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 2 엡5:8~33 박영선 목사 구원의 완성 시리즈 중 17/20강
◑성령충만에는.. 행2장과 다른, 엡5장의 측면이 있습니다.
두 측면 다 봐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령충만의 문제는
성도들의 신앙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설명하는 이 성령충만에 대한 설명이 아주 정확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게 되면, 구원 자체를 의심하고
자신의 신앙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시는가도 놓치게 되는
아주 커다란 오해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꼭 이 내용은 분명하게 이해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이나 성령세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한 개인의 체험 속에 찾아오셔서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잊을 수 없는 그 체험으로 경험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 현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성령충만의 체험들이, 이유들이 교회에서 얼마든지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엡5장에 나오는 이 ‘성령충만을 받으라’ 라는 것은
무엇과 대조되고 있는가 하면 ‘술 취하지 말라’ 라는 말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왜 술 취하지 말라는 말과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같이 대조시켜서 설명을 하는가 하면
이해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죠.
성령충만은 술 취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죠.
술 취하는 것은 뭐냐. 방탕한 것입니다.
‘방탕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도덕하고 문란한 것을 생각하지만
성경에서의 방탕은 ‘낭비, 허비한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탕자의 비유가 그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해서
외지에 가서 방탕했다고 할 때 나가서 못 된 짓을 했다. 이런 것을 떠올리지만
그가 아버지 밑에서 자녀가 받아야 할 교육, 훈련의 시간들을 허비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훈련되지 못했죠. 그 시간들을 낭비한 것입니다.
술 취하는 것이 왜 낭비냐,
여러분들은 보통 안 해보셨을 경험이고 저도 이 경험은 없습니다만
주변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사람들이 통제력을 잃습니다.
술에 취하면 가장 간단한 절제, 분별력을 놓쳐서, 뭐 길가에서 방뇨를 한다던가
안 할 말을 한다던가, 쥐가 고양이 보고 ‘너 나와’ 그랬다고 하던가. 그런 짓들을 하죠.
그것은 다 분별력을 잃기 때문입니다.
제정신이어야 무엇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제 정신을 놓치고 있는, 술에 의해서 정신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반대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것이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충만을 즉각적인 성령의 임재, 그래서 확인 되는 감격, 확신,
이런 것과 달리 여기 본문에서는 (위 면도 있겠습니다만)
“분별” 또는 “경건의 연습” 같이 훨씬 더 과정과 단계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게 놀랍죠. 더 보충적인 설명을 위해
본문 에베소서 5장 18절의 앞 뒤 문맥을 봅시다.
(이게 다 성령충만에 연결된 문맥이니까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5:8~10
이런 내용들은 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성령충만은 ‘생각할 필요 없게’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냥 내가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오니
오셔서 그저 주의 뜻대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이게 우리가 바라는 성령충만인데
엡5장은 거꾸로 뭐라고 하냐 하면
‘생각하고 노력하고 분별하고 연습해서 네가 해라’ 그럽니다.
그게 뭐냐면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11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엡5:11~14
‘깨어라. 일어나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게 다 문맥으로 성령충만 입니다.)
15절. ‘그런 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16절.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성령충만 받아라.’ 이렇게 문맥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2장의 성령충만을.. 능력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데,
본문 엡5장의 성령충만은, 분별하고, 경건한 삶 측면의 성령충만입니다.
우리는 두 면을 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충만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편견, 오해는 뭐냐 하면
기독교라는 전체에 대한 오해이기도 하죠.
원래 우리 인간들의 본성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기대는 ‘초월’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 어느 장소에서도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종교가 종교 노릇을 하려면 뭐가 있어야 대접을 받지요?
초월이 있어야 합니다.
즉, 못 고칠 병을 고친다던가, 예언을 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있어야만
그 사회에서 종교로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기독교에 대한 기대 중에
이런 본성 적인 ‘초월’(기적)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이 초월에 대한 기대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거룩한 경건한 삶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 신적 간섭에 의한 초월에 의한 신앙의 승리라는 것이
우리의 본성적인 기대인 것입니다. (행2장의 초월적 측면을 더 좋아하는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경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이야기 해놓고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너희가 받은 구원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 된 신자 된 인생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연습하고 노력해서 채워 나가라.. 그것이 성령충만이다.
라고 지금 엡 5장 본문에서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단어들 속에,
예를 들면 10절에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라던가
또는 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라던가
15절에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절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껴서 무엇을 하라고요.. 경건을 연습해라.
(이게 다 성령충만의 측면들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즉, 말씀을 따라 연습하고, 노력하고, 자신을 채찍질해라.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
그리스도의 뜻과 그 인도하심으로 너를 채우고, 네 습관이 되게 하라.
이것이 에베소서 5장 18절이 말씀하는 성령충만입니다.
이게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고 계시는 성령충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달라고 한다고요?
하늘로부터 성령께서 임하사 나를 장악하여, 내 생각과 버릇을 홀딱 바꾸어서
하루 아침에 즉각적으로 완전히 변신시켜달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날을 잡죠. 그래서 준비하여 이번에는 성령 받기 전에는 안 내려온다.. 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상히 여겨서 성령충만을 주시기를 바라고,
그러나 그렇게 주시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갔다가 받는 사람이 있는 게 문제가 되죠.
