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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복의 역설

LNCK 2014. 7. 4. 17:25

◈복의 역설                눅6:20~26                14.03.02.인터넷설교 녹취, 출처

 

 

◑서론 / 사람들이 참된 진리를 깨닫기 어려운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주1)

 

중요하니까 아래 주1) 을 꼭 읽어보세요.

 

 

◑본론 / 네 종류의 복된 사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말씀을 보십시오. 모두가 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4 종류의 복 된 사람들과

4 종류의 화가 임할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누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이 복이 있다.

-슬피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

-미움 받고 배척 받고 버림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피하고 싶어하고, 자기가 처하고 싶지 않는 자리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정 반대로 어떤 사람들이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유한 자가 화가 있다.

-배부른 자가 화가 있다.

-웃는 자들이 화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되고 싶고, 목표로 하고 싶고,

처하기 바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모순입니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씀이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어떻게 이 모순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고 따라야 할 진리의 역설적인 말씀으로 정해졌을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순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익숙한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오직 신앙 안에 있는 십자가의 도와,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영적인 진리 안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그 지혜와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죠.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달으면, 이 말씀은 너무나 쉬운 말씀이고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될 진리의 말씀입니다.

 

※참고로, 야고보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약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고,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길이요, 그 결과 주님의 은총을 받는 길입니다.

 

<어떻게 이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이, 우리에게 진리의 역설처럼 나타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세 종류에 단어들에

그 이유, 그 비결이 숨어있습니다.> ←문제 제기.

 

▲1. 첫째는, 제자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눅6:20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으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이 말씀의 대상은 제자들이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있고

핍박 받고 모욕 받는 그 자체가 복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에요.

 

신명기 28장에 복과 저주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 받는 복,

순종하지 않을 때 받는 저주에 보면 순종할 때 받는 복에는

부유함이 있고, 배부름이 있고, 축복이 있어요.

분명히 가난과 굶주림은 복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가난, 제자들의 굶주림, 제자들의 울음,

제자들이 받는 모욕과 배척을 말씀하신 거예요.

 

왜 제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핍박 받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한 시대에 있었던 종교적 지도자를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가난하게 되고, 굶주리게 되고, 울게 되고, 모욕 받고, 배척받게 된다면.. 복된 것이다.

그 사람은 복이 있다.. 말씀 하신 것이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하나님 나라 밖에 있었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들어오신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나의 삶 속에 임할 때, 우리에게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결단은 회개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요.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회개로 들어갈 때

우리 삶에 내려놓는 것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삭게오는 그가 일평생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제가 누구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고

내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그의 재정적인 회개까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의 입술의 고백에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돈지갑이 회심했다는 거예요.

마르틴 루터가 쓴 표현이죠. '돈 지갑의 회심'

 

아마 그가 지금까지 토색해온 사람들에게 네 배나 갚았다면

그는 어쩌면 재정적으로 파탄이 났을 수도 있어요.

그의 고백대로 그가 실천했다면, 그는 가난한 자가 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의 인생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부유한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서

그는 회개의 결단을 하면서, 그는 (자원해서)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무리한 부의 축적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의 자리를 복되다 라고 말씀 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고, 제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때로는 가난과 굶주림과 울음과 배척이 온다면 아주 복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드립니까? 여러분 개인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회개로써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시점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사회/ 경제적으로 일이 뜻하게 되지 않았을 때,

그로 인해서 마음이 가난해져 있을 때

우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내 인생이 뜻하는 대로 형통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의 마음이 언제 가난해집니까.

내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내가 원하던 삶이 되지 않았을 때,

실제로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 또한 가난해지지 않았을까요.

 

대개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지면,

마음이 가난해지기 보다는, 마음도 함께 부유해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전적 통치)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가난은 화가 아니라 복입니다..

만일 부유함 때문에 마음이 함께 부유해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물리적으로 꼭 가난해짐으로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우리에게 사회 경제적인 가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쇠퇴와 성장은, 경제적인 성장은 반비례한다는 것이죠.

한 사회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난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언제 한국 교회가 성장했고, 언제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갈급했습니까.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해져 있을 때. 그 가난함이 우리에게 복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찾아온 부유함이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말씀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이죠.

