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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평화로운 책망

LNCK 2014. 9. 15. 02:35

https://www.youtube.com/watch?v=_mog_E86Kds 

마음이 평화로운 책망  고전7:29~30, 고전4:3~4         스크랩

                 

◑마음이 평화로운 책망

 

고전4:3~4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만약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자녀/아랫사람을 심하게 나무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중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아니면 자기 감정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우리는 그 행동 다음에, 마음이 평화로운지 아니면.. 불편한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영을 담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담으면

 

우리 마음이, 성령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으로 행동하게 된다면, 우리는 누구의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혜로 행동하려 했다면 심판을 받아야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동하였다고 한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고전4:3~4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 마음이 편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지혜로 행동하건, 아니면 세상의 영이나 나의 육체적인 감정에 따라 살면

 

마음이 불편해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엔 하나님의 법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에 어긋나면 양심의 가책이 일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삽시다.

 

그러면 항상 마음이 평화롭고 무엇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것이든!                  

 

 

다음 주에 제가 주례할 젊은이들을 만납니다.

 

어떤 젊은이들인지 얼굴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좋아죽겠을 청년들일 것입니다.

 

 

 

두세 달 전 제가 아는 형제가 전화를 해 왔습니다.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줄 알았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는 것이지요.

 

 

 

일전에 제게 인사시키러 데려왔는데

 

제 앞에서도 좋은 걸 감추지 못합니다.

 

 

 

그런 모습이 예쁘면서도

 

고얀 것, 그렇게도 좋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들 마음이 이러하겠지요.

 

 

 

아무리 좋아도 좋은 것을 감추고

 

아무리 기뻐도 기쁜 것을 감추는 것이 어른 앞의 예의이고

 

반대로

 

아무리 슬퍼도 슬픈 것을 감추는 것이 어른 앞의 예의지요.

 

 

 

위 고린도서 본문은, 단지 예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자는

 

결혼이든 독신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무엇을 얻었건 잃었건,

 

이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어떤 것이든

 

이 세상 것들은 곧 사라질 것이고

 

남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이고

 

내 앞에 하나님뿐이라는 얘깁니다.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전7:24~26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고전7:29~30

 

 

 

◑한 사람의 힘

 

 

프랑스 작가 장 지아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주 짧은 이 책은 40년 동안 프랑스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으로 바뀌게 한

늙은 양치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엘제아르 부피에이 늙은 양치기는 해발 1200미터 의 황량한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없어서 이 땅이 죽어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인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두 번이나 힙 싸일 때도

그 늙은 양치기는 계속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정부의 산림 감시원이 양치기의 노력을 모르고

이 고산지대에 저절로 천연 숲이 생겼다고 놀라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 대표단이 시찰하러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없이 양치기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전쟁으로 숲이 망가지는 위협도 있었고,

잘못 심은 나무들은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에는, 그 어떤 어려움도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40년이 지나 1947년 엘제아르 부피에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그 양치기 덕분에 처음 12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이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로 글을 맺었습니다.

한사람의 오직 육체적, 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나무 심는 양치기의 선한 노력이 세상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였듯이

우리의 작지만 선한 마음의 시작이

바로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거울을 보라!

 

눈 먼 이가 눈 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시는데,

어찌 보면 인도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신앙 상담을 받으러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는데

저와의 대화를 통해서 길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흐뭇했던 적이 많습니다.

눈 먼 제가, 사람을 인도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저야말로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는 보는 바로 그것 때문에

눈이 먼 저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인도하기도 하는가봅니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해결책이 보입니다.

 

무릇 모든 '봄'은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얼굴이 눈에서 제일 가깝지만

얼굴에 붙은 밥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자의 바라봄-객관이 필요하고

거울이라는 객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음-거리가 객관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거리와 객관을 확보하지 못할 때

자기를 보지 못함,

특히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니 자기를 잘 보기 위해서는,

1) 자기의 눈만으로는 자기를 보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자기의 모습을 일러주는 다른 이의 눈이 필요합니다.

3) 다른 이의 눈이 없으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클라라 성녀는 우리가 서로의 거울이라고 하십니다.

같이 사는 형제, 자매가 우리의 거울입니다!

 

상대의 얼굴에 숯검댕이가 묻었으면 나도 묻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웃의 덕행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시니,

오 형제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그대 안팎으로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그 거울에 자주 비춰 보십시오.”

 

............................................

 

 

인생 단상

 

1. 저는 10대와 20대를 아주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아니 우울하기보다는 고민하며 보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고통스런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부조리한 세상의 그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이런 고민을 하느라 저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떠난다는 것이 방황이고

목적지가 없으니 부지런히 달려간들 의미 없었던 것입니다.

공부도 의미가 없었고

신앙도 의미가 없었고

연애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인생이 의미 있고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열심히 삽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 이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그래서 공부도 안 하고 있을 때 형이 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셨기에 아버지 같은 형이었습니다.

처음 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第一)”을 나타내는 손 모양을 보여주며

엄지손이 제일이 되기 위해서는

중지, 검지, 약지, 소지를 접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은

접을 줄 알아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말이 멋있어서

그 말에 속아서

한 달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간신히 대학은 갔습니다.

 

3. 이렇게 가까스로 대학은 들어갔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황은 끝나지 않았고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고민을 너무 진지하게 하다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10여년을 거친 이 길고도 힘든 고민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목표는 너무도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목표, 그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산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학문을 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으로 행복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시키지 않아도 한다면

그것으로 행복하기 때문에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이제 제 가장 고상한 행복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고전9:16

 

4. 다시

나는 인생의 목표가 있나?

