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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다

LNCK 2014. 8. 24. 18:32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다          마16:18~19              모두 스크랩

 

◑1.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그분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에 억눌려 있는 오래된 상처에 사로잡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사랑은 자신이 받은 경험에 의해 기억되고, 또 그 기억에 의해 베풀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자기 자신처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사랑의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의 체험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나 분노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 기억이 늘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게 됩니다.

 

 

 

반면 우리 마음 안에 기억된 사랑은, 남을 용서하게 만들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잠시나마 내게 사랑을 베풀어 준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2. 하나님의 믿음으로 그를 믿노라

 

 

 

주님께서 바요나 시몬을 그렇게 믿어도 되나요?

 

주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시몬을 반석으로 삼으시는가요?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바요나 시몬이, 교회의 반석이 될 만하다고 판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정체성을 잘 알고 고백했기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악마가 오히려 더 하늘과 세상일을 꿰뚫어 알고

 

복음을 보면, 악마도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하고

 

바요나 시몬과 똑같은 고백을 하는데..

 

 

 

주님의 정체를 잘 알고 고백했다는 것만으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을 수 있는가요?

 

 

 

실제로 바요나 시몬은 주님을 버리고 떠났던 위인이 아닌가요?

 

그럴 위인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으셨는가요?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믿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기에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배반을 받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만큼 훌륭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형편없는 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할까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일까요?

 

 

 

그러나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믿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믿을 때는, 나의 기대를 배반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선은 높은 기대에 부응하는 존재가 없다는

 

기대의 낮춤, 기대의 비움, 기대의 가난으로 믿는 것입니다.

 

"바랄 것을 바라야지!"

 

내 주제가 형편없을 뿐 아니라, 그 주제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아는 만큼

 

그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합을 하면

 

그를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믿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그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살인자는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요지는, 주님처럼, 하나님 때문에, 그를 믿는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은 믿을 사람이 못되지만

 

그를 뽑으신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믿는 것이고

 

 

 

바요나 시몬은 믿지 못하지만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바요나 시몬은 믿지 못하지만

 

그를 도구 삼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래서 믿을 수 없지만, 그 아버지를 믿기에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은 시몬이 주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것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시몬은

 

도저히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인데,

 

당신의 정체를 아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요나 시몬을 반석으로 뽑으시고 그의 뒷배를 봐주시니

 

이제 그는 더 이상 바요나 시몬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새 이름을 받았는데, 그 이름은 반석, 베드로입니다.

 

 

 

그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이제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의 존재와 위치는 반석처럼 굳건하고 오롯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사람들을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그를 뽑으신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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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구에게 배웠는가?

 

「종교박람회」라는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인: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교사가 정답을 다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그건 ‘지식 교육’이고요,

‘신앙 교육’은, 그 자신이 깨우쳐 가고, 배워가도록.. 곁에서 돕는 일입니다.

 

 

 

 

◑4. 스스로 높이지 말고 스스로를 존중하라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 있기에 높이는 것입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낮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충분히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 들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면 왜 그렇게 높이 있고 싶어 할까 질문케 됩니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외롭기만 할 뿐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 낮은 곳에 있기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니

 

우러름, 즉 존경을 받으려면, 높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문제는, 남의 우러름을 받을 만큼, 덕이 높지 않은 것입니다.

 

덕은 높지 않으면서, 남의 존중과 존경을 받고 싶어 위선하는 것이고

 

남이 존경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볼썽사납기도 하지만 사실 불쌍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불쌍한 더 큰 이유는

 

남의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사실은 자기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대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존중하고

 

더 나아가 존경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들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존중해야 합니다.

 

 

 

스스로 존중치 않는 자기를

 

남이 존경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낮은 곳에 있더라도,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을, 우리는 존경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를 존중치 않으면서

 

존경받으려고 자기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교회 대항 어린이들 축구시합 때의 일입니다.

 

한 엄마가 먹기 싫다는 아이를 붙잡고 “한 입만 더, 이것만 더…” 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 엄마는, 아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은근히 부아가 났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그런데 더 못 봐줄 광경은 그 아이의 눈동자였습니다. 자기는 먹기 싫은데,

 

엄마가 하도 먹으라고 사정하니까, 엄마를 위해서 먹어준다는 투였습니다.

 

“엄마, 나 이거 다 먹으면 뭐 사줄래요?”

 

 

 

문득, 거기서, 하나님께 투정하는 내 모습이 비춰졌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달고 다닙니다.

 

 

 

주일예배도, 봉사도, 기도도, 성경공부도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미사 한다고 하나님이 무슨 덕을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굶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목회자가 된 저는, 사실 하나님을 만나면,

 

“제가 아무리 잘못 살았어도 그래도 이것만은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 묶음의 청구서를 내밀 참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한층 성숙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투정만 부리겠습니까.

 

나를 불러주신 그 은총은, 제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올챙이 시절 기억하기

 

 

 

사범대학을 다니던 20대에, 나는 기독교 학교에서 교사로 발령받길 바랐다.

 

왜냐하면 가톨릭 학교는 내가 기대하는 ‘좋은 학교’일 거라고 생각했고,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서 배운 바를 잘 실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숙이 잘된 선배 교사들한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분홍빛 그리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기독교 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고 나서

 

내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 신앙을 쉬는 교우가 많았고, 비신자도 많았으며,

 

학교와 교회(법인)를 자기 안위를 위한 쟁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기독교  학교 안에서 교회 이야기를 하면 즐거워야 할 터인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그들도 교회의 사람인데`…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곳에 왔는데,

 

왜 교회 이야기를 하면 모두 불편해할까?

 

나에 대한 경계와 따돌림의 시선이 조금씩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인  교사들의 기본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 왜? 참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요즈음, 그 흐름 안에서 살아온 터라

 

나도 모르게 변해 있을 내 모습, 새로이 임용되어 오는 후배 교사들에게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그대로, 그들이 나를 보면서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선배 교사는 아닐까?

 

그분의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분께 먹칠을 하지는 않는지 조용히 고개 숙인다.

 

 

 

 

 

◑힘겨운 날

 

 

 

오늘 오후 한 아이를 "큰집"(교정 센터)에서 데려오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마치도 길고도 깜깜한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느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아이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 저곳을 전전해서 그런지

 

아이는 자기표현이 뚜렷했습니다.

 

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한 아이는 자신의 지난 스토리를 스스럼없이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는데... 참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면서, 진흙탕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이 홀로 헤쳐 나가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 쳐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고요.

 

알아서 뭍으로 올라오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힘겨운 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할 이 하나 없이

 

홀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너무도 가엾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 이 세상에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계셔줘서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