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묵상글 모음 4

LNCK 2014. 9. 22. 10:29

 

묵상글 모음 4              모두 가톨릭 글 스크랩,                       출처보기

 

 

 

 

1. 죄사함을 받으려면... 사랑함이 많아야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7:47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 영성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젊을 때는 멋 모르고 행했던 일들이

얼마나 죄스런 일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더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는 게 죄지요!> 하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죄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 이 죄를 보속하고 기워갚는단 말인가?

 

그 최선의 방법을 주님께선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답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7:47

 

 

2. 사랑하므로.. 계속 기도한다.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쉽지는 않지요.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점점 황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으면 무미건조해집니다. 삶이 나태해지고 불성실해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기도가 더 줄어들고, 죄와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 일과 분주한 마음으로, 내 마음 속을 채워 나가면서 힘들어 집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제대로 이겨내기 힘듭니다.

참 신앙인들은 이를 극복하여 더 강한 선()을 가져오는데,

기도를 하지 않다보면 믿음이 생기지 않아, 선이 아닌 불평불만으로 그 순간을 채우게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묵상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함께

홀로 있기 위하여 자주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란.. 사랑의 관계에서 되어지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세상 일이 바쁘다면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주일에 한 번 참석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 외의 기도는 특별할 때에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과 가까워질 수도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길가,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기도는.. 내 심령을 좋은 땅으로 가꾸는 일입니다.

그래야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서 백배로 결실 맺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로 일관했었다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그의 어머니인 모니카가 주교님을 찾아가서, 제발 아들에게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주교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오직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모니카가 기도한지 몇 년 만에 성 어거스틴이 회심하셨을까요?

자그마치 18년 만에 회심해서, 그 길로 최고의 학자요, 성인이 되십니다.

 

주부 신자들은, 불신 남편을 돌아오게 하는 데는, 평균 15년 기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녀를 돌아오게 하는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기도의 응답에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가장 필요할 때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사랑하므로..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의 상처.. 명품 신앙인을 만든다

 

요즘 직장도 없으면서 2억짜리 목걸이를 비롯해

몸에 4억 명품을 휘감고 다닌다는 소위 명품녀가 항간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명품녀는 자신이 치장하고 다니는 비싼 명품들을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의 사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히 말하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부자여서,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선 무엇이 가장 자랑스러울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지니신 것 중에 버리지 않고

하늘나라까지 자랑스럽게 지니고 올라간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하시는 당신의 다섯 상처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도 당당히 이 다섯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처를 누구와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의 유일한 명품은 순교의 상처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태리 라떼란 대성전에 가면 베르니니가 조각한 열 두 사도들의 동상이 커다랗게

기둥마다 장엄하게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리석을 비누조각처럼 다룬 베르니니의 솜씨를 감상하다가

문득 열두 사도가 각자 들고 있는 물건들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물론 복음서를 썼고 늙어서 돌아가셨고,

토마스 사도는 기술자였기에 자를 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신들이 죽을 때의 수난도구들을 들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도 끓는 기름에 던져졌었고, 토마스 사도도 순교하셨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 중 순교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각자의 명품인 칼, , 방망이, 엑스 십자가 등을 들고 있습니다.

그것들로 순교하여 그리스도와 비슷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명품에는 비길 수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러울 것은 믿음 때문에 당한 희생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언제까지 부러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한 인생 사는데

자신의 인생을 좋은 명품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4. 사랑 부재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

 

인간이란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지탱해 주는 존재라는 의식이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론, 유감스럽게도 교회 공동체에서도 무척 희미해졌습니다.

이는 사회와 교회의 위기의 징후이면서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찰을 하면서 문득 퇴락의 심각한 위기에 놓인 자신들의 사회를 걱정하며

공동체타력(他力)의 의식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웃 나라 일본의 한 작가와

철학자의 날카로운 지적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의 진단이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전후 일본 사회는 예외적으로 풍요롭고 안전했습니다.

배우자가 없어도, 동료가 없어도, 돈만 있으면 혼자서도 유쾌하게 살 수 있었지요.

아니, 도리어 혼자가 훨씬 자유롭고 쾌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할까?’라는 지혜의 소중함을 잊어버렸습니다.

 

공동체가 없어도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모두 시장에서 상품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속에 깊이 침투해 버렸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더 받치고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했다는 생각은 얕은 생각으로,

그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내 운명과 관계있습니다

-이츠키 히로유키,타력

 

오늘날의 시대의 표징들은 개인이 고립된 원자화의 삶에서

공동체적 삶의 모습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희망을 세상에 줄 수 있도록, 먼저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선택하는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5. 사랑하기에.. 무겁지만 않고.. 행복합니다.

