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 전쟁의 상징적 해석 계16:12-16 김성수 목사 계시록66강, 출처
우리는 계속해서 마지막 일곱 재앙인 대접재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대접 재앙이 갖고 있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메시지가 뭐였습니까?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대접이 쏟아지게 되지만
그 대접이 눈이 멀어 여전히 암흑 속에 살고 있는 세상에게는 진노의 대접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뜬 우리에게는 은혜의 대접으로 선용이 된다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흑암 속에 사는 자들은 대접이 쏟아져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지만
눈을 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 대접이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된다는 것까지를 지난주에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이 대접 재앙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6: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여섯 번째 대접이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지니까 강물이 말라버립니다.
이 구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이 유브라데 강이
어떤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가나안 땅의 동쪽 경계가 바로 유브라데 강입니다.
그 유브라데 강 너머에서 걸핏하면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든 두 나라가 있지요? 바벨론과 앗수르입니다.
바벨론은 요한 계시록에도 계속해서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나라로 등장하지요.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했고 남 유대는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그렇게 그 큰 강 유브라데는 이스라엘과 대적들과의 경계와 전선戰線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유브라데 강이 마르고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그 대적들과의 전쟁이 있을 것임이 예고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한 구절을 가지고 ‘전쟁’을 추론해 낼 수 있는가요?
구약 성경에는 여러 곳에 ‘강이 마르고 물이 마른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렘50:37-38
37 칼이 그들의 말들과 병거 들과 그들 중에 있는 잡족의 위에 임하리니
그들이 부녀 같이 될 것이며 칼이 보물 위에 임하리니 그것이 노략될 것이요
38 가뭄이 물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
렘51:36-37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리니
37 바벨론이 황폐한 무더기가 되어서 시랑의 거처와 놀람과 치솟거리가 되고 거민이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악의 상징인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그들의 멸망을 ‘강과 물과 바다를 말리운다’라는 말로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강과 물과 바다를 말리운다’라는 구절이, 단순히 전쟁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장면으로 가보지요.
위에 언급한 구절들 말고 또 바다와 강이 말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건 ‘이스라엘’이 절대 잊지 못할 그 사건이 뭡니까?
홍해와 요단강이 말라서 마른땅이 된 사건이지요.
출14:21-22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수3:15-17
15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성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보시다시피 여기서는 단순히 ‘물과 강과 바다가 마른다.’는 구절이
‘전쟁’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들의 손에서 건져내서
그들에게 새 땅을 선물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 ‘강이 마르고 물이 마른다.’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대적들을 모두 심판해서 전멸시키시고
그 분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구해 내시는 사건을 묘사할 때
‘강이 마르고 물이 마른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능통했던 이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의 최초의 수신자들,
핍박 속에 고통 받고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대적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도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러한 고난이 닥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전쟁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다’라는 것을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 라는 짧은 구절 속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푼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모두 한 가지 주제를 명확히 그려내기 위해, 그물처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상징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와 그의 대적인 ‘마귀의 세력’과의 전쟁을 가리킵니다.
◑16:13~14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3절을 보시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사탄의 삼위일체(삼마일체)가 등장합니다.
‘용, 짐승, 거짓 선지자’
그들의 입에서 더러운 세 영이 나와서 온 천하 임금들을 미혹해서
하나님을 대적해서 전쟁을 하자고 부추깁니다.
14절에, 그 더러운 영은 ‘귀신의 영’이라고 명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마겟돈 전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더러운 마귀와
하나님과의 영적 전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후반부에 보시면
그 전쟁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치러질 전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말은 마귀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노리고, 세상을 미혹해서 전쟁을 일으키지만
결국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이의 큰 날,
즉 심판의 날을 재촉하는 전쟁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일곱 재앙에서 공부한 내용처럼
세상은 자기들이 꽤 강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하며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적까지 행하면서, 하나님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그 죄와 악을 완전하게 심판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15절을 통해서
이 아마겟돈 전쟁이 영적 전쟁임을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편집자는,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상징적 해석 두 측면을 다 받아들입니다.
