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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모음 12

LNCK 2014. 10. 12. 18:44

 ◈묵상글 모음 12                                        가톨릭 글에서 스크랩, 출처보기

 

 

 

 

 

◑1. 행복한 가정을 너무 부러워만 하지 맙시다.

 

날씨가 좋은 봄 가을에, 공원에 나가면

아빠 엄마들이, 어린 아기를 안고, 한 없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자녀를 응시합니다.

참 행복한 모습이요, 부러운 광경입니다...

 

본문 설명/ 의아한 예수님의 반응

 

11:27.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크게 성공한 사람이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의 부모를 칭찬하고 부러워합니다.

얼마나 자식 교육을 잘 시켰으면...’ ‘자식이 저리 잘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명 설교를 듣고 있던 한 여자가

작은 소리도 아니고, 큰 소리로 모친 마리아를 극찬합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27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은 의아스럽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호응하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를 키우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저를 위해 큰 희생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꽤나 의외였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생뚱맞기도 하고, 동문서답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8

 

젖을 물릴 아기가 있는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훌륭한 자식을 둔 부모도, 사람들에게 많은 부러움을 삽니다.

 

자녀가 없는 부모나, 독신주의 성직자들도

자녀를 가진 부모를 그래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자녀를 가진 세상의 부모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복음의 다른 데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8:28

 

정리하면, 가정에서 자기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은 숭고한 행복이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자녀를, 영적인 양식을 먹여서.. 잘 양육하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야 말로, 아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또 그가 영적인 양식으로 잘 양육해서 키운 신자들은

천국에 가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되는 셈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자기 육신의 자녀를 잘 양육한 부모가 부러움을 사지만

영원한 천국에 가서는, 더 큰 부러움을 살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 가정을 잘 돌보고, 양육하는 일은.. 너무나 고상한 일이지만

(그 일도 사실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이 집을 잘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단란한 가정을 너무 부러워만 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시각, 그 눈!

영적인 가정을 잘 양육하고 아름답게 가꾸시는.. 영원히 복된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기도생활에 관하여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눅11:5-13

 

1. 끈기 있게 기도 못 하는 이유

 

위 말씀은, 기도를 하되, 끈기 있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가요?

두 가지의 경웁니다.

 

-하나는, 절실하지가 않아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실하지가 않다는 뜻은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사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청하지 않습니다.

한 번 툭 던져봐서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의 사람에게, 기도를 들어주심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은총을 허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허비되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도 마음이 아프시지만

무엇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이

사람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도록

우리의 갈망을 키우시고

간절히 그리고 정성껏 기도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확고히 믿지 못하면

한두 번 기도해보곤 역시 안 들어주시는구먼!’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선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자기에게 좋으신 하나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었던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었던 불행한 일만을 봅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일만 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봅니까?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좋은 것만 봅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보기에 나쁜 일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런 깨달음과 믿음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힘들게 그리고 드물게 주어지는 은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엉뚱한 걸 주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 청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이는 마치 사탕을 달라는 아이에게 우유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할 때마다

부모가 사탕은 이빨을 썩게 할 뿐이라고 하며 우유를 주면,

아이는 그 다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근원적인 불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신다는 불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은, 사실은 불신이 아닙니다.

미성숙할 때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좀 크고 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뿐

부모는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청원기도를 하고,

그래서 우리의 청원이 응답되려면, 우리의 청원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육적인 것이 아니고, 성령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부귀영화도 아닙니다.

사랑을 달라고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듯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고 청해야 합니다.

 

3. 은총을 많이 받는 방법

 

우리는 기도에,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먼저 청해야 하는 은총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사랑, 평화, 기쁨 등의 온갖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청하는 것이고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것들도 덤으로 얻게 될 터인데

성령의 은총보다 세상 것들을 더 청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은총을, 기도자는 진정으로 원해야 합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기도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그것은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죽기까지 청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시고 금방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청하려고 할 때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청하려는 마음을 지녀야합니다.

 

 

◑3. 고통을 보내시는 이유는, 기도에 전념해서 용사로 재탄생하라고

 

요즘은 계절을 타서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게 자주 지난 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내 생애 안에서 가장 절실히, 가장 간절히 기도했던 때가 언제였던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지 10년 정도 된 시기로 기억합니다.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많이 노력했었지만

노력만큼이나 방황이나 좌절이 많았던 시기,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던 시기,

더구나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종신서원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여러 측면에서의 다가오던 스트레스들, 거기다 지극히 소심했던 제 성격은

제 영육을 완전히 다운시켰습니다.

"이렇게 소화가 안되고, 통증은 계속되고 혹시라도 큰 병은 아닐까?