 

한 성당에서 사순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연극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지요.

 

연극이 끝난 뒤, 한 형제님께서 배우들에게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무대 뒤를 찾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배우들과 사진을 찍었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 역할을 담당했던 배우가 짊어진 십자가 소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 모습을 한 번만 찍어주세요.”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커다란 십자가를 짊어지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십자가가 너무나 무거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속이 텅 빈 십자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무거웠던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 역할을 담당했던 배우가 말합니다.

만일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저는 그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십자가의 삶이 불행한 삶일까요? 결코 불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면 십자가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안하고 쉬운 산이 있는 반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그 산을 오히려 많이 찾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렵고 힘든 산에서 더 큰 묘미와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6.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인 듯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씀처럼 "상처 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진주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을 때 마다 흔히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상처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깊은 상처를 겪은 사람만이 삶의 진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결국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상처는 수치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마치도 상흔처럼, 문신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야말로 결국 우리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하나님과의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7. 내 일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제가 쓰고 있는 휴대전화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다는 스마트 폰입니다.

물론 아이*, 갤럭* 등의 이름이 들어가는 최신형이 아닌 초창기 모델이지만,

저에게 있어서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일정관리, 주소록, E-Mail 확인 등을 아주 편안히 휴대전화를 통해서 관리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디를 다닐 때 두꺼운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또한 컴퓨터를 켜고 굳이 E-Mail을 확인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휴대전화는 저의 손을 떠나서는 안 되는 필수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의 일입니다.

이 휴대전화에서 쓰는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 하다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먹통이 되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습니다.

 

이 휴대전화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저장되어 있으며,

2011년까지의 일정이 담겨 있었거든요.

 

고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고치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는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화도 많이 났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반나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정과 주소록을 잃어버려서 커다란 일이 생겨날 듯 불안했는데,

사실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데이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불편한 것일 뿐

내 삶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듯 손에서 놓지 않고 애지중지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간직하지 못하고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을 항상 내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야 행복의 길로 들어설 텐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오히려 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8. 나는 가능성에 승부를 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고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고린도 교회 때나 지금이나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저는 묻습니다.

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습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까?

있는 것이 좋다면 있다고 믿으십시오.

 

비단 부활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모든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데

어떤 사람의 미래의 불가능성을 봅니다.

그런데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믿는 순간,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불가능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인간들이 이룩하는 미래만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할 때 취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아니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전망을 내 놓았지만

 

아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능을 믿기보다

하나님의 뜻하심과 능력을 믿고

저는 가능함에 희망을 두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가능하고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9. 인생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일

 

화창한 날씨라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면 이것도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버스를 타러 가고 있는데, 타야 할 버스가 정류장에 와 있습니다.

그 버스를 타기 위해서 급하게 뛰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타기 바로 직전 버스가 떠난다면, 이것 역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중요한 메모를 해야 하는데, 그때 마침 볼펜의 잉크가 떨어지는 것 역시도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이밖에도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삶은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당황스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소중한 시간을 다 써버린 뒤에 후회할 때가 아닐까요?

 

사실 지나간 시간은 세상의 돈을 다 주어도 사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시는 분의 말씀을 이곳에 적어 봅니다.

 

사람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세 마디가 있습니다.

그 말은 그때 좀 참을 걸, 그때 좀 베풀 걸, 그때 좀 재미있게 살 걸입니다.

 

임종하는 순간에 사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돈 좀 더 많이 버는 건데.’라면서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0. 무심코 살아가는 삶에서 어떤 물음

 

안식년 때 영어권 지역에 사는 교민들을 만났다. 이분들도 대개 여성들이었다.

처음에 한 분을 소개받아 만났다가 연줄이 되어

거의 1주일 동안 매일 저녁 소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민 온 계기는 자녀 교육 때문이었고,

부부가 모두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민 초기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 것에 힘을 얻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아이만 바라보고.

 

이제 아이들이 대부분 대학 진학을 하면서 집을 떠났다.

집도 있고, 큰 돈 모은 것은 없어도 주로 자영업을 하면서, 먹고사는 데 불편은 없었다.

 

시간이 나면 부부끼리 한국 연속극, 한국 방송물을 갖다 보고,

모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먹는다.

