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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

LNCK 2014. 7. 19. 19:33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 (묵상글 모음)                      모두 펀 글, 출처 생략.

 

◑1.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이라는 유명한 우화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덴마크를 순회하던 어느 서커스단에서, 공연 준비 중에 불이 났습니다.

급한 김에 단장은, 관중 앞에 나서려고 분장을 막 끝낸 광대를

인근 마을에 지원을 청하러 보냈습니다.

  

때는 초겨울, 가을 추수가 끝나서 수확을 쌓아놓은 전답에

만약 불씨가 옮아 번졌다가는, 그 전답과 마을에도 불이 옮겨 붙을 위험이 많았습니다.

 

광대는 급히 그 인근 마을로 뛰어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서커스장의 진화작업을 호소하였습니다.

 

 “불이요! 서커스 장에 불이 났어요! 불이 번지면 이 마을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광대의 이러한 호소를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는 기발한 수법으로만 생각하고

손뼉을 치며 폭소를 터뜨릴 뿐이었습니다.

 

광대에게는 울 일이지 웃을 일이 아니었지요.

우리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광대가 자기 말이 진담이지 장난이나 익살이 아니라고,

정말 불이 옮겨 붙고 있다고 아무리 애걸하듯 설득하여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아니, 호소를 거듭할수록

이번에는 제대로 웃길 줄 아는 광대가 왔노라고, 더욱 더 흥겨워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불길은 마을에까지 번져서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마을은 온통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우화를 여러분 묵상해보십시오.

이 우화를 ‘광대’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아마 노아가 그랬었고, 소돔 성의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신학자, 성직자들의 처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물질문명에 젖어서 사는 사람들은,

특히 X세대, 신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도가 생뚱맞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마치 광대 옷을 입고 불이 났다고 외쳐대는

광대의 모습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스꽝스런 광대 옷을 입은 광대를 진지하게 대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광대가 진실을 전하려 해도

사람들은 그가 광대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연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우화에서 광대보다는 ‘불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여기서 ‘불길’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잠시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 기준과 도덕이 무너지고, 이기주의와 탐욕이 만연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해치는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시대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불의가 넘쳐나도 모두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극도의 물질 만능주의가 낳은 무신론, 도덕의 타락, 낙태, 마약, 살인 등

오늘 우리를 위협하는 온갖 광란의 몸짓들이, 바로 마을을 향해 번져 오는 불길입니다.

 

이렇게 불길이 시대를 집어 삼키려 할 때,

교회나 성직자의 외침이, 그 영적 권위를 상실해서

마치 어릿광대 삐에로의 외침처럼,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려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2. 평생을 믿어도, 개인주의적 신앙에서 못 벗어난다면..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써놓은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가정이 잘 살고 있는 것은,

독실한 장모님의 기도 때문이라는 일종의 감사의 글이었습니다.

 

90세를 넘기신 장모님께서

날마다 자기 가정을 포함해서, 모든 자녀들의 가정을 위해

매일 몇 시간씩 기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장모님을 두신, 복된 사위님이 되시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평생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오신 장모님/권사님이

90세가 넘어 그토록 오래 드리는 기도가

자기 자녀들만 위한 것이라면..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계평화와, 세계복음화와, 남북의 통일과,

주님의 재림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겠지요.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만약 이럴 것이라고 가정할 때,

일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신 권사님의 기도가

아직도 자기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충격입니다.

 

신앙이 성숙되면,

그의 신앙연조(연령), 또는 직분에 상관없이,

그의 기도와 관심이, 자꾸 넓어집니다.

 

그가 아무리 인지도가 높은 목회자라도,

90%이상 관심이, 자기 교회라는 바운더리 안에 수 십 년 동안 계속 머물고 있다면,

 

차라리 교세가 얼마 안 되어도,

사회의 약자들과, 북한의 동포들과, 세계 복음전파에 대해

자기 관심을 갖고서 기도하고, 성도들이 그 길로 가도록 인도해 가는 목자가

하나님 보시기엔,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일 것입니다.

 

 

◑3. 진지한 구도 제자를 만나기 어려운 세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의 복음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실제로 만나보면 피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행동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고 체험한 분들은 만나뵙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그 방향만이라도 옳고 의지가 확실한 경우만 보아도

너무나 고맙고 반가운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혹자들은 이런 말을 하는 저를 교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남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진정성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분들을 보고 싶어 하고

 

그런 분들을 만나면, 힘을 다해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커피숍에 갔다가, 우연히 옆 테이블에서 큰소리로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단히 20분 정도, 기도와 나지막한 소리로 찬송을 하고,

큐티교재(책)을 누가 대표로 읽었습니다. 거기까진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약 두 시간에 걸쳐, 결정적인 서로의 정보교환에 들어갔습니다.

부동산 시세, 그리고 아이들 학원 정보(어느 학원이 괜찮다더라)가

주된 대화의 토픽이었습니다.

 

옆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며, 그 대화를 듣던 교인이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셀 모임 맞아?’

 

사실 목회자들끼리 만나도, 진지한 구도의 영성에 관하여,

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의 신앙적 갈등과 고민과 성장에 관하여

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신에 정치 이야기, 교회 성장 비법 이야기, 목회 테크닉 이야기..

그 결과 만나서 서로 교제하고 나면, 믿음이 더 싸늘하게 식어집니다.

 

그나마 만나서 남의 흉을 안 보면, 성숙된 대화라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자기 삶에서, 구도 제자의 영성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런 신자(목회자 포함)를 만나보기가, 상당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별 사람 있나?)’

이런 생각이 제 자신부터 너무 팽배해 있는 것 같습니다.

 

 

◑4. 멈춰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지혜로울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학자 마이클 바엘리는, 축구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막는

골키퍼들을 관찰했습니다.

286회의 페널티 킥을 분석한 결과,

오른쪽으로 몸을 날린 골키퍼의 12.6%가,

왼쪽으로 몸을 날린 골키퍼의 14.2%가 공을 막아 냈습니다.

 

반면 움직이지 않고 골대 중앙에 머문 골키퍼의 경우 33.3%나 공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골키퍼 중 6.3%만이 중앙에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골키퍼들은 중앙에 가만히 서 있으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마, 가만히 있다가 골인을 먹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몸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든지요! 

 

어느 방향으로든 몸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아 보일 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덜 괴로웠습니다.

 

마이클 바엘리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움직이는

‘액션 바이러스’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뭘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성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멈추어서 상황을 명료하게 지켜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움직이는 것뿐 아니라, ‘멈춤’도 지혜로운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오히려 기쁨이 충만한 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은 긴장 된 날입니다.

그렇지만 동안에 노력한 결과를 시험하는 날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날입니다.

 

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를 대면하는 날이기에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자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심판 날이 다가 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고 자비와 용서로 함께해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나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겔18 :3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과거는 올가미가 아니라, 새 삶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새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과거를 들추어내며 무어라 하든지,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6. 무사의 칼과 하나님의 폭풍우

 

오래 전에 일본에 훌륭한 무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폭풍우에 배는 금방이라도 파선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갖고 있던 칼을 빼어 들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칼이 무섭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칼이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무섭겠소.

그런데 이 상황에 왜 갑자기 칼을 빼어 나에게 보여 주시는 거요?”

 

 무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칼이 무섭지 않듯이

 

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폭풍우가 무섭지 않소.

이 칼이 내 손에 있듯이 이 폭풍우는 하나님의 손에 있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절대로 우리를 해치지 않으실 거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미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폭풍우가 잠잠해지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것이니까요. 폭풍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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