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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4장 사랑하며 살기 / 잭 푸닌

LNCK 2014. 8. 20. 09:02

https://www.youtube.com/watch?v=Iz9uD1qeoWQ 

◈사랑하며 살기 P2             마5:45, 요13:29, 눅4:40            출처, 편역

 

Living as Jesus Lived by Zac Poonen   4장. Living In Love

 

 

◑사랑은.. 착한 일을 행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 doing good’라고 표현했습니다. 행10:38

예수님의 공생애를 참으로 잘 요약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설교자만 아니셨고,

단지 열심 있는 전도자 soul winner만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시든지, 사랑으로 ‘착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의 영혼의 필요와 아울러, 육신적 필요를

할 수만 있는 대로 도와주시고, 고쳐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오늘날, 훌륭한 설교자도 많고, 훌륭한 전도자도 제법 있지만

착한 사람(사랑을 베푸는 자)은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전도자가 되기 이전에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이요, 실패하지 않는 길입니다.

안 그러면 위대한 설교자/전도자가 되고 나서, 자칫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착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문화가 ‘실용주의, 경쟁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뒤 떨어지는 사람으로 그렇게 인식됩니다.

부모들도, 자기 자녀가 너무 착해서, 어디 가서 손해를 볼까봐 염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착한 자가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마5:5 등

예수님의 사랑으로 ‘착한 일을 행하는’ 소원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관련글/ 착한 행실

 

 

◑사랑은.. 래디컬한 것입니다.

 

▶대적들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눅7:34

오늘날 우리는, 혹시나 그런 말을 들을까봐 대단히 조심합니다.

그래서 ‘세리나 죄인들’이, 가까이 올까봐 대단히 자기 몸을 사립니다.

 

다 ‘착하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결국은 ‘복음에 순종해서 사는 사람’이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그 사회에서 무시, 천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도 친구가 되셨고,

그 일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마25장에 보면, 가난한 자, 헐벗은 자, 갇힌 자,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에게’ 행한 선행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염소’쪽에 분류되어

천국으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말하기를

‘지옥에는 나이스하고 괜찮은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농담 반/진담 반으로 말합니다.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에 갈 사람은.. 있기는 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흉악한 죄인 자체가, 그 숫자가 세상에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스하고 괜찮은 사람들은.. ‘천국 바깥’에 가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직업도 좋고, 중산층이며, 세상에서 별 탈 없이 살았지만,

좁은 길을 가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그 숫자가 아주 많거든요.

 

▶오늘날 ‘래디컬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좋은 현상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도 모두 ‘래디컬’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훌륭한 크리스천’은,

문화수준이 높고, 중산층 이상이며,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생활수준을 누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암암리에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훌륭한 크리스천’은.. 래디컬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이 표현하듯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세상적 가치’들을

기꺼이 권리포기 합니다.

 

오늘날 문화적으로 ‘훌륭한 크리스천’이 가득한 공동체와 나라는

그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고, 오히려 어둡습니다.

 

전부가 그렇게 될 수는 없지만, 정말 ‘래디컬 크리스천’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손해 보는 크리스천’들이

단 몇 %라도 소금처럼 소수 녹아있는, 그 공동체와 나라는

그 미래가 밝다고 하겠습니다.

 

그들 ‘남은 자’들이, 그 공동체를 ‘복음의 실종 위기’에서 구하게 될 것입니다.

‘래디컬(극단적)’하다고 욕은 얻어먹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래디컬한 삶이, 사실 그리 힘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힘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함이 넘치고, 또한 주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부어질 때,

그는 기쁨으로,

이웃 사람들을,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을 사랑하며

정말 3D 업종에 해당하는 봉사도, 기꺼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D : dirty, dangerous, difficult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지도자가 됩니다.

 

교인이니까, 교회니까.. 이런 섬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사랑이 차고 올라오니까, 자연적으로 분출되는 섬김입니다.