 

외국에 살고 있지만, 그 부부는 그곳 지역사회와 사람들과의 만남에 익숙하지 못해

여전히 현지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분리된 생활을 하고 있다.

 

주로 언어,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다. 새삼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는 특히 여성들이 우울해지기 시작하고, ‘뭘 했나? 왜 사는 건가?’ 싶다고 했다.

 

사실 이민 생활만 빼면,

한국에 사는 40~50대 여성들이 중년기에 겪는 자연스러운 삶의 어려움이지만

오랜 이민 생활에서 쌓인 어려움을 덜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같은 한국말로 이 분들과 일정기간 함께 지내며 내 힘을 보태고 싶은 간절한연민이,

내 마음을 그곳에 붙들어 매 놓고 돌아왔다.

 

그분들 안에 숨겨진 내적인 힘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왕에 이민을 갔다면 그 나라의 현지 지역 공동체로 들어가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이방인으로 고립되고 외롭지 않을까 싶어서다.

 

또 다른 교민 여성들의 생활을 다른 분에게 들었다.

이분은 동남아 국가의 교민으로, 남편의 사업 때문에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다.

 

동남아 교민들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나라의 경우 가족이 모두 와서 함께 사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한국 기업체에서 일하며 가족을 데려오는 경우 남편들은 회사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다니고, 부인들은 특별히 매인 곳이 없다고 한다.

 

인건비가 싸고, 안전 위험이 있어 교민들은 안전하고 좋은 주거지역에 모여 살며

집안일은 현지인들에게 맡기고 있단다.

자연히 부인들 할 일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부인들끼리 모임이 잦고, 모여도 특별한 목표가 없으니 주로 골프 치고,

맛나고 좋은 음식점 찾아다니고, 화투 치고, 말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나이도 배운 것도 고향도 다르지만 하릴없이 여자들끼리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사는 것이 뭐 이런가?’ 해서 피정 하러 오신 분이었다.

 

수련회를 마친 그 자매는 자신의 인생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교민들의 삶, 특히 부인들의 삶을 바꾸어 나갔다.

부인들의 사교모임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정기적으로 모여 기도하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고, 손으로 작업하며 만드는 동안

각자의 걸어온 삶에 대한 나눔을 하고,

만든 것들을 소외 계층과 나누고, 봉사활동을 나가면서

또 하나의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여인들을 조직하고 꾸려가고 있다.

 

무심코 살아가던 삶에서 어떤 물음이 생기는 것은 큰 은혜다.

전진만 하던 삶에서 뭔가 좀 불편하지만 관성에 의해 계속 나아가다가

어느 날은 급제동을 걸 수밖에 없는 날이 오는데,

그전에 스스로 물음을 갖고 멈출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기회이며, 회심과 치유의 때가 된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서면 그 주변이 변한다.

 

11. 군밤 한 알

 

김천에는 직지사가 유명합니다.

4월 어느 화창한 날. 벚꽃이 한창 필 무렵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직지사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지사 벚꽃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직지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니까 왼편에 군밤 리어카가 서 있었습니다.

그냥 그 앞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는데

그 군밤 사장님이 아무 말씀 없이 지나가고 있는 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손을 펴보니 군밤하나였습니다.

! 이거 의외의 수확인데하며 몇 걸음 걸어가서 입안에 톡 털어 넣었습니다.

! 근데 밤이 맛이 있네요.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

갑자기 한참 가고 있던 길을 되돌아서 그 군밤 리어카로 가서 밤을 한봉지 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군밤이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미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껴지니 밤을 살 때 결코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장사는 이렇게 해야 돼!’라고 생각하며 군밤을 하나씩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군밤 한 알!’

가던 길을 돌아서게 했던 그 군밤 한 알

 

성직자는 그 군밤 한 알을 쥐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직자가 줄 수 있는 군밤 한 알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 말씀을 살아가는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하나님 말씀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성직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맛을 본 사람들은, 더 얻으려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너무 기분 나빠할 필요 없는 이유

 

지난 여름 전철을 탔는데 제가 자리에 앉으니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저를 피해 슬쩍 자릴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몸에서 땀 냄새가 나나, 음식 냄새가 나나 신경이 쓰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매우 서운하면서도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사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그렇게 즉시 내색을 하나 하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서울역에 갈 때 노숙자들을 피해갔던 제가 부끄럽고

제가 나이 먹어 몸에서 냄새가 더 많이 나면,

사람들이 피하고 찾아오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제도 매주 가는 노인 시설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의 몸에서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리 냄새가 지독하지 않았습니다...

