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와 예배회복 출33:15~16, 시22:3, 마18:20 예배회복 5강. 스크랩
시편 22편 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예배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가장 절실한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출33장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출32장에서는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절일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금송아지에게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교도들이 제사하는 방식으로 뛰놉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하십니다.
그들을 멸하시려 하시다가, 모세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돌이킵니다.
출33장을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합니다.
천사들을 보내서 일곱 족속을 멸하고 너희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3절에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안 가신다고 했다가, 지금은 가시겠다고 합니다.
1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친히 가리라’는 말은 히브리어는 ‘내 얼굴이 너희 앞에 행하리라’는 말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위 두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온 우주 중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재하심으로, 그들과 실질적으로 함께하십니다.
▶<포로 후 성전 회복>의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 가운데서 돌아온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성전은 아직 폐허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걷혀있는 상태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해하십니까?
성전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두루 행하실 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에 넘칩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출14장 23-24절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여기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로 구름기둥 불기둥 가운데 거하심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두루 행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고유한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나라와 구별하신 고유의 표시가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출33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올라가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내가 친히 가리라 내 임재가 너희와 함께 가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16절에서 말합니다.
출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나라와 구별하신 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면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동행은, 성도의 가장 고유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함께하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요.
바로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성령강림사건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질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는, 그저 교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교리의 고백에 불과해요. 무슨 말입니까?
마18:20절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말합니다.
‘우리가 두 세 사람이 모였으니까 주님이 여기에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교리의 고백, 이론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한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예배가 올바르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이드존스의 책 <부흥>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책 인용) “진실로 첫 번째 요점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고
자기들 가운데 그 능력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능력과 임재를 의식하는 일이 있습니다. ...
그들이 언제나 의식하는 것은, 자기들 가운데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갑작스럽게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흥 때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 삶 가운데서 우리 예배가 운데서 당연히 의식해야 합니다.
▶A. W. 토저는 예배회복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 계신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받은 자녀들이
그분의 임재를 명확히 인식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순히 이론으로만 안다.
따라서 그분의 임재가 현재 신자들에게서 실현될 수 있다는 그 특권을 강조하지도 않고,
우리의 영적 지위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고, 말로만 가르칠 뿐
그분의 임재를 체험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3.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가
아무리 세상적인 부와 명예와 안락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넘친다 해도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어도
하나님의 임재를 잃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이 개념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서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건물이나 프로그램과 같은 외형적인 것만 남습니다.
다시 말하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는.. 걷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걷힙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은, 예배를 불참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삶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 실제 우리 삶으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리고 기도해도.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모두에서 이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는 에스겔서 10장과 11장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지성소를 떠나
성전문지방에서 예루살렘 동쪽 산으로 떠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성전에서 떠나있었기 때문에
에스겔/예레미야 시대의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날 성대한 제사를 드리러오는 유대인들이
많은 제물을 드리며 그들이 예배하러 왔을 때, 하나님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신뢰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한 후, 얼마 후에 겔10장이 일어났고, 얼마후에 성전이 침략당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쳤는데도
그들은 외부적인 종교의식에만 집착해서
예배 잘 드리고 안식일 날 제사 잘 드리면, 그 대가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습니다. 더 이상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
▶2.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신약적인 대표적인 예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계3:20절을 보면
예수님은 교회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구절은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하지만, 원래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신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밖에 세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교리적으로 이해합니다.
‘두 세 사람이 모였으니까 주님이 여기에 계심을 믿습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주님이 계실 것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역이 사업이 발달해서 지역사회도 부요했고, 당연히 교회도 부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부자이고 교회도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그랬다고 생각하며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칭찬할 것이 없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니, 하나님의 생명이 걷힌 것입니다.
몇 해 전에, 모 기독교 잡지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는데,
어느 교계 원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목회해왔는데, 그 교회는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은퇴해서 목회를 떠나서 돌아보니까, 교회 상태가 더 잘 보이더라고 합니다.
평소에 몸 담고 있었을 때는,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을 가지고는 대안이 없다고 말했어요.
“비정상적인 낙관주의가 판치는 상황이라, 걷잡지 못할 것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기독교 스타가 나올 것이다.
긍정의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의 글이, 아무런 비판 없이 나오는 것도 문제다.
그 흐름이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분별력을 잃었다.
이런 시대를 구하려면, 나부터 지도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정도를 걷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데, 나부터 용기가 없다...
교회가 형식만 남았고 프로그램만 남았지, 사실은 생명력이 떨어져 있다.
떨어진 정도가 아니다. 자녀들에게까지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서 어느 날은 장래에는 되겠지 한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에게 주신 고유한 특권이 하나님의 임재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고로,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걷혀 있습니다.