정통신학은..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세대주의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데,
상징적 해석이 맞지만, 문자적 해석도 무시 못 합니다.
계시록을 모조리 ‘상징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뭐가 문제인가 하면,
맨 마지막에 21장, 22장의 천국까지도 상징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그러면 실체는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거지요. ‘영적인 천국’만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아마겟돈 전쟁이 (계시록에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기록은 3군데에서 나옵니다.)
영적인 전쟁, 마귀의 획책에 의해서 수행되어질 전쟁임을 예언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획책에 의해서, 실제로 육적인 전쟁도 일어난다고 봅니다.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등 구약의 종말론을)
문자적+상징적으로 두 측면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신학의 흐름은, 서로가 한 쪽 측면만 옳다고 주장해서, 서로 대립해 왔습니다만,
그럴 필요 없다고 봅니다. 맞는 것은 둘 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아마겟돈 전쟁도 ‘영적인/상징적’의미를 갖고 있지만,
실제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계시록의 묘사가, 너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르지만,
지상에서 물리적 전쟁이 일어나는 동시에
공중에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석해 봅니다./편.
◑계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직전에 14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있을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에
15절에서 ‘바로 그 날, 내가 도적같이 임해서 세상을 끝내버릴 그 최후의 날을 대비해서
너희는 그 전쟁 준비를 하라’라는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데
그 전쟁 준비의 내용이 뭡니까?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무슨 말입니까?
(이 구절에 의거, '상징적 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아 너희는 그 전쟁에 대비해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게 준 옷을 지켜서 벌거벗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게 바로 그 아마겟돈 전쟁에 임하는 성도들의 전투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중공군 2억이 이스라엘과 아마겟돈에 모여서
육박전을 치르는 그런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8~39장에 보면 소위 ‘곡과 마곡의 전쟁’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남쪽 연합군’과 ‘북쪽 나라 연합군’과
북방 곡 땅의 마곡.. 이렇게 세 주체가 연합되어,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자적’ 성경 해석에 의하면,
꼭 중공군은 아니더라도,
종말 때에, 중동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24:7
이 예수님의 말씀도,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종말에 전쟁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물론 계시록은 '묵시문학적 특성'이 있어서, 마태복음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요.
‘상징적/영적’해석이, 정통적이며, 틀린 해석이 아니고 맞지만,
거기에다 ‘문자적’해석을 곁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편.
▶이 경고의 내용은 우리가 계2~3장의 일곱 교회를 공부할 때, 본 적이 있습니다.
계3:2-4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우리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내가 도적같이 네게 임 할 테니 너희는 깨어있어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준 흰옷을 더럽히지 말라고 경고를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늘 오실 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결하게, 온전한 행위를 추구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지 말라, 그것을 조심해라는 뜻도 됩니다. 주1)
▶그런데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이 일곱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는
누구에게 주는 메시지였습니까?
바로 말세의 기간 동안에 이 땅에 존재하게 될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었지요?
그러니까 이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창조하신 그때부터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가시적인 완성을 이루시기까지의
그 말세의 기간 동안에 우리 교회가 겪을 영적 전쟁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징적 해석의 관점입니다.)
그 영적 전쟁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질 것이고
결국에는 최후의 심판의 일격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 모든 영적 전쟁을 가리켜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전투에 참가하는 성도들에게
다른 무기가 아닌 영적인 무기로 무장을 하라고 권고를 합니다.
이렇게 아마겟돈 전쟁은 성도가 치러내야 할 영적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6:10-18
10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아직도 수긍을 못 하시겠다는 표정이신 것 같은데,
마지막 16절을 보면서 확증을 해 드리겠습니다.
왜 그 전쟁터 이름을 아마겟돈이라 했는지 보자고요.