물론 필요하면 주십니다. 그러나 그 필요는 아까도 이야기했다 시피
성령충만이 여기 엡5장에 요구 된 신자의 신앙을 대신하는 성령충만은 주시지 않습니다.
(행2장을 경험해도, 엡5장은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가 너무 좌절해 있어서 위로하기 위하여, 확인 시켜주기 위하여,
각성케 하기 위하여, 다시 힘을 내게 하기 위하여는 성령께서 오시지만
여기에 나열된 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채워야 할 실제적인 성화의 완성의 내용을
성령께서 오셔서 던져주고 가는 일은, 기독교 역사상에 없습니다.
그것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연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의 성령충만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구원과 완성은, 시간을 가지고 진행된다.. 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을 가진다’ 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는 데에
과정과 단계를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습하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셔서 단번에 받지 마시고
기도를 하시거든 하나님을 만나시고 다시 그 말씀을 확인하셔서
그 말씀을 지키시는 노력으로 연결하셔서
여러분의 기도와 여러분의 각오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실제적인 연습으로,
그래서 나아지는 진전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그 후에 보시면 이제 18절부터 다시 보죠.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도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렇게 연결 됩니다. 엡5:18~21
여기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감사하라’는 것이죠.
범사에 감사하며 복종하랍니다. 기억해두십시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령충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성령충만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간섭하실 것입니다.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데,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들 모두가 겪는,
여러분들이 볼 때 그 시시해보이는 여러분들의 형편이
하나님이 이 복(성령충만) 주시기 위한 성도들의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성령충만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에 의한 환경이고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2~27
이래 놓고 끝이 어떻게 나오냐 하면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렇게 갑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하여 허락 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그 몸으로 불러 연합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여기까지 그리스도, 즉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그대로 나타나서
어떻게 우리를, 그 구원을 완성시키느냐 하면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 부부입니다. 부부끼리 어떻게 하라고요?
남편들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듯이 사랑하랍니다.
그렇죠. 아내는 남편에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복종하랍니다.
왜 그래야 된다고요?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 같아서요.
◑적용 /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데.. 그걸 잘 해 내는 게 성령충만 입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면 이 본문으로 제가 주례를 합니다.
우리는 결혼을 할 때 사랑해서 합니다. 행복을 기대하고 합니다.
진심과 열심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각각 다 가정마다 다르지만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 맞나?
이것과 하나님이 정말 이 사람을 주신 것이 맞나?
이것에 한 번씩 걸리고 그리고 계속 걸립니다.
거기엔 사실 커다란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진심과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처음에 알고 기대를 하고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그 탓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이유는 그 때 오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 훈련이 안 된 것입니다.)
▶결혼생활의 진단과 의미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풀지 못합니다.
우리가 왜 이런 현실을 맞이하느냐 하면, 우리는 사랑의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단코 진심과 열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한 사랑의 정의만 해도
맨 처음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오래 참고’는 우리 말 표현은 굉장히 약합니다. 영어는 이렇게 했습니다.
러브 이즈 롱 서퍼링. 사랑은 죽을 맛이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죠? 상대방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방 하나를 감수할, 감당할 실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해력도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는 관용과 아량도 모자라며
그럴만한 덕성과 깊은 마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부로 살면서 비로소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내가 실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구비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 하나도 감수를 못하는데, 무슨 내가 할 말이 있으랴..
이렇게 가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고, 신앙 훈련(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달라지죠. 입바른 소리 못합니다.
남의 가정에 대해서는 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부부는 왜 저렇게 사나’ 그 이야기 안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무슨 이런 답을 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손 잡고 기도하면 된다.’ 그건 미친 인간들 발언입니다.
저는 부부 상담, 가정 상담에서 간단한 답을 내놓는 것은, 아주 꼬인 사람입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성을 극복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천 번 연습해야 하나 됩니다.
단련이라는 말이 있죠.
그 말은 제가 알기로는 ‘단’은 만 번의 연습이고, ‘련’은 천 번의 연습인가 그렇습니다.
뭐든지 그렇죠.
여러분 우리 외국어 할 때 그렇지 않습니까. 영어를 잘 하는 방법은 왕도가 없습니다.
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본성이 죄이기 때문에
건들면 모국어(죄성)가 먼저 나오는 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속에서 톡 나오는,
사이다가 터져 올라오는 것 같기를 바래서는 평생 신앙 훈련 못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1차적으로 올라오는 본성을 누르고
말씀으로 바꾸어서 답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는가를 감수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 잘 한다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열심히 사랑합니다. 기도 합시다.’
그 말 교회에서 연습하고 가죠.
그래가지고 실제 현장에서는 ‘아니 김 집사, 왜 얼굴이 왜 그래?’
‘우리 애가 가출했어요.’
‘기도 안 해서 그래!’ 기껏 준비한 거예요.
원래는 ‘얼마나 속상하겠어? 내가 기도할게.’ 이렇게 가야되는데
‘기도 안 해서 그래.’ 이미 끝나버렸죠.