▶3.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면 우리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모양만 남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33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자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함께 가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로 함께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15절을 보면 모세가 말합니다.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주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아니하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사역의 성공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도 천사의 능력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서도, 능력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지금 광야 사막생활은 너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꿈에도 소원하고 목표했던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거기가면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물도 마시고, 몸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루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엄청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나중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포도 한 송이를 두 장정이 들 정도로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를 그냥 광야에 두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안타까운 사실이 무엇입니까?
에이든 토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고유한 특권인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의 용어도 모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데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처럼 나는 부자라고 하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4.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개인의 삶과 예배와 교회 가운데 함께할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우리는 출33장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안가시겠다고 하자 모세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전에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름으로 알고 은총을 입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구하오니 주를 알려주시고 주의 은총을 입게 하소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필요와 처지와 목표를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의 손길만 구했어요.
능력으로 하나님이 역사해서, 자기 필요가 채워지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어요. 모세는 하나님 자신과 의중과 의도를 소중히 여겼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기를 원했어요.
하나님의 길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기를 원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그분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단순히 자기 필요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그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분의 의중과 길을 알고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이 바울이 그랬어요.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고,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반석이며 보화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이 임재로 함께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가운데,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걷힌 줄은 압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새로운 예배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은,
프로그램 도입으로 새로운 예배형식 도입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교회 같아요.
에베소 교회가 오늘날 한국에 있다면, 진짜 좋은 교회로 소문난 교회일 것입니다.
제가 한국의 모든 교회를 다 가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어느 교회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고
주님을 보화로 알아서 부활하신 주님을 소유하기 원하고,
주님의 길을 알아서, 그 가운데 행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 가운데서 오셔서 운행하시니까 이런 생명들이 넘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생명이 넘치니까 그랬는지 몰라도.
그래서 주님을 집중적으로 구하고 찾는 첫 사랑에서 떠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할 필요를 발견합니다.
▶5. 참된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①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수입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에이든 토저의 글을 읽었어요.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한 가지 필수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셔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예배,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예배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예배가 가능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보이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봅니까?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기를 위해서 그럽니다.
회개만 해도 그래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져야 중심의 회개가 일어납니다.
다윗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어요.
선지자를 보내서 기름부었고 그날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했어요.
그날부터 그에게 찾아온 것은 시기와 질투였어요. 사울이 죽이려고 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오히려 섬기고 잘해주었고, 치유했는데..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굴속에 숨어있는데 사울이 잡으려고 왔다가 용변보러 들어와서..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지요. 그러나 죽이지 않고 옷깃을 잘랐지요.
그가 자르자마자 곧바로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에게 손을 댄 것을 회개했어요.
오늘날은 이런 정도는, 죄로도 여기지 않습니다.
그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관계, 사람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것 뿐아니라
관계적인 면에서, 불순종의 차원에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배하러 나와서도, 왜 회개가 안 되는가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있고,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는 없습니다.
입술로만의 회개 표면적인 회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처럼 중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해야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러니까 선순환 악순환입니다.
본문말씀 시편 22: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즉 예배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더 회복되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더 함께하심으로써
마음껏 하나님이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열망해야 합니다.
▶6. 교회/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도록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일이 없으면 그 예배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모든 성도들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임재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애통해하며 갈망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실 때까지 갈망해야 합니다.
이론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를 각오로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임재보다 교회성장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더 많은 돈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직장에서 승진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자신의 안락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더 우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저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심으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15년을 지나오면서,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실 때가 간혹 있었어요.
저는 예배 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가.
또 찬양팀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가. 그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가 화려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 하나님이 임재를 거둘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절박합니다.
집중적으로 제가 하나님을 구합니다. 그러면 저부터 임재가 다시 회복됩니다.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왜 그러십니까?’ 하고 지속적으로 찾습니다.
또렷하게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께 물으며 찾습니다.
먼저 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응답하지 않으시면.. '그러면 찬양팀의 문제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하나님 그러면 우리 교회가 문제이니까?’ 하고 묻습니다.
왜 우리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까?
한번 임재가 걷혔다고 예배를 중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낮예배에도 임재가 걷혔는데, 저녁예배 때도 임재가 걷히면
저는 더 이상 예배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예배를 지속하면, 순서만 때우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마당만 밟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를 중단하고, 모두가 주님의 임재를 구하며 그 문제를 찾습니다.
그랬을 때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교회에 안 좋을 영향을 미칠 요소들을 드러내서
제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과 모든 지체들이 우리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우리 신앙과 예배를 점검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테스트는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예배 속에 하나님이 임재로 함께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임재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주일날이 되어서 교회오고
예배 마치고 돌아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직장과 예배 가운데 회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찾고, 어떻게 삶을 조정해야 할지를 찾으십시다.
그러면서 삶을 돌이키고, 삶을 조정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구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원인을 제거하시고 임재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점진적으로 더욱 충만하게 임하고
그 임재가, 열방 가운데로 흘러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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