 

◑사랑은.. 물질도 함께 갑니다.

 

▶오늘날 신자 개인이나 공동체 적으로

낮은 자를 사랑으로 섬기고, 착한 일을 행할 때

꼭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예배에 참석하면’ .. 많은 자원이 몰아지지만

그게 공동체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면 .. 왠지 인적/물적/정신적 자원의 사용이 아깝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햇빛을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춰주시고,

비를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내려주신다’ 마5:45

 

사실 우리가 다 경험해 봐서 알지만,

뭔가 전도(성장)의 목적을 가지고 베푸는 선행은.. 그 열매도 그다지 없습니다.

수혜자들이 그 혜택만 받아가지, 전도에 응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선행을 베풀 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야지, 공동체의 유익까지 구하다 보면,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영광까지도 퇴색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사심 없이, 그저 ‘주기만’ 하신 것입니다.

 

태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뭘 대가를 바라거나,

고운 사람/얄미운 사람 가려서 비추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삶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늘 따라 다니셨습니다.

꼭 자원이 풍부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가급적 넓은 지역을 커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매일 주어지는 여건 속에서, 자기의 범위와 한계 속에서,

아무런 사심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을 때,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위 구절에, 예수님의 재정 사용 원칙 2가지가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어떤 필요를 위해 물품을 살 때.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때.

즉 최소한의 필요와, 구제를 위해서만, 재정을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가르치셨다고 말했습니다. 행20:35

그리고 바울 자신도, 그것을 힘써 행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갈2:10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하고 가장 복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 사도바울은, 그런 삶이 복되다고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삶으로써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사실 한 해를 결산해 보면, 또는 전 인생을 결산해 보면,

남는 것은 단 한 가지 ‘도우며 산 것’만 남습니다.

격려의 말로/ 시간 봉사로/ 기도로/ 물질로 .. 도우며 산 것만, 모래성이 아니라, 남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야고보는 ‘참된 경건은, 고난에 처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약1:27

참 제자는, 이런 말씀에 늘 부대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는 사람만, 채찍을 사용하십시오.

 

예수님은 회중들을 위해 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지 않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울며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과,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이,

어떤 단순한 순간적 감정 폭발이나, 미움의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눈물로, 예루살렘 거민을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채찍으로 성전을 청결케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청결케 하기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기 전에,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 사람만, 온전한 자격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줍니다.                *비교/ 헨리 나우웬의 비즉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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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푸닌이 성경을 읽다가, 한 가지 사실을 오래 묵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하신 분은, 역사에 없으십니다.

그것도 단 3년이란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그렇게 함축적이고도, 필요한 모든 사명을 다 수행하신 분은.. 역사에 아마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밤낮 부지런히,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사셨다는 건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개인 비서 한 명, 특별히 따로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사실에 놀라고, 또 더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면 개인 비서 한 명 지정해서, 스케줄 조정하고, 만날 사람, 안 만날 사람 가려내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비서 노릇을 자청해서 하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막10:13~15

 

예수님은, 자신을,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내어주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너무 몰려올 때를 제외하시고는,

아침 일찍 기도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는 사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식사 시간까지 거르시고,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막3:20

 

▶사람들은, 예수님께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그것도 밤 시간에, 불쑥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났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귀찮아하실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더라면, 니고데모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상을, 평소에 사람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가도, 예수님이 자기를 환영해 주실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아침 이른 시간이나 저녁 늦게

전화가 오거나, SNS로 연락이 오는 것을.. 쉽게 노여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쉬는 시간에, 어떤 연락이 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사람이 겁나서, 시간을 가려서 연락하는 것보다는,

 

좀 무례하게 보이더라도, 아무 시간이라도 자유롭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친근한 관계가 되는 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해가 지고 나서도, 병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었고, 숫자가 많았지만,

예수님은 쉬셔야 하는 그 시간에도,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기도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눅4:40, 해 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참, 쉬어야 하는 시간에, 그런 일로 여러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사실 사역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을 단체로 묶어서 기도해서 고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일일이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진정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동할 때,

사실 잠을 몇 시간 덜 자도, 식사를 거르더라도, 힘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시간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서 다 내어주셨는데,

시간쯤이야.. 내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겠죠.

