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큰 은혜 약4:4~7 14.04.27.설교 인터넷에서 스크랩, 출처
※위 제목 ‘더욱 큰 은혜’는, 우리를 낮추어서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이며,
약4:7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끝까지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편
◑서론/ 벌레 같은 나
오래 전에 제/설교자가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점잖으신 대원 한 분이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가사를 문제 삼았습니다.
문제의 가사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며 주님께서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데
어떻게 자신을 벌레에다 비유할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이런 찬양은 부를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어디 그런 부분이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욥기를 펼쳐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25:6)
라는 부분을 읽어 드렸습니다.
이사야서나 시편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있다는 것들을 펼쳐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며
어쨌든 그 노래는 부를 수 없으니, 그날 성가대에 앉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찬양이
어떤 이에게는 분노가 치밀어 부를 수 없는 찬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 이전에 과연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레입니까? 왕자나 공주입니까?
그 대답은 '둘 모두 맞다'입니다.
우리는 벌레 같은 인생임과 동시에,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벌레임을 모른다면, 우리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왕자이며 공주임을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어쩌면 그것을 깨달아가는 여정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없어지는 극한의 상황에 처할 때
그때가 되어야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가진 한계와 정체성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함으로써
그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렸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새벽, 닭울음소리를 듣고 통곡해야 했습니다.
그 자리는 모두 자기 존재의 한계를 경험하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벌레임을 깨달을 때, 아니 벌레만도 못한 인생임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리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한 분만이 온전히 소망이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르는 것, 그 자리에서 벌레만도 못한 자기의 정체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어찌 보면 성경은 지극히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바람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많이 피우는데 하필 본문은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너무 가부장적이며 남성위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종종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남편과 아내 사이’로 표현한 이후
선지자들 사이에 이런 표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그러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표현을 통해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아내와 남편의 언약적인 관계는 배타적입니다.
결혼은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충실함이 배타적으로 요구됩니다.
다른 무엇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부부가, 배우자 이외의 상대를 만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둘 모두를 좋아한다거나,
너를 사랑하지만 다른 상대는 그냥 일시적인 만남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배우자를 배신하는 것이며, 버리는 것으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내 편이 아니라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여기서 ‘배타적인 관계’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은
어떤 지리적인 위치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기를 싫어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거부하거나 거역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평생 교회 안에만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세상과 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머물지만 얼마든지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러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그 반대 역시 성립합니다.
세상 속에서 일하고, 믿지 않는 이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곧바로 세상과 짝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세상은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도, 세상과 같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간음한 이’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나뉘어진 두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첫 시작입니다.
노파심에 덧붙이지만
‘그러므로 돈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픈 마음이 우리 안에 일어난다면
그 마음은 나뉘어진 두 마음입니다.
◑약4:5, 은혜
본문은 특별히 두 마음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으로 주어진 결정적인 내용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으며
그래서 그들의 심령 안에 심긴 말씀이 있다는 복음이
‘두 마음(하나님+세상 사랑)의 문제’에 대한 원칙적이고 신학적인 선포였다면,
본문 말씀은 ‘두 마음의 문제’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약5: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 그대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님이, 시기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기하신다는 말이 얼핏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며 시기하신다는 내용은
구약의 표현으로는 흔한 내용입니다.
그 옛날 호세아 선지자가 묘사한 대로,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은 삼각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곧 그분의 교회는
세상과 짝하여 사랑에 빠진 간음하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집 나간 아내를 향하여 질투하고 분노하며 다시 되찾아오고자,
속이 타들어가는 남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바로 은혜입니다.
6절에서 더 큰 은혜라 했을 때, 그것은 이미 언급한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5절)
세상에 마음과 생각을 모두 빼앗긴 간음하는 아내와 같은 성도를
'시기하도록 갈망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란, 상대가 받아 마땅한 대접의 정반대의 것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아내에게, 그 남편이 할 대접은 복수의 형벌입니다.
아버지께 받은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대접은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던 대로 품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대접은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간음한 아내가 받아야 할 대접은, 돌로 쳐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아내를 찾아 다시 아내로 맞아 사랑해줍니다.
배은망덕한 아들이 받은 대접은, 평생 종이 되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이 보고 견딜 수가 없어 분노할 정도의 환대였습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쳐버려야 마땅하고, 벌을 주어야 마땅한, 간음한 여인과 같은 성도들을
성령님이 시기할 정도로 사랑하시고 갈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즉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벌레-왕자’임을 깨달을 때,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정신이 빠져 있는 간음한 여인과 같은 성도들에게서
그분은 한 번도 눈을 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한 번도 당신의 마음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약4:6 더욱 큰 은혜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6절은 잠언 3:34절을 인용합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더 큰 은혜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곧 하나님께 순복하고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주어진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시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은혜는
그런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출 때에 받게 되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왜 거만함이라든가 겸손이라는 태도를 문제 삼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왜 자신을 높이거나 낮추는 문제가 그리도 중요할 까요?
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더 큰 은혜를 가져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 더 큰 은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문제는 세상과 벗된 마음, 곧 두 마음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불 일듯 일어난 정욕이고,
그것을 취하고자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욕심을 내고 다투고 시기하고 싸우는 마음입니다.
기도를 하긴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그의 원하는 바에 간섭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뜻을 주장하고 관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결코 자기 욕심만큼은 깨뜨릴 수 없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높은 마음, 곧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 곧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어떻게 문제 해결이 되는지 그 단서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세상 정욕 때문에 마음이 나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 그 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유혹을 받아 격동하게 된 우리의 마음이 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관계의 뒤틀림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면
모든 것이 다 뒤틀리게 됩니다.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벗이 되어 간음한 자가 되는 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의 열쇠는, 인간에게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속성이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인간의 자리를 고수하고 지켜나갈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모두가 해결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언약이며 약속입니다.
▶더욱 큰 은혜
주님은 그 더 큰 은혜를 넘어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늘 암송하고 좋아하는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더욱 큰 은혜는 다름아닌 '자기비움'(케노시스)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중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또 하나의 역설을 목격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비우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장 낮고 천하고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높여주심으로 모든 이름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고
영원한 만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그러므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성과 완전히 거꾸로인 것을 복음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상향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버리고
주님처럼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말년에 심장병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이 그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조금이라도 힘이 회복되면 한사코 병원을 떠났습니다.
평생 병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생명들을 보살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살아야 더 많은 소자들을 돌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초점은 항상 그녀가 돌보는 소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낮아져서 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어떻게 하든 그들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그녀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우리는 전도된 복음을 목격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모든 문제의 해결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높아지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라는 것입니다.
큰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참람한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의 복음이며 마귀의 복음입니다.
그 전도된 복음에 이끌리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나뉘어진 마음이며 두 마음입니다.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푸코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슬람 형제들이 살고 있는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진 그곳에서, 그는 이방인들을 섬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마26:40)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자기비움의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참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낮추셨습니다.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우리를 도우신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이렇게 낮아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네.'라는 찬송을 부르기를 거부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찬송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부를 수 있을 때
은혜의 세계는 우리에게 활짝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의 세계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온전히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문맥으로 본다면, 이 말씀은, 교만케 하는 마귀를 대적하고, 스스로 겸손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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