◑계16: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기서 아마겟돈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의 히브리 원어는 ‘할-므깃도’입니다.
히브리어 ‘하르’는 ‘언덕, 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마겟돈’은 ‘므깃도 산, 므깃도 언덕’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므깃도’라는 곳은 ‘전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므깃도 지역은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가로 14마일 세로 20마일의 평평한 땅입니다.
양편이 마주보며 포진해서, 전쟁을 치르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지요.
옛날에는 전쟁을 할 때, 넓은 평원에서 양쪽 군대가 모두 정렬을 하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장수들이 먼저 싸우거나
아니면 일제히 한 곳에서 정정당당하게 격투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 전쟁의 양상은 미국 독립 전쟁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군인들이 엎드려서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좀 바뀌게 되었지요. 넓은 평원에 정렬하고 있으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옛날식의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평원이 필요하지요?
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바로 므깃도 평원(아마겟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치렀던 전쟁 중에 200회 이상이
이 므깃도 평원에서 벌어졌습니다. 주2)
이렇게 므깃도 산(아마겟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지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들이 치러야 할 영적전투의 치열함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이 쉽게 전쟁을 연상할 수 있는, 아마겟돈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므깃도 평야가 아니라 므깃도 산인가요?
성경에서 마지막 심판의 전쟁을 묘사 할 때
그 전쟁이 이스라엘 ‘산’에서 일어난다는 표현을 씁니다.
겔38:8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겔39:1-5
1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2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3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4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 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5 네가 빈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최후의 심판의 전쟁을 상징하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 이스라엘 산에서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을 가져다가 ‘므깃도 산’ 즉 ‘아마겟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므깃도 평원에 진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이름이 갈멜 산입니다.
그 갈멜 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종 엘리야와 결전을 벌이다가
모두 몰살당한 곳이 바로 갈멜 산, 므깃도의 산, 아마겟돈입니다.
왕상18: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므깃도 산)에서 물리치고
기손 시내에 데려다가 전부 목을 쳐버립니다.
이 기손 시내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므깃도 시내’라고 불렀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과 연결을 시켜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습니까?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었지요?
그들이 아마겟돈으로 열 왕들을 모아서 전쟁을 준비합니다.
갈멜산, 므깃도 산에서도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 850명이 싸웁니다.
그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몰살당했지요?
그러니까 너희들을 괴롭히는 그 대적들의 최후도 그렇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미 이 므깃도 산의 전투, 아마겟돈 전쟁은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당시 구약에 능통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은 ‘므깃도의 산’
즉 ‘아마겟돈’이라는 말을 척 들었을 때
바로 이러한 구약의 내용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참혹한 전쟁터인 므깃도 평야를 쉽게 떠올렸겠지요?
그리고는 이내 ‘우리는 지금 그 참혹한 영적 전쟁의 한복판인 아마겟돈에 와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고단하고 힘들었던 것이구나,
그러나 결국 그 전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로 끝나게 될 전쟁이다.
그러니까 힘을 내자’ 이렇게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면 아마겟돈 전쟁은 (상징적 해석 측면에서 보면)
세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언젠가 일어날 세계 3차 대전이나,
2억의 중공군과 아시아 연합군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아니라
말세의 기간 동안에 교회가 겪어야 할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을 ‘아마겟돈’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전쟁은
마지막 때에 우리 성도들이 크게 겪어야 할 전쟁임과 동시에
그들의 삶 속에서 현재 계속적으로 겪고 있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될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전편에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멸망의 아들 = 멸망의 자식
살후2:1-4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 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것은 분명 마지막 때에 관한 경고입니다.
사이비 가짜들이 나타나서 ‘벌써 종말이 왔다’ ‘주의 날이 왔다’라고 거짓말 할 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먼저 교회 안에 배도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멸망의 아들,
자기가 하나님처럼 구는 자가 나타나면 진짜 그 때가 ‘주의 날’ ‘마지막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하고 흡사하지요?
