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 계2:9~11 인터넷 설교 녹취
*아래에 주기철 목사님 관련 내용이 하이라이트입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대표로 고난 받는 교회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부자 도시 서머나에 위치한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다포기하고, 오직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 했습니다.
당시에 상인조합(길드)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엔 오직 로마 황제를 主로 섬기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사람은, ‘길드’에서 쫓겨나서, 도저히 사업을 할 수 없는
그런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를, 계2장에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했는데,
원래는 그들이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서머나는 부유한 도시였고, 그들도 잘 나가던 사업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믿고 섬긴 이후부터
그들은 ‘가난함’이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라’고 위로, 칭찬해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 본문9절을 다시 보면,
‘네가 네 환란과 궁핍 poverty 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 rich 한 자라’
▲그런데 여러분, 이 본문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환란을 견디고 극복하면, 영육간에 부유한 것으로 갚아준다는
그런 의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어요.)
여기서 ‘부요하다 rich’의 일차적인 뜻은, 육적인 부자를 의미를 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영원히 이어질 부유를 뜻합니다.
여러분 이 땅의 육신적인 고통과 궁핍과 환란은 유한합니다. 제한적입니다.
한계가 있어요. 일시적인 겁니다. 홀딱 다 당해야 70~80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궁핍과 환란을 견뎠던 승리자들에게 약속된 복은
‘영원히 이어질 부유’를 의미합니다.
그게 '플루시오스 rich' 라는 단어가 말해주고 있는 의미에요.
*문자적으로 물질적 부유를 뜻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일 때는,
상징적으로 영적인 부유, 영원한 부유를 뜻한다고, 1차적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땅에서, 혹시 어떤 이들에게,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에게,
서머나 교인들이 겪는 것과 비슷한 인생의 정황으로 하나님이 몰아간다 할지라도,
우리 앞에는 그 잠깐의 순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종말론적 부유가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다고, 성경에 약속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 진정 거듭난 영혼은, 믿게 되어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2:9b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
보니까 서머나 교인들이 고난과 궁핍과 환란을 당하게끔 만든
배후에 작용했던 인물들이 누구였냐면 ‘자칭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우리를 비교해 봅시다.
여기서 적어도 교회를 10년 이상 다니고, 집사직을 받고, 권사이시고, 장로이시고 목사에요.
적어도 이런 그룹에 속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틀렸을 거라는 생각을 못 갖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에 속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당시에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우리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꿈에도 자기들이 틀렸을 것이라는 상상을 못했어요. 이게 무서운 거에요.
예수님이 사도요한을 통해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자칭 유대인이지만 실상은 사탄의 모임이라.’
이들이 예수님에게 가장 무서운 질책을 받았던 대상들입니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3
그런데 감히 누가, 믿음의 선배인 유대인들이 틀렸을 거란 상상을 누가했겠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 당시 곤란을 겪고 화형을 당했던 순교자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들이, 그들 스스로 그렇게 인식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생활에 익숙할수록 스스로 조심해야합니다.
얼마든지 내게 오류가 있을 수 있고, 틀릴 수 있고, 잘못이 있을 수 있고,
역시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소위 ‘자칭 유대인’이란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뭐해요?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있어요.
정말 하나님의 제자들과 백성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을 고난케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말입니다.
대체로 보면 교회 안에, 자기는 열심히 봉사하면서,
그 열심을 가지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감싸는 방향이 아니라,
사람을 깨고 사람을 죽이고, 할퀴고, 천국 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케 만드는 그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는 꿈에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들이 뭐라고요?
사탄의 회당, 사탄의 자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2:9b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했습니다. 소극적 제안입니다.
적극적 제안은 ‘죽도록 충성하라’ 하십니다.
▲‘얼마동안 몇 사람을 옥에 던져서 시험을 받게 한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죄의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련, 연단’이라는 개념입니다.
욥기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내가 단련 받은 후에 정금 같이 나오니라.’
정금 pure gold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진짜만 남게 되는 것이 정금입니다.
이것(정금)은 죽었다 깨어나도, 고난이라는 풀무를 통과하지 않고는, 추출되어지지(옥석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자 우리가 이 시간까지 살아낸 인생살이의 시간을 되돌아보세요.
그 혹독하고 어려웠던, 꿈에도 생각하기 싫었던 그 시간들을 겪어오는 동안에
뭐가 유익이 나왔는지 보세요. 그 때 우리가 알았어요.
무엇이 정말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인지 알았아요.
여러분 집에 갑자기 불이 났어요. 그럼 제일 먼저 무엇을 갖고 나옵니까?
그것이 바로 내 보물입니다.
불이 나야, 무엇을 가장 소중히 생각했는지 알게 됩니다.
