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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을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테크닉

LNCK 2014. 7. 12. 17:47

◈짜증을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테크닉            벧전4:8             출처, 편집

 

 

◑1. 하루에 서너 가지의 소소한 감사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심지어는 주님까지 원망하게 만드는.. 삶의 지뢰밭과 찌르는 가시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사람에게, 화풀이를 잘 합니다.

가장 쉽게는 배우자를 걸고 넘어지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그 불똥을 튀기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고함을 질러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될 뿐입니다.

 

-가정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

-재정적 문제

-배신과 갈등과 핍박 등 사역에서 오는 문제,

 

이런 저런 문제들로 인하여,

신자/사역자들은 쉽게 지치고 피곤해지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곤 합니다.

 

이때는, 예수님도 내 원망의 대상으로 종종 전락합니다.

 

▶이런 삶이 만약 지속된다면, 개선하기 위한 삶의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①쉬운 어린이 찬송들을 불러 보십시오.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God will make a way, Where there's seems to be no way♪

②작고 소소한 감사꺼리들을 자꾸 기억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오늘의 날씨와 나를 위해 핀 꽃들,

-오늘 점심 식사의 멋진 맛,

-오늘 받은 친구의 전화, 카톡, 주위 동료의 간단한 미소와 격려,

-큐티나 설교 시간 때, 말씀 받은 것,

-자녀가 어제 백점 받은 시험지를 들고 온 것 등.

 

이런 단순한 서너 가지의 감사와 찬양의 기도로,

우리는 짜증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주의 일을, 짜증내면서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많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것이.. 어떻게 보면 짜증의 연속이거든요.

 

그 와중에 주의 일도, 예배도/봉사도/기도도/찬양대도.. 짜증내며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짜증 중에 하는 섬김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짜증나실 것입니다.

‘얘야, 그만 됐다! 그만 두거라!’ 하실 것입니다.

 

▶짜증이 나면, 사실 맥이 풀리면서, 사역과 봉사가 하기 싫어집니다.

마음이 내켜지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이 구역예배인데, 성가대 연습 날인데,

내 마음이 내켜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짜증 때문입니다.

짜증 때문에, 스스로 사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한 밤에 자기 전에,

하루에 감사할 거리 서너 가지만 찾아보십시오. 수첩에 적어보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서너 가지로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마치 바다에 빠진 사람이 구명조끼를 입는 것처럼,

‘감사와 찬양의 기도’는, 이 세상의 피곤함과 지침 속에 우리가 빠지지 않고,

둥둥 뜨게 만들어 줍니다.

 

짜증이 물러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분이 좋아지니까.. 사역이 저절로 열리는 것입니다.

 

별 거 아니고, 우스운 방법인 것 같지만.. 일단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늘 고통과 고난만 주신다’가 변하여,

‘하나님이 내게 늘 웃음과 기쁨을 주신다’로

내 삶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소소한 찬양과, 소소한 감사의 기도가, 내 사기를 그렇게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더 잘 되어집니다.

 

 

◑2. 사랑으로 원수의 죄를 덮어야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일화가 있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절친한 친구와 굉장히 심하게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 대한 증오와 분함과 억울함이 마음에 가득차서,

그림을 착수하려고 하면서, 첫 번째 떠오른 얼굴이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고 배반한 가룟 유다의 얼굴입니다.

 

친구에 대한 증오심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떠오른 가룟 유다의 이미지가

화폭에 옮겨졌어요.

 

이제 그림의 중심이 되는 예수님이 아무래도 그려져야 될 거 같아요.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무리 몇날 며칠 밤을 애를 써도,

예수님의 그 사랑 많으시고 긍휼이 가득하신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문득 깨닫게 됩니다.

자기 마음에 지금 친구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활활 불타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고

친구를 찾아가서 화해를 요청합니다.

 

친구와 화해를 한 뒤에 와서,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이 그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예수님 얼굴을 그렸다는 얘기입니다,

친구를 생각하며 그린 가룟유다 그림은 지우고.

 

▶이거는 우리도 똑같은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험인가 하면, 분명히 내게 잘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아! 이건 잘못된 거다 내가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의 잘못을, 내 마음으로 골똘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막혀버려요.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십자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설교/봉사 등 주의 일은 더욱이 손에 안 잡힙니다.

 

여러분, 누구를 한 번 미워해 보세요.