 

가난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제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이 가난을 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복이 아니라, 가난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됨으로써 가난해졌다면

그것은 화가 아니라 복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을 진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지금’과 ‘그 날’이 대조되면서 나타나고 있죠.

 

본문의 구절 마다 반복되는 단어가 ‘지금’이라는 단어입니다.

 

21절,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으니 (그 날에)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으니 (그 날에)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4절 ‘지금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그 날에) 너희가 이미 너희의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이다.’

25절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그 날에)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고 있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그 날에) 너희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에는

‘그날’ 이라는 단어가 적용됩니다.

 

23절, ‘그날에는 너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에게 이렇게 대했다.’

 

'그날에는'.. 그 날이 있어요.

복이 있는 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날’이라는 말이 덧붙어 있어요.

 

그런데 화가 있는 사람들이게는, ‘그날’ 이라는 것이 없어요.

복 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삶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그 날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 날은 어떤 날입니까.

온전히 임할 하나님의 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지만

아직 온전히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온전히 임할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땅 가운데, 가난과 굶주림과 울음과 핍박이 다가와도

그 날이 다가오고 있기에,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기에

 

때로는 가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굶주림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울음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핍박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변화시킨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 날을 사모했던 분들입니다.

    다가올 그 날을 사모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지금의 인생에도 충실했어요.

 

    다가올 그 날이 있기 때문에, 지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이것이 아니라

    다가올 그 날을 믿는 사람이, 지금을 성실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지금 인생에 충실하지만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자유할 수 있었고 내려놓을 수 있었던 분들입니다.

 

    지금은 가난해도 하나님 나라의 속한 부유함이 있고, 굶주림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배부름이 있고,

    슬픔 가운데 울어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웃음이 있고

    핍박이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화가 있다. 라고 이야기 했던 네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 부유한 사람,

-지금 배부른 사람,

-지금 웃고 있는 사람,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지금’에만 초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부유함, 지금의 배부름, 지금의 웃음, 지금의 칭찬.

그래서 부유함의 노예가 되고, 배부름의 노예가 되고,

영적인 근심이나 경건한 슬픔이 없이 희희낙락하는

세상의 웃음만을 따라가는 인생.. 그것은 화가 있는 인생이라는 것이죠.

 

지금에만 초점이 있는 부유함이라는 것. 그것은 화가 있다.

다가올 세상, 다가올 그 날을 준비하지 못하고

이 세상 가운데만 있는 부유함과 배부름,

 

그런 즐거움과 그런 세상의 칭찬만을 구한다면.. 그것은 화가 임할 인생이다.

 

‘다가올 그 날을 준비하지 못한 인생은, 복이 아니라 화다.’ 라는 거예요.  

 

    마지막 눅6:26절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렇게 대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인생은, 좋은 인생 아닙니까?

그런데 왜 화가 있는 인생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뒷부분의 말씀에서 설명해주는 거예요.

 

거짓 예언자들도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칭찬은 진실과 성실 때문에 받은 칭찬이 아니라

거짓으로 이 사람에게 아첨하고

저 사람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아첨하고

이 거짓 예언자들이 그랬죠.

 

구약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이 전쟁에 나가면 무조건 승리한다고 말하고

왕이 잘못해도 왕이 옳다고 말하고,

그런 거짓과 아첨으로만 예언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죠.

 

때로는 옳은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첨과 거짓으로만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화가 있는 인생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금이 아니라

그 날을 바라보며 지금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부유함과 배부름, 웃음이 아니라

때로는 이 세상의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복 된 인생을 살 수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3. 세 번째 단어는 ‘인자 때문에’ 라는 말씀입니다. :22

 

눅6:22, ‘인자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고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고 밀쳐내도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인자 때문에!"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죠. 거기에 '십자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걷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고 배척하고 모욕한다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이 아니라,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기에 복 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복되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미움 받고 배척 받을까요.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받는 배척과 미움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 아니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믿는 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왜 역설처럼 주어졌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역설이에요.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에 진앙지가 있듯이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이 세상 모든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역설로 주어진 것은

십자가(진앙지)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에 익숙해지면서 잊어버린 것이 있는데

십자가는 원래 우리가 친숙해지기 어려운 것이라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상징이 원래 십자가가 아니었어요. 물고기였어요.

