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를 건넌 새 피조물 출14:10-14, 고후5:17 2014.06.15.설교 인터넷에서 스크랩
◑서론/ 운명론, 예정.. 이런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월드컵 우승팀이 운명 지어져 있을까요?
브라질 월드컵이 개막을 했습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전 세계가 축구 경기에 열광을 할 것입니다.
전 세계 도박사들은 큰 판을 벌였습니다. 누가 이길까를 놓고 배팅을 합니다.
누가 얼만큼 이길 것이냐? 사람들은 내기하기도 좋아하고 예측하기도 좋아합니다.
과학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고
예언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예측을 하십니까? 대한민국 팀이 16강에 들어가리라고 보십니까?
이 모든 예측은, 재미삼아서 하는 것이지
사실 심각하게 결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병적으로 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재미삼아서 이번엔 16강에 꼭 들것이다 아니면 이번엔 힘들 것이다.. 라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 재미는 경기를 지켜보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변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것이 이 모든 것을 정말로 재밌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족집게 도사가 있어서 완벽하게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그래서 누가 1등을 할지, 2등을 할지, 누가 4강에 들지 미리 다 알 수 있고,
그 결과를 가지고 시상을 한다고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아예 시합을 할 필요가 없이, 예측을 다 해놓고
그것으로 상을 준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게 아니지요.
결과(예정)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흥분을 하는 것입니다.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과를 모르니까,
모든 팀이 최선을 다해 뛴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모든 것을 예정, 운명론에 떠맡기는 식)으로 운동경기를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결과가 결정되어 있든지/없든지.. 과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문명의 미래와, 역사의 미래와, 내 미래를 다 알고 계신데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생략하시느냐? 그게 아니에요.
인류로 하여금 남은 세월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세상이 굴러가게 하십니다.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과(예정)를 안다고 해서, 과정을 생략해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욥이 시련을 당할 때에
그가 믿음을 지키고 승리할 줄을 알고 계셨지만
그렇다고 욥이 그 과정을 건너뛰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결과를 안다고 경기를 생략해도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욥이 승리할 줄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욥이 그 시련을 감당하고 극복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욥에게도 유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 갈 것을 믿지만, 그렇다고 당장 가야되는 것은 아니에요.
오늘 당장 가기를 원하시는 분 계시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우리의 생각도 그렇고 하나님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이 결과라면,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과정을 건너뛰고, 목적지에만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내 인생은 우리 각자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월드컵이 예측 결과와는 별도로 경기를 봄으로써 즐거움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최종적인 결과를 우리가 확신하지만
그러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도 유익하고,
하나님에게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인은 예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 예언기도를 받으려고 졸졸 달려가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게 아니에요.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죠.
내 미래를 내가 다 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고 간 것이 아니고
갈 바를 모르고 믿음으로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데리고 번제로 바치라 명하셨을 때
모리아 산에 도착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아브라함은 몰랐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 순종이 그에게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믿음이 성장할수록 더 믿음으로 진취적인 사람이 됩니다.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음이 성장할수록
더 강건하고 담대하고 책임을 지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주변에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소신도 없고, 용기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의존적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참된 믿음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킬지언정, 퇴보시키지 않습니다.
만일 의식이 퇴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배우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잘못된 믿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본론/ 그리스도인은 운명론을 벗어던진,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잘 아는 이 말씀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출14:10-1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을 떠나올 때
바로가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도 좋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군대를 보내서 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말과 병거와 군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사막의 모래 분진을 일으키며,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부르짖는 것은 잘하는데,
믿음으로 부르짖는 경우는 없고, 항상 두려워서 부르짖습니다.
모세도 상당히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조조의 군대를 바라보는 유비의 심정을 연상케 합니다.
그 때 모세가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14:13
그리고 모세의 말대로 됩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은 건너가게 하시지만
쫓아오던 애굽의 군대는 홍해바다에 빠져 수장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쫓아오던 애굽 사람을 또 다시 영원히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만이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고
쫓아오던 애굽 군대도 함께,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과거 애굽인들이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되었을 때에 섬기던 주인들.
그들이 여전히 쫓아와서 이들의 주인행세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를 두렵게 하던 자, 우리를 쫓아오던 자,
우리를 부리던 자들은 홍해를 건너오지 못합니다.
‘애굽 사람을 또 다시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애굽 사람)은, 과거에 우리를 다스리던 죄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뿐만 아니고, 사람이 예수 믿기 이전에 그를 부리던 운명,
그의 고약한 팔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저주, 실패, 가난, 질병,
정신적인 결함..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이 모든 것이 거짓 떼처럼 우리를 쫓아다녔습니다.
우리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홍해를 건널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건너오지만,
우리를 쫓아오던 거지떼 같은 이와 같은 과거의 것들은
건너오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습니다.
(이런 것까지 나에게 “예정”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만일 여전히 건너와서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악령일겁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만일 여전히 건너와서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어두운 운명이든 과거의 괴로운 팔자든
과거의 타고난 연약함이든, 과거의 저주가 여전히 우리를 쫓아와서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고, 우리를 잡아가려고 한다면
그 때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포를 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선포해야 됩니다.
“기록되었으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기록되었으되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포해야 됩니다.
◑말씀의 검을, 믿음으로 사용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읽기는 하되, 사용할 줄을 몰라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휘두르는 법을 배우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날이 예리한) 검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길은, 말씀의 검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를 보십시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이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지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내 의지로 안 됩니다. 혈기로 안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휘둘러야 됩니다.
그 앞에 원수는 무력합니다.
그렇게 하면 거지 떼처럼 내 뒤를 쫓아오던 운명이
후닥닥 떠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가 아기였을 때, 어른들이 장난으로
‘아기 잡으러 갑시다. 아기 잡으러 갑시다.’
그저 어른들이, 아기 놀라는 표정을 보면 재미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그런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걸 듣고 있던 제 아내가 ‘아기 잡으러 갑시다’라고 말하지 말고
‘아기한테 갑시다’라고 말해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강한 자가 우리를 잡으러 뚜벅뚜벅 걸어온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 우리의 운명이 세상의 시련이
우리를 잡으려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 같을 때에
우리는 담대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됩니다.
“나를 잡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노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나는 예수님에게 잡힌바 되었노라.
그 이외에 나를 쫓아오던 것들은, 홍해의 바다에 이미 빠졌느니라!”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과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말을 합니다.
우리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럼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의 이스라엘을 부리던 이런 악덕 주인,
저런 악덕 주인에 늘 시달리면서
그들을 섬기면서 그들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의 집에 속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진리를 멸시한다는 것입니까?
이 진리를 그들도 안다면, 그들도 달려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제 그들을 쫒아 오던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운명론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믿음으로 사십시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큰 구원입니다.
기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구원의 혜택을 우리가 충만히 받아야 됩니다.
구원에는 혜택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여러 혜택이 따라 옵니다.
이 모든 것을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을 우리가 선물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을 아들과 함께 은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면 족합니다’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혜택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주장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실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믿음의 역할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삶속에 실재로 이루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셨어요.
우리가 그것을 믿으면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으로 바꾸고
또 약속을 성취되게 하고 그리고 법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실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차원으로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할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믿지만, 믿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하던가
아니면 주저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불신이에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믿음을 무력화시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을 온전히 이루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것이냐/ 믿을 것이냐..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고, 의심으로 말미암는 두려움이에요.
과거의 애굽의 주인들을 여전히 두려워하고, 그들이 쫓아올까 문을 잠그고
그들이 문 밖에 있을까 몰래 내다본다면
그것은 홍해를 건너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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