마지막 때에 멸망의 자식, 세상 왕들이 연합해서
하나님과 전쟁을 하러 모인다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써 예수 님 때에 있었습니다.
요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를 가리켜서 ‘멸망의 자식’
‘휘오스 테스 아폴레이아스’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멸망의 아들과 정확하게 같은 단어입니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 계16장의 내용과 비교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여 버리면 자신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귀의 세력은,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하며
하나님과의 전쟁을 위해 아마겟돈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귀의 허리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오히려 마귀를 결박해 버리는 승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최후의 종말에도, 마귀의 세력은,
하나님의 보좌를 노리고 최후의 공격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에, 완전히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된 자가 배도한 자, 가룟 유다였습니다.
최후의 종말에도 배도 자들, 거짓 선지자들,
세상 왕들이 마귀의 세력에게 이용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마귀의 세력과 함께 가룟 유다처럼
나무에 목을 매달아 사망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인생 동안에 겪어야 할 아마겟돈 전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전쟁과 똑같은 양상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와 최후의 종말인,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있을 그 승리 사이에
작은 아마겟돈 전쟁들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성도들에게 그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마치 너희들을 금방이라도 넘어뜨릴 것 같은 대적들이
너희의 인생 속에 나타날 거야, 그 때 겁먹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들이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기를 써야 한다.’라고
공격 무기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어떤 공격 무기였습니까?
‘깨어서 회개하고 흰옷을 지키라‘ 계16:15
이게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교회사 2천년 동안 교회 안에는 끊임없이 가짜 교리를 전파하는 거짓 선지자,
더러운 영들이 속출해 왔고, 앞으로도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도하는 ‘멸망의 자식’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여전히 꿋꿋이 깨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의의 흰옷을 지켜내는 참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오직 그들에게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 유다 복음, 기복주의, 신비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다들 자기들이 옳은 줄 알고, 자기들이 승리자인 줄 알고 거들먹거립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 스스로 자해하고 있는 것이고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힘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세상을 용서하느라, 참아주느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내느라 꼭 지는 것처럼 약해 보여도
여러분이 바로 깨어있는 분이고 회개하는 분이며, 흰옷을 지키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승리자입니다.
홍해 바닷가에서 자기들이 승리한 줄 착각 하다가
모두 그 홍해에 빠져 죽어버린 애굽 군사들처럼
우리의 대적들도 지금은 자신들이 이기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지옥의 불 못으로 빠져 버릴 것입니다. 결론은 이미 나 있습니다. 시2:1-9
오늘 본문의 내용이 여기 그대로 다 나와 있지요? 결론까지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된다고요? 그 아마겟돈에서 철장으로 다 부수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이 성도가 맞다면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이 크고 작은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들은 이적을 행하며, 여러분 앞에서 거들먹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는 영원한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지금 잠시 여러분이 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그게 바로 승리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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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계3:15-17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주님께서 모든 것이 풍부하고 부유하고, 크게 부흥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너희가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라고 일침을 가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고 부자가 되고 부흥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 복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아라, 너희는 실상은 벌거벗은 자들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런 물질주의적, 기복주의적 사고로 기독교를 정의해서
정말 너희들이 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말고, 정말 너희가 열심을 내야 하는
너희 자신의 하나님 자녀 됨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제발 히에라폴리스의 뜨거운 온천수나 골로새의 찬 생수처럼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주2)
삿5:19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와 가나안 연합군의 군대를 물리치고 부른 노래입니다.
가나안 군대가 보무도 당당히 이스라엘을 치러 왔다가 패배하고 돌아 간 곳이
바로 므깃도입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대의 요시야 왕을 죽인 곳도 므깃도입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도 세계지도를 펴 놓고 세계에서 가장 전쟁하기 좋은 곳으로
그 므깃도 평원을 꼽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므깃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지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들이 치러야 할 영적전투의 치열함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이 쉽게 전쟁을 연상할 수 있는 아마겟돈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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