아직은 좀 더 살아야 되는데..."하는 걱정에 내시경까지 해봤지만 아무런 이상은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다보니 몸이 맛이 가고,

몸이 맛이 가다보니 정신도 약간씩 맛이 간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수도원 공동체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또 스트레스를 받고... 아무튼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다보니

삶을 완전히 포기할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소문을 통해서 제 근황을 알게된 어머니께서

하루는 큰 가방을 들고 수도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애야, 수도생활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도 할만큼 했으니, 그만 됐다.

원장 신부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이젠 시마이하고 집으로 가자!"

 

당시 너무도 심신이 지쳐있던 저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안 받쳐주니 할 수 없지"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귀향열차를 탔습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집에 와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몸이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지

하고 완전히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제게 어느 순간

"그래도 내 청춘을 바쳤는데, 너무 억울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가는데 까지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오기가 은근히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는 집 가까운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정말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수도자로서 봉헌된 삶, 봉사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협조 안 하시느냐"고 인정사정 없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제 안에 남아 있는 에너지 전부를 기도에만 다 쏟아 부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도 기도가 지나쳤던지 탈진할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절실히 기도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껴지던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애야, 이제야 알겠느냐? 네게 고통을 보낸 이유를. 정화, 단련,

거듭남이 네게 필요했었단다. 이제 걱정말고 다시 한 번 새 출발해 보거라."

 

이런 부끄러운 제 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그때 당시의 고통을 가장 큰 선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보내시는 이유는

보다 절실한 기도, 보다 처절한 기도를 통한 새 삶을 준비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시 제가 틈만 나면 밥먹듯이 되풀이하던 기도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을 "왕실망"시켜드리지만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는다는 확신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 한 차원 도약을 위한 것, 영적인 삶을 위한 것,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것일 때

하나님께서는 100%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4. 대화 기도의 약점

 

우리는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인격의 만남이며 관계라는 것,

곧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교수에게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했다.

한 시간 동안의 면담 도중 핸드폰이 네 번 울렸는데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날리고 통화를 하는 모양을 보고

주례를 거절했다고 한다.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의 주례를 청탁하는 자리에서

단 한시간도 눈을 마주하고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없는 산만한 사람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혹시 교수는 하나님이시고 제자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기도가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있게 의식하고 나누는 대화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안토니 블룸은 기도란 하나님의 인격적인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 면전에 선다는, 마치 최후의 심판정에 임하는 것처럼

두렵고도 떨리는 자세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 있냐고 한숨 쉬기 전에

하루에 단 한 번 아니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과 만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하면서, 온갖 분심(나눠진, 분주한 마음) 속에서,

길을 가면서, 아무 때나 틈새에 잠시 불렀다가, 힘들고 바쁘다고

다시 구석으로 밀쳐놓는 분이 소위 나의 <주님>이다.

 

이렇게 소홀히 대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즉각 달려오지 않는다고,

침묵하신다고 주님을 원망한다.

 

사실 너무 쉽고 편한 기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태한 기도생활로 이어져, 이런 저런 핑계로 변명하다가

다른 활동이나 영적 독서로 대체시켜버렸던 때도 많았었다.

 

다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끓어오를 때면

그동안 주님과의 거리를 의식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얼마동안 다시 기도를 하다가 또다시 반복되는 나태한 생활에서

신앙은 늘 제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독서,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도를 <안 하면서> 그것을 기도로 핑계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말 하루 몇 분을 쪼개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현존과 마주하지 못할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 아무 때나 그분을 불러내고

아무 때나 그분을 뒤로 물리칠 만큼 그분을 아무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불러낼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그분의 침묵-하나님의 자율권-에 그렇게나 도전할 만큼

그분을 종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정말 기도를 부담으로 느낄 만큼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닐까?

 

 

 

◑5. 삶이 불행하다고 느낄 땐.. 사랑을 실천해 보세요!

 

음식을 할 때, 단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단맛이 나지 않을 때와

짠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짠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단맛을 더 내고 싶을 때는, 설탕을 더 넣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간장을 조금 넣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단맛이 더 강해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짠맛을 더 내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할까요? 간장을 더 넣는 것이 아니라,

설탕을 아주 조금 넣어보면, 짠맛이 짙어진 것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반대의 것으로

오히려 맛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습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행복할까요?

사실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 점은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는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은

오히려 나를 행복과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더욱 더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것도 나만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더 행복하게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설탕이 아닌 약간의 간장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또한 짠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간장이 아닌 약간의 설탕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아니라 약간의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번화한 거리를 지날 때 늘 볼 수 있는 광경이 있습니다. 분주하게 광고지를

내미는 사람들, 그리고 무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쳐 바쁘게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광고지 대부분이 저와는 무관할 뿐 아니라

괜히 받아서 길거리나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보다 아예 받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사님과 시내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역시나 광고지를

나눠 주는 분들이 진을 치고 계셔서, 저는 더욱 발걸음을 재촉해서 무사히(?)

