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내가 붙드는 나의 종 / 잭 푸닌

LNCK 2014. 9. 20. 18:0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사42:1~20 출처보기

 

◑사42: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라”

참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물질이 그를 붙드는 것 이전에,

어떤 단체나 기관이 그를 붙들어 주기 이전에,

주님이 꼭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종들을 언제나 굳게 붙들어 주십니다.

물론 사람들도, 주의 종들을 후원하며, 격려하지만

주의 종들에게 진정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의 붙들어 주심’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지지해 주거나,

자기를 재정으로 보조해 주는 것을 원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붙들어 주심을 늘 간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붙든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타막’인데,

‘굳게 붙잡는다 hold fast, 지지해/공급해 준다 support’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라” 는 말씀은,

주님이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신다.. 는 뜻도 되지만,

그의 필요도, 주님이 지지/공급 support해 주신다.. 라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평신도 포함)들은,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만 먼저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물질적 필요도 포함해서요!

 

주님이 종종 우리를 궁핍한 환경에 두시는 이유는,

주님을 더욱 더 간절히 의지하라는, 그런 목적이 있으십니다.

 

사실 우리는, 물질을 포함하여, 내 삶의 환경이 절박한 helpless 상태가 될 때

주님만 간절히 붙들고, 기도도 더욱 간절해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하나님이 붙드시는 종의 특징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이사야 40장~66장에 걸쳐, ‘여호와의 종’이 계속 나오는데,

그 뚜렷한 특징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며/사역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 맞습니다.

 

▲그가 이방에 공의 justice, judgment 를 베풀리라

하나님의 종, 성령의 사람은

복음을 전하며 사는데, 세상 구원을 목적으로 사는데,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사랑과 공의

-구원과 심판

 

42:1절에서는 ‘공의’를 전파하지만

이어지는 3절에서는 ‘사랑’을 전파합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종들은, 하나님이 불러서 세우지 않은 종들은

구약의 무수한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듯이

항상 ‘사랑, 구원, 은혜’ 한쪽 면만 증거 합니다.

 

듣기에는 나이스 하겠지만,

그런 반쪽 복음이, 결국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대단한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이 붙드시는 종은

심판도, 균형 있게 선포합니다.

그가 이방에 공의 justice, judgment 를 베풀리라!  :1

 

 

◑사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마12:19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여기서 '다투지 아니하다'라는 말은 ‘에리조’라는 헬라어로서

주로 논쟁하는 싸움을 이야기 합니다. 사소한 말다툼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공격에, 충분히 논리적으로 맞설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한,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분은 그런 다툼의 시간을 보낼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짧은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을 허락 받으셨고,

그 기간 동안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며, 십자가로 한걸음씩 걸어가셔야 했습니다.

 

그 분에게는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했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귀한 시간을, 사람들과 논쟁하는 일에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이 단어는 헬라어의 ‘크라우가조’, 영어의 cry 입니다. '울부짖고, 소리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사야서에는 히브리어로 ‘차아크’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부르짖다' 라는 의미입니다.

무언가 억울함과 분통함을 호소하거나 소리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할 때

예수님은 자기 모든 원통함과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이 소리, 저 소리 들으며, 억울한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붙드는 종,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은

자기 개인적 문제로.. 너무 시시비비 하지 않습니다.

 

자기 개인적 문제로, 남들과 다투거나, 소리를 치다보면,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데, 지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문제로, 다투거나 소리를 칩니다만,

자기 개인적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거나, 자기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일이 대응하고, 다투어 보십시오.

자기에게 성령의 불길이 꺼져서, 싸늘하게 되고.. 결국 사역이 안 되는 것입니다.

 

 

◑43:3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은, 실족한 사람을, 절대로 나무라시거나, 낙담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신랄하셨지만)

연약해서 넘어지거나, 지쳐서 허덕이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베푸셨지, 야단이나 꾸중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언제나 격려를 받고, 치료를 얻었습니다.

 

1절에, 여호와의 종은, 공의와 심판을 전파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고요,

실족한 개인을 만나실 때면, 언제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꺼뜨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씨를 살려서, 불이 활활 붙게 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은, 그것이 자기 취미인 듯이

낙심하거나 지친 심령들이 있으면,

언제나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격려하시고, 병든 심령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마치 그런 일을 즐기시는 것처럼요!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종’들이 하는 일은

예수님을 본 받아서

낙심하고 지친 심령들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들에게 말씀을 통해 용기를 주고, 기도로 격려합니다.

 

낙심하거나 실족한 사람들은, 사방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어디든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을 격려하고, 생명을 공급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당신은, 죄송하지만, 참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의 종은, 예수님처럼,

그런 일을, 자기 취미활동처럼, 즐기면서 합니다.

그 일을 수행함으로써, 자기 존재가치와 자기 삶의 의미를 느낍니다.

 

 

◑43: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종은, 7절↓처럼

주의 성령을 받아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합니다.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그렇지만 주의 종들이 꼭 명심해야 할 구절이, 바로 본문의 8절입니다.

‘나는 내 영광/찬송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 입니다.

 

주의 종들은, 열심히 사역을 하지만, ‘종’입니다.

자기가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찬송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주의 종들이, 자기 사역이 좀 잘 된다고

자기가 영광과 찬송을 받으려 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도적질하는 범죄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물질’을 가로채고, 도적질하는 죄보다, 훨씬 더 큰 범죄라고

저 푸닌은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조심합니다.

또한 남들에게도 그렇게 경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시고, 당신의 사역을 크게 들어 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눠주시는 것은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님도, 지상에서, 한 번도 영광을 스스로 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요8:50

 

만약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 touch and violate 하면

그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기 시작한 겁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 범죄를 엄중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여러분, 보십시오.

한 때 하나님께 크게 들어 쓰심을 받았던 종들이

안타깝게도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이, 자기에게로 돌아올 때, 그걸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따라야 할 사람들이, 자기를 따를 때, 그걸 마지못해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처럼 존경을 받았을 때, 사42:8절 말씀에 저촉된 것입니다.

 

꼭 유명한 사역자뿐만 아니라, 유능한 구역장, 유능한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돌여야 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고, 스스로 만족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과 그 기름부음은, 그를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42:19~20절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맹인이...내 종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수행해야 할 종이, 소경이 되었습니다.

 

▲‘사자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사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로 고쳐 읽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가리킵니다.

 

본절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특별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택하신 ‘하나님의 종’이

귀머거리요 소경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말씀입니다.

 

다음 구절에 보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합니다.

 

▲20절,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과거에 한국에, ‘갓 시집 온 며느리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으로 지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종’이 바로 그러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죄에, 개인적으로 너무 관여치 마십시오.

딤전 5:22,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서, 너무 간섭 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괜히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지키고, 그랬습니다. 눅11:54

그 시간에, 차라리 생산적인 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럴지언정, ‘하나님의 종’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소경처럼, 벙어리처럼.. 그렇게 지냅니다.

 

남들이 당신의 사역을 질투해서, 여러 가지로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같이 다투지 마십시오. 그냥 소경처럼, 벙어리처럼.. 그렇게 지내십시오.

 

일찍이 스펄전 목사님도, 이 진리를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서 좋은 설교를 남기셨으니, 참고 바랍니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으십시오 / Spurgeon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