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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대는가? / Ravenhill

LNCK 2014. 10. 15. 14:07

 

누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대는가?            사무엘하6:1-7            출처보기, 정리

레너드 레이븐힐                                                관련글 :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수록 조심해야

(부제: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하는가?)                         

 

장막에 관해서 처음 언급 된 가구가 법궤(언약궤, 증거궤)였습니다.

궤는 길이 약 1.5미터, 높이 약1미터, 넓이1미터였습니다.

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보이는 물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경이로운 천사들 사이에 두신 지상의 장소였습니다.

 

법궤라고 하면, 노아의 방주도 떠오릅니다.

아기 모세를 넣는 작은 갈대 상자도 궤입니다.

‘법’ Ark, 노아의 방주, 모세를 넣은 상자.. 3개는 모두 히브리어로 같은 말(히. 테바)입니다.

 

출30:6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1. 법궤는 스스로 보호하십니다.

 

궤는, 하나님의 임재로, 오늘날의 복음 사역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 부정한 손을 대면.. 위험에 빠집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삼상5장에, 법궤가 한 때 블레셋에 빼앗겼던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법궤가 자신들을 축복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축복대신, 법궤 때문에, 저주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 곁에, 궤를 두었습니다.

괴물 같은 신, 다곤 곁에 둔 것입니다.

 

다곤은, 상체는 사람이지만, 하체는 물고기인 일종의 인어 같은 모양을 한 우상 입니다.

 

법궤를, 다곤 신전 안에 놓자마자,

누구도 손대지 않았는데, 다곤 우상이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다음날 다곤에게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보니

다곤이 또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번 방문하시자,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다곤은 이제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삼상5:6~7절입니다.

주님께서 아스돗 사람들을 무섭게 내리치셨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성 종양 재앙을 내리셔서 이스돗과 그 지역사람들을 망하게 하셨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의 신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무섭게 내리치니 그 신의 궤를 우리가 있는 곳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그곳으로 옮긴 이후, 하나님의 손이 그 도시를 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 도시가 처한 위험을,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잘못 사용하면, 당하게 되는 위험에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손으로 거룩한 것을 만지면,

거룩한 물건은 우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부정 unclean 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사역에 헌신하려고 하면,

 

그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이

우리 사역자들을 먼저 치십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은, 부정한 것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 주변을 7번 돌았습니다.

어떻게 돌았습니까? 하나님의 궤를 메고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궤는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습니다.

 

여리고인들이성 밖을 내려다보며 저 미친 자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게야?”라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습니다.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힘들었을 겁니다.

들고 가는 게 무엇인가? 궤잖아! 나무궤짝에 불과하잖아!”

 

그러나 법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

여리고 성과 접촉하자

부정한 여리고 성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은, 부정한 것과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거룩한 법궤를 메고 돌지 않습니다.

대신에 거룩한 복음을 들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거룩한 복음을 든 사람들은, 그것이 복음사역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언제나 침묵해야 합니다.

잡다한 말,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과 접촉되기만 하면,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라도,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사역을 통해,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부정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무기를 들지 않고 돌았습니다.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하루를 돌았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7번 돌았습니다. 전부 13번을 돌았습니다.

 

그들은 성을 도는 내내 (, 복음 사역을 하는 내내) 침묵을 지켰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던지는 비난을 참아내었습니다. 쓸데없이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큰 함성을 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웃사는 궤를 전혀 손상 시키지 않았습니다. 망치로 깨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웃사가 궤 앞에 서서, 신성 모독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했습니다.

궤가 넘어지려고 하네! 붙잡아야지

 

어떤 사람이 한번은, 스펄전에게 성경을 변호하는 모임에 가입하겠는가?’ 물었습니다.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칼을 들고 사자 앞에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사자는 칼을 들고 호위하거나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사자는 스스로 강합니다.

성경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시므로, 굳이 변호하거나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웃사는 그저 궤를 안정시키려고 했는데.. 그만 죽었습니다.

이 내용이 중요합니다.

 

웃사는, 자기 생각으로, 복음사역을 도우려고 했는데,

그만 치심을 받아서 죽어버렸습니다.

 

웃사 역시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다루다가..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

 

웃사는.. 평소에도 궤지기였습니다.

궤 옆에서, 매일 궤를 돌보았기에, 궤를 너무 겁 없이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말씀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말씀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웃사처럼, 하나님의 치심을 당하는 것입니다.

