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좇아 살기 P1 고전3:1, 고전6:17~18 출처보기
Living as Jesus Lived by Zac Poonen 5장. Living In The Spirit
◑사도바울은, 신자들을 3그룹으로 나눴습니다.
①육적인 사람 고전3:1 사르키코스 / 사륵스 carnal
만약 우리가 육이 원하는 대로 지배되어 살면,
우리는 육적인 신자가 됩니다.
②혼적인 사람 고전2:14 푸시키코스 / 프쉬케 soulish 주1)
그런데 육적인 신자를 넘어섰다 하더라도,
아직 혼적인 신자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자기 육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과 감정에 지배받아 살 때입니다.
③영적인 사람 고전3:1 프뉴마티코스 / 프뉴마 spiritual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 육body뿐만 아니라 자기 혼soul도, 모두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 프뉴마티코스 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사르키코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 프쉬키코스 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이, 우리가 쉽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혼적인 사람’은, 개념 파악이 좀 까다롭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사르키코스(육적), 프쉬키코스(혼적), 프뉴마코스(영적)로 구분해서 쓰고 있는데,
영어성경도, 영적인 사람, 육적인 사람은 문제가 없으나,
‘혼적인 사람/프쉬키코스’를 번역하는데는, 애를 먹은 흔적이 보입니다.
다들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등으로요.
그런데 이 설교에서 쓰고 있는 ‘soulish / 혼적인 사람’ 이 좋은 번역이라 봅니다.
한글로 ‘혼적인 사람’인데,
육적인 사람보다는 한 단계 높지만, 영적인 사람은 아직 아닌 단계,
자기 육신의 죄성에 끌리진 않지만, 자기 감정, 자기 이성에 끌리는 사람,
그러나 그게 ‘영적인 사람’은 아니란 것이죠.
한글 성경은, 사르키코스 - ‘육신에 속한 사람’
프쉬키코스 - ‘육에 속한 사람’으로,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비슷하게 번역했습니다.
둘 다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란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는, ‘사르키코스’는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 죄인이라서, 제껴 놓고요,
‘프쉬키코스’ / soulish / 혼적인 사람을.. 주로 공격합니다.
이성적이고, 올바른 사람인데, 인간적으로 보면 흠이 없이 반듯한데,
‘성령의 사람’이 아니란 것이죠.
▶이 책의 제목이 <예수님을 본 받아 살기>인데,
혼적으로 soulish 하게, 본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혼적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영적인 사람도 아직 아닙니다.
이런 혼적인 사람 soulish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것처럼 나이스 할 때가 있는데,
그건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 겉으로 본받은 척 하는 것입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교회 행사는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교회/ 선교단체가, 수많은 사역을 행합니다.
그게 다 영적인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상당수 거기에 혼적인 soulish 사역이 뒤섞여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혼적인 사역이 월등히 더 많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 감정, 의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만,
그건 표면적 명분이고요,
그 속 본질은, 자기 영광과 자기 명예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혼적인 사역’을. 우리가 영적인 사역과. 반드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프쉬케).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프뉴마)
우리의 신분은, 법적으로 첫째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신자는 이제 아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건 혼/프쉬케가 아니라, 영/프뉴마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글은 번역이 모호하나, 영어는 번역이 명확합니다. ↑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되,
혼적인 생명을 주시는 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혼적인 생명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그건 불신자도 하고요, 지/정/의에서 나오는 선)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아, 나눠주는 것입니다. (신자만 할 수 있는 성령에서 나오는 생명)
자세히 들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신자가 되는 것을 ‘육적인’ 죄성을 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래야죠.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혼적인’ 모든 활동까지 끊어야 합니다.
즉 자기 지/정/의/생각으로 판단해서 행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혼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지/정/의/생각으로 판단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런 지/정/의/자기 생각의 영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혼’은, ‘자아’라고 그러죠,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어야 하고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겸손/거룩/사랑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 안 되는 면이 많습니다.
‘성경은 역설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구절이 많아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혼적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성경은.. 참 믿고 따를 게 못 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이야 말로,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자기 혼의 차원, 자기 자아의 차원, 세상 관점의 차원을 그대로 갖고서,
성경을 거기에 부합되도록 맞추고자 하는 데서.. 기독교가 타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많은 ‘혼적인 신자’들은,
그들이 비록 ‘육적인 신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 적당히 타협해서 삽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판단을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자/교회에.. 권위가 없고, 능력이 없게 됩니다. 무늬는 있지만요.
일례로, 성경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하면서도,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가족애를 버리라고 합니다.