십자가는 예전에 원래 사형 틀이에요. 역설입니다.

 

다른 종교의 심벌을 보면 아름답잖아요.

불교의 연꽃. 사실 아름답잖아요. 예쁘잖아요.

이런 사형 틀을 심벌로 하는 곳은 우리들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역설이죠.

 

저 십자가를 바라보며 초기의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의 심벌은 물고기였죠.

그런데 이 십자가가, 물고기 상징을 제치고,

우리의 신앙이 상징이 되고 교회의 상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항상 역설적인 삶을 살라는 거예요.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내가 죽지 않도록, 죽게 하소서.” 이해할 수 없는 기도죠.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피해야 할 죽음이 있고,

절대적으로 붙잡아야 할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야 될 죽음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죽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죽음 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역설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거예요.

 

모순처럼 보이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죽어야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함께 따라해 볼까요.

 

어거스틴의 기도. “주여, 내가 죽지 않도록, 죽게 하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날마다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죽음을 죽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죽지 않는 거예요.

십자가는 무력함의 자리였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러나 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예수님은 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무력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힐 때

우리에게도 또한 우리 주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

그 말씀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만 체험할 수 있는 역설적인 진리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는 스캔들이에요.

스캔들은 보통 사람들의 기존 질서에 완전히 벗어나는 일(추문)들을 스캔들이라고 말하죠.

 

메시아이신 그 분이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으셨다는 것이 스캔들이에요.

그러나 부활은 더 큰 스캔들이에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엄청난 부활의 스캔들이에요.

 

우리도 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해요. 좋지 않은 스캔들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 복의 역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피하는 가난과 굶주림, 울음, 배척.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우리에게 들어옴으로써

우리에게는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가치가 들어옴으로써

더 이상 사람들이 복 되게 추구하는 부유함, 배부름,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부유함, 배부름은

우리에게는 화라고 여길 수 있는 가치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삶을 살기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함과 배고픔과 핍박이 굶주림과 모욕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에서 상이 가장 크기에

 

지금의 인생의 배부름과 부유함만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그 날을 바라보며 그 날의 기쁨과 즐거움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는 힘들게 살아갈지라도 그 사람은 복이 있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지금만이 아니라 그 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십자가의 역설을 체험하는 제자의 삶이 복되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주신 부요함, 배부름, 기쁨, 칭찬, 모든 것에 도취되어

쓰러지는, 화가 임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변화시키고

십자가의 길로 변화시키고, 제자의 삶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어떠한 부요함, 배부름, 세상의 칭찬이 주어지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제자, 복된 사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주1)

◑서론 / 사람들이 참된 진리를 깨닫기 어려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참 된 진리는 세상의 관습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라볼 때는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멀리 동떨어진 삶을 사는 세상 사람들 사고방식으로 볼 때

진리는 모순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우리 인간 자체가 모순 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믿음이 있지만 의심이 있고 사랑이 있지만

미움이 있고 겉과 속이 다른 모순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선 모습과 나 자신의 모습, 하나님 앞에 선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죠.

퍼슨이라는 단어, 우리가 인격이라는 단어는

원래 헬라어로 보면 페르소나, ‘가면’이라는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우리 인격 조차도 가면일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나 자신을 아는 것 같지만, 나 자신도 모르는 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선을 행하는 나에게 동시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모순된 인간의 모습을 한탄하며, 하나님 앞에 절규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시각 자체가 모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 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자체도 모순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많은 말씀이 모순처럼 보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을 잃는 자가 얻을 것이요,

-얻는 자가 잃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질 것이요.

-으뜸이 되려는 자는 모든 자들의 종이 될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역설이란 무엇입니까. 서로 모순 되거나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 합해져서 진리가 되는, 진리를 나타내는 그러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다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은 평화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역설이 아니죠. 전쟁 자체는 결코 평화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평화를 위해 싸울 때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 한다면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말씀들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역설로 주어지는 진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