 

 

2. 법궤를 수레에 태우지 마십시오.

 

삼하6:6-7입니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그들은 궤를 운반하기 위해, 수레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궤를 수레로 실어 나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궤의 모퉁이에 4개의 금 고리를 달고, 그곳에 막대를 꿰어서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레를 만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새로운 것을 좋아했습니다.

삼손이 뭐라 했습니까? 나를 새로 만든 삼줄로 7번 묶으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기가 힘을 잃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궤를 운반하는 방법을 현대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와 수레를 사용할 수 있는데, 왜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야 합니까?

 

수레란.. 그러니까 현대적이고, 거창하고, 화려하고

남들 눈에 확 뜨일만한.. 웅장한 수레를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호위병들도, 수레 주위에 많이 세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새롭고 웅장한 수레를 등장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법궤), 복음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화려한 시설을 동원하려 한다면.. 오히려 법궤를 멘 소가 난리를 칠 수 있습니다.

괜한 소동이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그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 그의 놀라운 위엄 안에,

그의 영광 안에 거룩한 것을 다룰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궤가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솔로몬은 인류가 지은 가장 비싸고 호사스러운 건물을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시멘트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금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제단을 건축했고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중보를 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이 건물을 건축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지었습니다.

제단을 건축했습니다. 희생물도 제단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아직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없다면, 성전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교회에 거창한 장식물을 만들어 놓고,

우리 성가대가 최고라고 자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가장 잘한다고 뽐내고

이런 저런 자랑을 한들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소용없습니다.

 

불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궤는 레위인들이, 어깨로 친히 메야 했습니다.

 

너무 현대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법궤는, 복음전도는.. 그저 옛적 그 방법.. 사람의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얼마든지 잘 전파될 수 있습니다.

 

 

3. 복음사역 중에, 궤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소는 왜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은 아마도 꼴을 먹고 싶어서 요동했나봅니다.

 

구약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오늘날의 복음사역에 비유됩니다.

강력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시니까요.

 

예수님은 복음으로 인하여, 가정에 분란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 분란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위 구절에서 집안, 교회, 교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으로 인하여, 교회는 분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마치 법궤를 싣고 가던 소들이, 뛰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궤를,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웃사처럼, 자기가 함부로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키려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웃사를 향해 일어나서, 웃사를 쳐서 죽였습니다.

 

보십시오. 웃사같은 궤지기, 즉 복음사역자들인 우리는

오늘날 복음사역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무슨 분란이 일어나면, 너무 함부로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웃사는 단지 하나님의 궤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현재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가 흔들리지 않게

여기저기 손대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즉, 복음을 희석시킬 때.. 저는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법궤를 보호하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법궤를 보호한다고, 손을 대었다가

웃사는 치심을 당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사역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사역이 있는 곳에는, 소들이 날뜁니다. 분란이 일어납니다.

 

그때 함부로 자기 손을 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웃사처럼 됩니다!

 

제가 하려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가, 매우 단순한 일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망치를 가지고 궤를 부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들이

함부로 거룩한 것들을 침범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개입을 불러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질문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엄을 계시해 주셨기에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교회를 빠져 나가신 적이.. 과연 언제입니까?

 

교회를 떠나가면서 아유 그 옷 참 예쁘네요.” 하거나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 것, 그리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시시한 것에 대해 잡담을 하십니까?

 

우리는 교회에 들어올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로 성전을 떠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경외감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궤를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너무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조심 하다 보니
   복음이 복음답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궤를 흔들리지 않게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손을 떼셨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웃사가 궤를 부셔버리려고 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선동 해 반역을 꾀한 것도 아닙니다. 어찌보면 도우려 한 것입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을 위해, 궤가 흔들리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웃사는 자기 주제를 넘어갔습니다. 인간적 생각, 그게 전부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목사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가장 큰 교회를 담당하고 있다고 하던데 교회는 얼마나 큽니까?’

   ‘크기는 그 길이가 5킬로인데, 깊이는 3센티입니다.’

 

   표현을 재미있게 했지만 비극적인 일입니다.

   많은 교회가 그런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변하시겠습니까? 법궤를 그냥 두십시오.

법궤는 스스로를 보호하십니다.

스펄전의 말대로, 사자 앞에 칼을 든 군인이 호위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면 계속해서 궤에 손을 대시겠습니까?

법궤를 진정시킨다고 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