 

 

13. 주님 사랑하기

 

주일미사에 빠진 것을, 죄로 고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끔 그럴 때 물어봅니다. '왜 주일미사를 빠지는 것이 죄가 될까요?' 하고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대답을 못하시거나,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고백한다고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초등학생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내가 주일을 빠지면 예수님이 마음 아파해요하고 말입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말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께 다가가지 않는다면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죄라는 말보다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랑에서 어긋나는 삶이겠지요.

 

비록 주일예배 뿐만 아니라, 그 외 모든 일도

사랑의 관계에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14. 이제는 원위치로!

 

20148, 교황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신 파격의 행보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와 사회 지도자들의 모습도 그랬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하도 비정상이 일반화되다보니, 교황님의 정상이 특별해보인 것입니다.

 

교황좌란 것 사실 가장 위쪽이 아니라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자리,

종들의 종의 자리, 섬김과 봉사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슬프고 아쉽게도 교회는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점점 더 높이 올라만 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너무나 감사한 것이

엉뚱한 자리로 가버린 교황좌를 원 위치시킨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행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보와 유사했습니다.

한 마디로 파격과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존의 예언자, 지도자들의 권위주의적인 모습, 관료주의적인 모습,

형식주의적인 모습에 익숙해있던 백성들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15. 죽음의 행렬, 죽음의 문화                눅7:11~16

 

가슴이 탁 트이는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된 예수님 일행의 행렬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다볼산(변화산), 그리고 광활한 에스트렐론 평야를 거쳐

사마리아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렬이 조그마한 마을 나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성문을 통과하던 중 또 다른 한 행렬과 만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두 무리의 행렬이, 나인 고을의 성문에서 딱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행렬의 만남은 참으로 기가 막힌 행렬, 정말 크게 대비가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생명의 행렬이었고,

또 다른 행렬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중심으로 하는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참으로 운 좋은 과부요, 그 외아들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다른 수많은 상여들이 그냥 그대로 성문을 통과해서, 성문 밖 무덤 속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와 죽은 외아들은 기적처럼 성문에서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절대자 예수님 앞에

특별한 절차도 요란스런 과정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우선 아들의 죽음과 동시에 이미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가 된 과부부터 살리십니다.

아무런 희망이나 삶에 대한 의욕 없이

하염없이 울면서 상여를 따라가던 과부를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이어서 즉시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들의 관으로 다가서셔서 명령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정말이지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기상천외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집니다.

관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소리, 관속에서 들려오는 두드리는 소리, 외치는 소리,

열린 관에서 되살아난 외아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합니다.

완전히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메시아의 실체를.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삼라만상의 주관자임을.

이제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해 죽음이 정복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죄와 죽음의 시대가 지나가고, 부활과 생명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우리 시대, 우리 주변을 둘러봅니다. 예수님 시대나 상황은 유사합니다.

생명의 행렬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행렬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 한 가지는 죽음으로 향해가는 수많은 행렬들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의 행렬과 마주치지 못하고

성문 밖 어둠 속으로 던져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명백합니다.

우리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죽음의 행렬을 향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음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방한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있었던 미사에서 하신

강론의 요지가 인간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자였습니다.

 

죽음의 문화는, 달콤한 얼굴의 다양한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이 그렇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구분된 모순적인 작업환경이 그렇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죽음의 문화의 가장 큰 희생양은 이 사회의 약자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며 힘없는 노인들, 청소년들입니다.

 

죽음의 문화는 천민 자본주의에 기생합니다.

생명보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배금주의가, 죽음의 문화의 출발점입니다.

무지막지한 개발논리가 죽음의 문화를 부추깁니다.

생명윤리의 경시 풍조가 죽음의 문화를 확산시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은, 인간 각자에게 있지 않다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망각하다보니, 쉽게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습니다.

 

죽음이 문화일수록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보입니다.

성형왕국, 지나치게 왜곡된 성 인식, 외모지상주의가 넘쳐나는 우리 대중문화의 현실입니다.

바로 죽음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끝은 참담합니다.

 

죽음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때입니다.

무엇이 죽음의 문화인지, 어디가 생명의 행렬인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겠습니다.

 

올바른 생명윤리를 확립해야겠습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죽음을 부추기는 요인들을 합심해서 억제해나가야겠습니다.

 

 

16. ‘부모의 기도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상냥한 말과 친절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소망과 이상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 이것이 저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명심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