이때 혼적인 신자는, 당황해 합니다. 말씀이 자기 상식과 맞지 않거든요.
그때는 적당히 타협해 버립니다.
‘혼적인 신자’는, 진리를 자기 삶의 표준으로 삼기 보다는,
‘남의 시선’에 따라서, ‘체면을 따라서’ 적당히 움직입니다.
그런 삶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은, 상식을 초월하여 인도하시고, (무시가 아니라, 초월)
자기는, 상식 선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절대 성령님께 순종하지 못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사실 눈에 띄는 죄도, 거리낌 없이 짓습니다. carnal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혼적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스한 크리스천입니다. soulish
중산층이고, 정상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정/의/자기 생각/자기 자아 중심적으로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spiritual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삽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거룩/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그렇게 산다는 뜻이지,
그저 윤리적으로 겸손/거룩/사랑으로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된 것이, 자기 능력에 의해서냐, 성령에 의해서 입니까?’
갈3:3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기를)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자기 힘으로) 온전하게 되려 하십니까?’ (아래 KJV 직역)
Are ye so foolish? having begun in the Spirit, are ye now made perfect by the flesh?
▶여러분, ‘혼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마16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가르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돌려 세우고는 ‘그러지 마세요’ 하면서 나무란 것을 보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시며, 단호히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혼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큰 죄 지은 것은 아니잖아요.
딴에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위한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단호히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혼적인 말/생각/행동’이, 우리 생각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게 종종 성령의 사역을 방해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를 믿고도, 혼적인 상태에 머무르면서, 만족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게 사람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성령의 사역을 방해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은 사명자로서, 전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담’ 적인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베푸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가 추구하는 ‘의’는.. 참 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몹쓸 ‘사랑’이요, 교만한 ‘자기 의’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듯이, 성도는 하나님과 ‘한 영’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영, 혼, 육으로 만드셨습니다. 살전5:23 주2)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드는 식양을 주실 때도,
사람의 영, 혼, 육에 상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이나, 성막이나.. 둘 다 같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니까요.
그래서 성막을 보면,
-마당.. 사람의 육(몸)에 해당..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요.
-성소.. 사람의 혼에 해당.. 이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성소.. 사람의 영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막의 3부분 중에, 오직 지성소에만 머무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의 3부분 중에서, ‘영’에 거하십니다.
단, 조건은, 그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일 경우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그의 영이 지성소가 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영이
주님의 영과 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 one spirit 이니라’ 고전6:17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한 몸이 되듯이,
성도는, 하나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고전6:16
하나님께서 우리 영에 임하셔서 ‘한 영’이 되시는 이유는,
우리 영을 통해, 구속함 받은 우리의 혼(지정의, 생각)과 육(몸)을
다스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지배를 받아
자기 혼과 육까지, 그 인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프뉴마티코스)입니다.
▶사람의 혼(프쉬케)은, 생각/감정/의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기 생각/감정/의지로는.. 하나님을 절대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4:24, 롬8:27
그렇다고 생각/감정/의지가 다 쓸데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영/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영’이 혼자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는 없잖아요.
영은 반드시, 생각/감정/의지/몸을 통해서,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영의 지배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 자아가 왕이 되어서,
자기 생각/감정/의지를 움직여서,
일상을 살기도 하고, 나아가 주의 일을 행하고자 하는 것.. 의 위험입니다.
거기에 사탄이 쉽게 틈 탈 수도 있습니다.
자기 욕심으로 행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혼적인 신자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를 듣습니다. 베드로처럼요!
여러분,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적게 배운 사람도 있고
또 못 배웠으나 현명한 사람도 있고, 많이 배워도 우둔한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역에 있어서,
학력, 현명함, 인간의 지혜는.. 다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학력/현명함/인간의 지혜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혼과.. 차원이 아예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혼)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즉, 내 영혼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회심하고, 래디컬하게 중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즉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던 자기 영혼이, 이제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혼으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이 죽어 있거나/시들어 있으니까요.
영으로 사는 사람은, 계속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아니면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도 있고,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때는, 자기 영이 너무나 시들어 있거나,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도 보십시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주로 우리 눈(육)과 마음(혼)을 사용합니다.
이것만으로는, 성경을 절대 못 깨닫습니다. 이때는 성경이 지루한 책이 됩니다.
그의 영혼은, 어두워져 있어서, 성령의 비추심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성령께서, 우리 눈과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이란 말을 쓰는데,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셔야 합니다.