환란이 임해야 옥석이 가려진단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무리 칠판에 써서 외워라, 중요하다 하며 이론으로 가르친다 한들
사람은 못 알아먹어요. 풀무속에 뒹굴어 봐야, 진짜와 가짜가 가려집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그 칠흑같은 환난을 겪고 나서, 욥이 고백했던 위대한 고백중 하나가 뭡니까,
‘내가 전에는 비록 듣기만 하였나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차원이 달라진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연단이, 시험이 정금같이 만든 것입니다.
그제야 내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버려도 될 것이 무엇인지 구분이 된 것입니다.
▲‘10일 동안’
이것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1) 10일이란, 시간이 제한된 짧은 기간을 얘기합니다. 무한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잠깐 동안의 시험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2) ‘10’이란 숫자는, 계시록에서 상징적으로 滿數를 뜻합니다. ‘충분히 차다’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잠깐 동안, 그러나 충분한’ 시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그 시험을 잘 통과해야합니다. 그 시험이 무엇입니까?
정금을 빼 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시험입니다.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식을 만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징계’는 한국적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들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히12:7
▲그래서 여러분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보상과 은혜를 주신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문법적으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 말은 ‘죽는 데까지 가라’
‘죽는 자리까지 가라’는 의미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기념하는 논문들이 집대성 된 게 있습니다. (설교의 하이라이트)
제가 그 책을 읽다가 좋은 글을 하나 봤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교단도, 신학교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국민의례다. 그래서 분위기가 전부 신사에 절하는 것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서 무방하다.
그래서 절하도록 공개적으로 결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 고독히 맞서 싸웠던 인물이 주기철 목사입니다.
때문에 일본 당국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건 당연했겠죠.
수없이 그를 체포해 붙잡아 고문하고 매질하고
4차례 5차례 이어지는 긴긴 고난 속에서, 주기철 목사님은 생명 끈을 놓게 됩니다.
4번째 투옥이 되었을 때,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알고
마지막 유언이 되는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오정모 사모님은 재혼을 한 사모님입니다.
이 편지를, 당시 한국인 간수였던 안태석이라는 분이 사모님에게 전달을 해줍니다.
‘아무래도 내가 소천할 것 같소. 지금 온 몸이 부어서 터질 지경이오.
어머니 봉양 잘해드리고, 영진이, 광조 잘 부탁하오.’ *장남, 4남 막내
이 유언 같은 편지를, 간수는 사모님에게 전달을 합니다.
이때 사모님이 간수에게 전한 말이에요.
‘아니 이때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편지를 보냅니까,
어서 가서 목사님의 갈 길을 가도록 전해주시오.
한국교회 장래가 목사님 어깨에 걸려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민족적으로 겪고 있는, 하나님 나라 차원의 고난에서 생각했을 때,
부부간의 정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그 고난을 이해 한 것입니다.
‘지금 어느 때인데 가정을 걱정하십니까.
어서 목사님 어깨에 걸머진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서
목사님에게 주어진 쓴잔을 마시는 길을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는 진달래꽃 피는 시절, 1944년 4월21일 오후9시에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그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꽃피워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터틀리안 교부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교회의 씨는 순교의 피다’
순교에 흘렸던 피가 있기에,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사 앞에 이렇게 꽃피울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 말이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관이 예비된다.’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꽃으로 이어진 화관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운동경기를 격렬히 경주한 끝에 이긴 최종적 승리자에게 쓰여진 관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무엇입니까? 그 흘렸던 순교자들의 생명의 관들입니다.
면류관들이에요. 그 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 속에 깜깜한 칠흑 같은 역사 속에 숨져갔던 주기철 목사님이
오늘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부흥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면류관으로 준비해주신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 면류관을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망에는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사망은 누구나 한 번씩 통과하는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 욕된 것을 끊기 위해 이 사망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래도 이 땅에 내가 머물러 인생을 경주하는 동안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까?
이 구원의 소식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서, 화급한 마음으로 ‘불이야!’ 하고
소리쳐 정신을 깨우게 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둘째 사망의 해害’는
진정 회개하고 구원 받아 생명책에 기록된 제자는, 그 해를 받지 않지만,
아직도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지 않은 사람들, 내 주변의 친구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얘깁니다.
가장 가슴 아픈 게 뭐냐 하면,
보화를 보화로 보지 못하고, 저주를 저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몰라요.
여러분 이제 우리의 남은 길은, 운동경기장에 뛰어든 경주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선배들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흘렸던 눈물, 땀, 피!
그것이 다시 한 번 주님이, 이 땅에 재림을 약속을 가지고 오시는 그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오시는 그 분이
역사에 마지막 심판을 찍으러 오시는 그날까지
여러분의 경주가 죽도록 충성하는 신실한 경주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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