 

어쩌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치 잡아먹으려 들고, (예수님의 존재를 갉아먹으려 하고)

예수님의 시간, 예수님의 소유까지도,

그게 모두 마치 자기들의 것처럼, 막 노략하는 듯 했습니다.

 

사람을 만만하게 봐도,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밤 시간에도 찾아오고, 방문객 숫자가 많아도 상관없이, 자기만 고침 받으면 되고..

 

이렇게 무례하게 예수님을 막 부려 먹으려고 하는 듯 했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그런 불편함을 모두 감수해 내셨습니다.

 

자기 사생활이 침해 받았다고, 자기 쉬는 시간이 불편하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찡그리거나,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전기가 유용한 것이지만, 피복이 벗겨진 전기는 위험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종종 ‘전기’에 비유되곤 하는데요,

 

그 병고침의 능력, 그 초자연적 능력이

‘사랑, 긍휼’이라는 피복(전선을 싸는 비닐)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그 성령의 능력이 변질되어, 오히려 사람을 해치게 됩니다. 자기와 남을 해칩니다.

 

성령의 능력은,

오직 ‘사랑과 긍휼’이라는 피복으로 쌓여져 있을 때만,

마치 전기처럼, 그것은 유용한 ‘파워’가 될 수 있습니다. 전기도 영어로 파워라고 하지요.

 

▶어떤 풀타임 사역자나 신자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으로, 자기 가족이나 친척을 거의 돌아보지 않습니다.

막7:10~13에 나오는 ‘고르반’처럼요.

 

주의 일을 한다는 핑계 때문에,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명예 때문에, 사역에 쉴 새 없이 바쁜 것입니다.

 

참 신자, 참 사역자는,

자기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과 친척에게, 그 사랑이 제일 먼저 공급됩니다.

 

기도로, 관심으로, 따뜻한 격려의 말로, 나눔으로

자신의 가까운 부모, 형제부터 돌보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에게 손해가 따르지만, 기쁨으로 기꺼이 감수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실 때에도,

어머니 마리아 돌봄을, 제자 요한에게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그걸 알 수 있는 테스트가 있습니다.

자기 부모와 형제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교인들에게는 친절하지만, 그래서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라도

자기 가족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그의 경건과 사랑은, 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에게 보이기 위한, 칭찬을 얻기 위한.. 친절과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사랑!

 

▶이런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은,

십자가에서 한 편 강도를, 용서하시고, 전도하신 일에도 잘 드러납니다. 눅23:34

십자가에서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입니다.

 

정말 우리도, 부모가 운명하시는 순간을 보면, 그런 시간에는, 어떤 경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자기도 고통스럽고, 자신도 죽어가는 데, 주위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간까지라도,

사람이 죽어갈 때는 그래도 존중해 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데,

그 시간까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정말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한 편 강도를 구원하시는 일에 너무 집중하신 나머지

그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까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에게 맞대응 하셨다면,

아마 한 편 강도를 전도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약이 올라서 부글부글 끓는데, 전도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를 못 박는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를 구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눅23:34

 

정말 못 말리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사랑, 이런 영광, 이런데서 나오는 그 권세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취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일 듯한 기세로 예수님을 미워했지만,

그 미움의 홍수와 같은 물도, 예수님의 그 사랑의 불꽃을, 끄트리지 못했습니다. 아8:7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35, 롬5:5

 

이와 같은 사랑을, 성령님도, 오늘날 우리에게 강권하십니다.

혀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사랑을 보여주라고 감동하십니다.

 

그렇게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자연스레 그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