나는 그 목표로 행복하나?

나는 그 목표에 열심한가?

나는 그 목표를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나?

 

그래서

나는 나의 이 인생을 사랑하나?

이 사랑으로 다른 인생도 사랑하나?

같은 목표의 인생 동반자로서 그 인생을 사랑하나?

이 사랑으로 자유롭고 기꺼운가?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고전9:19, 22

 

 

개미도 자기 인생 목적이 있다, 하물며

 

세계에는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방부터 더운 열대 지방까지 개미가 8,800여 종이 살고 있으며,

전 세계 개미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많은 개미가 이 지구상에서 일시에 없어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렇게 작은 개미가 무슨 영향을 미칠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아주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미들은 식물의 씨앗을 분산시켜 주고

씨앗에 해가 되는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땅을 헤집고 다녀서,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흔해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또한 너무 작고 약해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개미의 역할은 생각보다 많고 중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따져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필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의 시선으로 보기 보다는, 세상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의 기준을 잘못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잘못된 판단을 반복하고 있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의 작품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작고 약한 개미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주님 작품 중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가장 소중하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웃 사랑을 크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원수 역시 주님의 멋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있더라도 나는 사랑한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 말씀에, 저는 문득 나에게 원수가 있나?’ 생각해봅니다.

나에겐 원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내 원순가?

 

자기가 나를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종종 그러하지요.

누구는 나를 미워하고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고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는 경우 말입니다.

 

이 경우, 나는 미워하지 않으니 잘못도 문제도 없고

미워하는 것은 너이니, 네 문제라고 태평해도 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미워하지 않으니 문제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문젭니다.

사랑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그가 미워하고, 그래서 고통을 당한다면

어떻게 마음 아프지 않고 태평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그 사람의 그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주라는 말씀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를 미워하는 그것이 너무도 큰 괴로움을 내게 주기에

너의 미움이 나의 미움에 불을 지르고

나도 그에게 원수이지만 그도 나에게 원수인 경웁니다.

그리고 이 경우가 참으로 난감한 경웁니다.

미워하는데 어떻게 잘 해주라는 것입니까?

잘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잘 해 줄 수가 없기에 이 경우 사랑한다는 것은

잘 해 주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미워하니까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지만 사랑하려는 그 의지에서

원수 사랑의 그 놀라운 기적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원수 사랑의 의지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도 그도 미움을 넘어서는 주님 사랑에 전도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은 원수 사랑의 의지를 지니되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 이 기도가 1, 2, 3년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오랜 이 기도가 그 자체로 사랑이지만

오랜 이 기도가 하나님 사랑을 모셔오고 닮게 합니다.

나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으로 도약하게 합니다.

 

원수 사랑의 은총은 이런 의지와 끈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곧 은총인 것입니다.

나의 사랑 의지에 하나님 사랑이 은총처럼 내립니다.

 

 

신앙인의 행복지수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뜻하지만,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의미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소중한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네 잎 클로버 찾기에 열중하다가

무수히 많은 세 잎 클로버들을 짓밟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인생살이 안에서도 일어날까 말까한 커다란 행운을 잡기 위해,

자기 옆에 있는 소소한 행복을 무시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행복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의 작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리저리 헤매던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는

가장 낯익은 곳, 바로 그들의 고향 일상의 삶 안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 또는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를 물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소박한 곳, 겸손한 그곳에서

행복은 드러나고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만족을 찾아 헤매지 말라. 그보다는 항상 모든 일에서

만족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존 러스킨)

 

 

자부심과 자만심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고전6:2~3

 

自負心自慢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부심이 교만하게 강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자부심은 자만심과 다르고

자부심은 강할수록 좋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자만심은 겸손이 결여된 착시적 자기 추켜세움이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우월감이라면

올바른 자부심은 겸손하지만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신분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수도자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무엇 하러 수도자가 됩니까?

수도자라는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일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일과 직업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자기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신앙에 대해 진정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존중하지만 나의 신앙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신앙에 충실하고,

우리 신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요?

우리 문화 안에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신앙을 잘 토착화시키고 있는가요?

 

우리 문화의 잘못된 면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복음으로 심판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나의 세속화와 세상의 복음화 중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통해, 나를 자문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행복의 비결

 

흔히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로 알려진 니콜라스 헤르만은

16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십대 때 ‘30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 55세 때,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들어가 부엌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의 식사를 해주면서 부엌을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식사를 수도사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이 귀한 천사들을 섬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게 비천한 부엌일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하찮은 일도 사명감을 가지면 소중한 일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수도사들을 섬기면서 행복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는 작은 일도 큰 일로 생각했고, 접시 하나 닦는 것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20년을 변함없이 살자 수도사들은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수도원에서 원장을 뽑을 때 원장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평신도 수도사인 그가 원장에 뽑혔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행복의 조건은 없었습니다.

그는 교육도 못 받고 절름발이로 가정도 이루지 못했지만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힘든 부엌일을 하면서도

항상 기쁜 얼굴로 나는 참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해 그에게 행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이 행복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현세에 만족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자는,

남에게 봉사하는 길을 찾아 헤매다 드디어 그것을 찾아낸 사람입니다.

 

내가 수도원 공동체들을 방문했을 때, 회원들이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힘들어할 때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일이 있는 곳에 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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