안전지대로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동행하던 수사님이 보이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그 수사님은 광고지를 주는 대로 다 받아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뭐에 쓰려고 다 받아오세요?” 하고 물으니,

그 수사님은 웃으며 쓸 데는 없지만, 저분들은 자신이 할당받은 광고지를

다 나눠 주어야 일당을 받는데 나라도 받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하며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입장만 생각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멸종되어가는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얻어낸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비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비와 공생 관계에 있는 개미도 보호해야 한다.’

 

이 세상에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지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이웃과 친구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야 나를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그들도 행복하고, 그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이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시다.

 

 

◑6.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위로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어떤 사람이 되던지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그래서 단 한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의 벼랑 끝에 몰려있습니다.

그 누구도 도움은커녕 위로의 말 한마디 던져주지 않습니다.

울다 울다 지쳐 쓰러져도 그 누구도 등 한번 두드려주지 않습니다.

그 결과 최후의 선택으로 자살을 꾀합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에게 전화 한통만 해줬어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와 만나 소주잔 한번만 기울여줬어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물질적 결핍으로 인한 가난도 큰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혹독한 가난이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가난입니다. 소통의 단절고 인한 가난입니다.

영성의 결핍으로 인한 가난입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함으로 인한 가난입니다.

고독으로 인한 가난입니다. 절망과 좌절 끝에 맞이하는 가난입니다.

`

아무리 백만장자라 할지라도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소통의 길이 꽉 막혀있는 무인도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 벽지만 바라보며 드러누워 있지만 단 한 사람도

초인종을 누르는 이가 없다면 그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두 사람, 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영적으로든지, 육신적으로든지

단 한 사람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7. 기도하는 법

 

제가 수도원 들어와서 10년이 될 때까지 저도 기도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10년을 기도해도 그 맛을 몰라

기도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맛을 모르니

어떻게 일생 수도생활을 해야 할 지 암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련을 받게 되었을 때, 기도에 승부를 걸기로 하였습니다.

수련을 마칠 때까지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면 수도원을 떠날 각오로

시간만 나면 성당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성당에서 기도하다 잠이 들었는데

아예 의자에 누워 자 버린 것이었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잠이 들곤 하였고

그러다 깨면 죄책감과 자기 모멸감으로 너무 씁쓰레 했는데

그런데 그날은 왠지 너무도 평온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 품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성인전을 너무 많이 읽어서

기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를 하면 성인들처럼 아무 분심과 잡념이 없어야 하고

즉시 무아지경에 들어가 완전히 주님과 일치해야만 한다는!

 

그런데 성인들처럼 기도해야 한다면

나는 그런 기도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높은 차원의 기도만이 기도라면

나는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기도에도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 주제에 맞는 기도.

분심이 있을 때는 분심을 할 수밖에 없고,

걱정이 있을 때는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나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 사도가 설교하였듯이 (17:28)

우리는 무엇을 하건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분심을 하는 중에도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며

걱정을 하는 중에도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분심케 하는 것이 있으면 그 분심을 주님 안에서 하고

걱정케 하는 것이 있으면 그 걱정을 주님과 의논하며

화나는 것이 있으면 돌멩이한테 풀지 말고 주님께 풀면

그것이 곧 기도이고,

그것이 그때 내가 가장 진실하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사랑을 하면 무엇을 하건 그 사람을 떠나지 않듯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하건

그분 안에서 하는 모든 것입니다.

 

 

◑8. 언제나 청춘 (용혜원, ‘지하철 사랑의 편지중에서)

 

롱펠로우는 지금까지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미국의 시인입니다.

롱펠로우는 하버드 대학에서 근대어를 가르치며 낭만적인 사랑의 시를 써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롱펠로우의 머리칼도 하얗게 세었지만

안색이나 피부는 젊은이처럼 싱그러웠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롱펠로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군. 그런데 자네는 여전히 젊군 그래. 자네가 이렇게 젊은 비결은 뭔가?"

 

이 말을 들은 롱펠로우는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를 보게나! 이제는 늙은 나무지. 그러나 저렇게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다네.

그것이 가능한 건 그래 봬도 저 나무가 매일 조금이라도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나이가 들었어도 매일매일 성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네!"

 

겉모습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 과연 성형수술에만 있을까요?

언제나 청춘이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면 겉모습 역시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임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