우리 모두가 이게 우리 본성인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연습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중인격이나 위선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속과 겉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연습을 해야 속이 바뀝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부부가 결국 나이들어 가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넘어가기 시작하죠.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체념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젊었을 때 따져서 싸우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넘어가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부 속에서 이 일을 훈련 받습니다. 똑같은 의미로 뭐가 나오냐 하면
부모와 자녀가 나옵니다. 여러분 다 부모도 해보시고 자녀도 해보셨죠.
이것은 누구나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되어서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자녀가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이죠. 사랑하는데 대책이 없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나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것 같이 환장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애만 낳았지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식 하나를 기르는데도 얼마나 많이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그러면서도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상대방을 고치려고 합니다.
몰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 이 말을 안 해줘서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다 이 말 못하는구나. 내가 할게. 그래서 총대를 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부모말을 듣고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합니다.
동일하게 자식이 그렇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꾸중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이런 때를 쓸 수 있습니다.
사랑을 담보로 해서 이런 땡깡을 부리죠. ‘나 밥 안 먹어.’
세상에 이런 말도 안되는 공갈이 있습니까?
밥을 안 먹으면 자기가 손해인데 그 공갈이 통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제일 겁내는 것은 밥을 안 먹는다는 것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더 무서운 공갈은 ‘나 집 나갈거야.’
자기가 집을 나가면 잘 곳도 없고 먹을 곳도 없고 그런데 나간데요.
왜요? 부모가 사랑하는 줄 알거든요.
그런데도 부모말을 듣기 싫어요. 사랑하는 줄 알아요.
그 말이 맞는 줄 아는데 듣기 싫어요.
여러분 자녀 이야기가 아니고 여러분 이야기에요.
여러분이 여러분이 부모 말을 안 들었어요.
우리가 자식을 기르면서 우리가 부모 밑에서 크면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들이라고요.
우리는 죄인이구나.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종자들이구나. 그것을 배웠어요.
▶세상에 나와 사회 활동을 해보세요.
어디를 가나 내 상전이 있고 내 아랫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윗사람 마음에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우리는 모두가 나쁜 말을 내뱉습니다.
우리 군대가서 보잖아요. 마음에 드는 상관 있으세요?
이게 우리 불평이고 여러분 아랫사람 마음에 들어본 적 있으세요?
말귀하나 알아듣는 사람 없어요.
이게 뭐죠. 이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을 안 한 사람은 있겠죠. 자식과 부모가 없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누구나 아래 위는 있고 사회 생활은 하는 법이니까 동료가 있는 법이에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부부로 살며 부모와 자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라고요? 지금 이야기 하는 이것을 배우라고요.
뭘 배우라고요? 내가 실력이 없다. 십자가로 밖에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하심 외에는 우리를 고칠 방법이 없다. 나부터 고치자.
내가 넘어가야 한다. 내가 한 알의 썩어가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
이 훈련을 우리의 일상 속에 펼쳐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성령충만으로 가는 길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펼쳐놓고 있습니다.
어느 하루도 이 세 가지 상황 속에서 벗어나는 하루가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때나, 그를 부활시키실 때나,
그를 승천시키시고 우리의 머리로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매 순간,
매 상황, 삶의 전 정황 속에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가르치고 계시고 보게 하시고 겪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 하고 있죠? 성령께서 특별히 찾아오셔서
이런 모든 과정과 그런 것 필요 없이
단번에 머리와 가슴에서 신령한 사이다가 튀에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는데 왜 자기가 다르게 해달라고 우기는 거예요.
왜 그러는 거예요. 예수 안에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들었고
그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부르시되 그는 몸된 우리의 교회의 머리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부를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의 일상 속에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 세월을 아끼라.
주를 따라 살아라. 말씀대로 살아라. 성령충만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과 과정과 기회를 헛되이 하지 말라. 그러니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러니까 어느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를 배제한 사람이 없듯이
모든 구원 받은 백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에 동참 되었듯이
예외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고
새 생명을 얻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외 없이 성령충만으로 그의 삶을 인도받고
보호받고 훈련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중요시 하라고 이야기 했죠. 에베소서 5장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당하는 일 중에 하나님이 배려하지 않고 간섭하시지 않고
의미 없는 일이란 없다는 거예요. 범사에.
그리고 어떻게 하라고요.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상대방을 바꿔서, 환경을 고쳐서 안주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 상황에서 내 할 일을 해라. 내 훈련을 받아라.
사도 바울이 잡혀서 재판석에 서서 뭐라고 했어요. 아그립바 왕이여,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이 나와 똑같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함께 천국에 가기를 원합니다.
다른 아무 적대 행위가 없다니까요.
이 신자들이 가져야 하는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해야 되는 태도이고 자세이고 훈련이고
채워나가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죠.
어떤 억울한 일도,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 속에 손해 보는 일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외면하셔서 당하는 재난은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으리오.
여러분 삶에 중요한 것은, 매 삶의 정황과 매일 매일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키우고 인도하고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각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고 그 안에서 훈련 받아 크십시오.
말씀으로 여러분을 훈련시키십시오. 단련하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충만 해서, 복된 구원의 완성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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