그 성령의 활동은, 먼저는 내 ‘영’을 통로로 해서, 혼과 육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은
성경을 깨닫는데 있어서도,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11:25
위 구절도, 성경은, 인간의 혼(인간의 지혜/총명)으로 깨닫는 것이 아님을, 잘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던 학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못 알아 봤습니다. 고전2:7~8
여러분, 신학 공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시되,
자기 혼의 능력으로 하지는 마십시오. 설교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는, 혼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프쉬키코스
아니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프뉴마티코스
물론 이것은 단 번에 되지 않고, 꾸준한 성숙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진정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로도, 더욱 성령의 인도를 민감하게 받기 위해서는,
계속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에도,
자기 혼의 인도를, 95%이상 받아서, 살아가는 ‘잠자는’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계속)
...............................
◑서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혼적인 측면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2장에서 겸손으로, 3장에서 거룩하게, 4장에서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 같은 겸손, 거룩, 사랑의 삶을
인간의 윤리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윤리적 행위로, 겸손, 거룩, 사랑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간의 자기 윤리적 노력에 의한 겸손, 거룩, 사랑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겸손, 거룩,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벧후1:4
▶과거 역사에 보면, 많은 非신자들도, 예수님을 성인군자로서 존경하며,
그분의 성품, 즉 겸손, 거룩, 사랑을 본받고자 애썼습니다.
그리고 남들 보기에, 꽤 도적적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리새적인 의였지만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다 그림속의 불에 불과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처럼 보였으나, 실제 온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큐빅(모조품 다이아몬드)을 보면, 정말 진짜 같아 보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면, 사실 육안으로 그 진품을 가려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큐빅은 큐빅일 뿐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그저 작은 유리 조각에 불과하죠.
사람은 정말 모방의 천재입니다. 잘하면 예수님처럼 도덕적인 삶을 모방할 수도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두고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럴 듯하게, 예수님의 삶을, 큐빅이 다이아몬드처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겉모양만 예수님을 모방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그 신의 성품에 참예한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아래에 나오지만,
-자기 ‘혼soul’의 힘으로, 거룩하게 사느냐
-아니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거룩하게 사느냐.. 그 차이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교회를 다니지만,
혼적인 신자가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자가 있습니다.
혼적인 soulish 신자는, 자기도 나름 거룩하게 산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모조품/큐빅 입니다.
토마스 A.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죠.
영어로 Imitation of Christ입니다.
그 imitation(본받아)가 큐빅처럼 모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아서, 다이아몬드처럼,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되, 우리는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적인 신자는, 자기 지/정/의를 총 동원해서,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심한 경우는, 마귀에 의해 조종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지/정/의의 능력을 총 동원해서, 자기 딴에는 거룩하게 산다고 하면서,
그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거룩이 될 때,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거나,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나름대로 거룩하게 산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마귀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도
혼적인 삶과, 성령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한 번 ‘얍복강 체험’ radical conversion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례를 들어 봅시다.
사실 ‘영적인 신자’는, 자기가 겸손/거룩/사랑으로 살면서도,
아직 자기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는..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갑니다.
그런데 ‘혼적인 신자’는, 자기가 겸손/거룩/사랑으로 사실상 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미 자기는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자만하고, 남들을 비판합니다.
한 가지 예이지만, 이것이 바로 ‘영적인/혼적인’ 신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
주1)
‘혼적인 사람’ (프쉬코스)는 영어 성경에 각각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man without the Spirit NIV
-natural man KJV /NASB
-people who aren't Christians NLT
natural man 이란 번역이 가장 적당한 것 같습니다.
악독한 죄인도 아니고, 신령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중간 상태의 사람, 보통 사람..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혼적인 사람’ (프쉬코스)가 쓰인 다른 구절 2개를 찾아보았습니다.
약3: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sensual KJV/ unspiritual NIV / natural NASB
*여기서 sensual 이란 말은, 자기 오감sense, 자기 느낌을 따라사는 사람이란 뜻.
유1:19.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sensual KJV/ natural instinct NIV, NLT
참고로, 롬8: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의 육신은, ‘사릌스’입니다. 고전3:1절의 ‘육신에 속한 사람’과 같은 뜻이죠.
주2)
살전5:23에는 사람을,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spirit, soul and body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분법, 3분법 논란이 있는데, 사과를 2쪽으로 자르든지, 3쪽으로 자르든지 다 사과입니다.
자르는 방식에 따라서, 2분법도 되고, 3분법도 됩니다. 3분법도 성경에 몇 차례 나옵니다.
www.youtube.com/watch?v=FLJYO0cbx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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