런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위대한 어부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가지며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보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보람 있는 일은 사람을 얻는 일입니다.

그 회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그들을 올바른 데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두 어부였기 때문에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농사꾼이었다면 '사람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을 것이며,

금은보석을 캐는 광부라면 '사람을 캐는 광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집을 짓는 목수라면 '사람을 건설하는 목수'라고 하셨을 것이며,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라면, '사람의 영혼까지 살리는 의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사업가들을 향해서는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CEO’라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열두 명의 제자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틴 땅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땅 끝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사람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는 일을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일도 제자들에게만 밝히셨으며,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사람을 남기는 것보다 큰 장사가 없습니다.

 

   옛날 『상도』라는 소설이 인기 있었습니다.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입니다.

   거기 나오는 대사 중 요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수 백 수천 배의 이익을 창출합니다.

 

   그래서 석유왕 록펠러는 “나는 어떤 능력보다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에

   가장 높은 연봉을 지불할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처럼 위대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사60:22)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혼자 복 받으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며 우리를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고 복에 이르는, 그런 비전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은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글도 알았을까요? 고대 사회에서는 문맹률이 95%에 달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12제자들 대부분은 글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중에 가장 똑똑했던 제자가 아마 가롯 유다였던 것 같습니다.

회계를 맡았지만 그는 똑똑했기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상과 맞지 않거나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우직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태나 요한이나 베드로가 성경을 남겼지만, 옛날에는 대필이라는 것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말로 구술하면 대필자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글을 대필해서 쓰는 것이

당시 보편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을 썼던 마가는 이집트에서 2천년 전통을 이어오는 콥틱교의 1대 수장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들이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그 입에서 기탄없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요 스승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어부들을 택하여 그들을 위대한 사도들로 만드심으로써

그 누구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기대가

우리를 그렇게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물에 고기가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이 걸려드는 일은 얼마나 신이 납니까?

주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비전 가운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어떤 이상이나 교훈을 따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자님이나 부처님이나 모두 자기를 따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교훈이나 이상을 따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석가모니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처럼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도들의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세상에 누가 자기를 따르라고 과감히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분의 삶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상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삶에 긍정적입니다.

그분의 사랑이나 이상뿐만 아니라 그분의 땀과 눈물, 기쁨과 감사,

고통과 분노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분의 무능력과 섬김도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이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좇다가 우리는 사랑에 실망하고 실패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이념을 목표로 하다가 곧잘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반공이나 통일이나 세상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물질이나 야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며

혹시 예수를 가장한 물질이나 권력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새 예수님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것들이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거나 자기 생각을 고집하다가

우리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양은 목자만 좇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풍성한 꼴이 있는 푸른 초장이나 잔잔한 물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를 따라가지 않고 눈에 보이는 꼴을 좋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좇아가면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오지에 들어갈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밀림 속에는 길이 없기 때문에 이분이 그 곳 지리에 익숙한 현지인을 고용을 했습니다.

이 사람을 따라서 가는데 도무지 길이 아닌 곳으로 인도하며,

자꾸 길을 만들며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답답하여 물었습니다.

 

“도대체 길은 어디 있는 거요?” 그러자 그 안내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곧 길입니다.” 밀림에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으니 그가 길이란 말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길이 되십니다. 그분만 바짝 좇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그분의 뒤만 따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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