어떤 사람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해내고 그 잘못을 기억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내가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화가 난 가운데 하나님을 불러보세요.

막혀버려요, 안 만나집니다, 그거 참 묘한 거지요.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벧전4:8

 

먼저 우리가 오해를 제거해야 될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건 아니에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의 뜻은,

내게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 내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 되면,

그 사람의 잘못이 덮어지고 가려져서, 잘못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이 있어요.

분리수거를 하니까, 종이박스 같은 것을 한 켠에 모아두면,

수거 차량이 와서, 다 수거해 갑니다. 아마 그걸 팔면 돈이 되는 거 같아요.

 

우리도 택배로 받는 물건이 많다 보니까, 그 박스를 거기에 갖다 버려요.

근데 그걸 아무리 집어가도, 그분이 내게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대상들을 가져가거나, 빼앗기거나

(뭐 빼앗긴다는 것도 의미가 없겠지마는.. 밖에 있으니까요)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하더라도

그 사람은 내게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수가 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볼펜 한 자루라도, 내가 아주 소중하게 아끼면서 간직하고 있는 볼펜일 때는,

그 볼펜을 몰래 훔쳐간 그 사람은 원수가 됩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내게 무엇을 뺏으려고 하는 사람,

나를 짓밟으려고 하는 사람,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원수로 성립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내게 속해 있는 그 어떤 것들도 내 마음에 담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아까워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나와 원수가 될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라는 얘기에요.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마음에 담지 않음으로써,

원수가 성립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라 이런 얘기입니다.

 

▶자! 스테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근데 원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분노로 증오로 활활 불타오르면서 원수들에 대해

‘너희들이 얼마나 잘 사는가 두고 봐라’ 이러한 저주스러운 말을 내뱉으면서 죽어야 되는데,

원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스테반 집사님은, 자신의 육체를, 이 세상을, 자기 목숨까지도

마음 안에 담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육체를 돌로 치는 자들이, 원수로 성립하지 않는 겁니다.

 

존재가 그런 존재가 되고 나니까,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죄악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모르면 바보게요? 그거 압니다.

 

      마음 안에 아~무것도 이 세상 것 중에서 소중하고

아까워하면서 담고 있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불교식으로 마음을 그냥 다 비워두면 가능한 겁니까?

그런 법은 없어요.

기독교에서는 빈 마음이라는 게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라고 하는 것은,

그래야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질 때,

비로소 세상 것들이 다 비워지는 거예요.

 

내 마음에서 아까워하고, 좋아해서 담고 있는 것,

그것보다 하나님이 더 사랑스럽고,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더 사모할 때라야

비로소 내 마음에서, 세상 것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비워지는 겁니다.

 

제 정신으로 이게 잘 안 되는 사람은,

환란과 핍박과 연단을 거치면서..

하나님으로 더 채우게 되고, 세상 것들을 점점 더 비우게 됩니다.

 

▶누가 내게서 돈을 한 1천만원 떼어 먹었습니다.

아니면, 상속지분이 내게 1천만원이 덜 왔습니다.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진심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담고 있느라고,

미처 돈이 마음속에 담겨질 틈이 없었어요.

그 천만원이 내 마음에 담겨질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천만원 떼어 먹은 것이,

내게 크게 스트레스가 안 됩니다.

그걸 내가 아까워 한 적이 없으니까요.

 

진짜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돈이 귀한 줄 알지만, 그래서 아깝지만..

약 2~3분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양원 목사님께서, 아들을 둘 다 잃으셨으면서도

그 아들들을 죽인 자들을 양자로 삼으시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을 채우느라고, 미처 자식을 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그런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이삭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이렇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내 육체/목숨까지도

내 마음 안에 담지 않고 있을 때에,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내 마음에서

분노/상실감/억울함을 느낄 수 있게끔, 내게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의 의미라는 거예요.

그의 혐의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가 무혐의가 돼버리는 겁니다, 내 마음 안에서.

 

▶서두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예화를 들었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이웃의/원수의/가족의 허물과 죄를 덮지 못하면,

나와 하나님과의 길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면 사역도 안 되고/직장 일도 제대로 안 됩니다.

일이 사방에서 꼬여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옆집 아이가, 내 자녀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었다면,

그걸 내 마음속에 눌러 담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모든 일이 다 꼬여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된 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아버립니다...

그때는 즉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허다한 죄를 덮어야’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