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정한 인생 약5:7~8 2014.06.08.설교스크랩
◑약5: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좋은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요? 참을 수 없는 고통도 있지만
그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그 고통을 견뎌야 하는 시간의 길이입니다.
랍비 하야 바 아바는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오."라고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난 그렇게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단숨에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고문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군사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고문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불에 달군 쇠공을 죽을 때까지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두는 고문을 가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우리에게 오랜 인내를 요구한다면
우리 역시 그 대답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가장 힘든 일은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그 결국의 좋은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여행을 하다 한 마음에 들러 여관을 찾았지만 어디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들판으로 가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는 닭과 당나귀 그리고 양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졌고, 고양이가 와서 닭을 잡아먹었습니다.
사자가 달려들어 당나귀를 삼켰습니다.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것이다."
같은 날 밤 도적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마지막 남은 그의 동료인 양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우리 모두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어려움과 그것에 대한 공포는,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도록 만들고 좌절하도록 만듭니다.
그 어려움과 공포를 이기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과제라는 것을
평소에 우리들이 늘 기억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심성은 쉽사리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품 역시 쉽게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인내는 꼭 필요한 보약인지도 모릅니다.
쓴 맛이 몸에 좋다는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쓴 맛이 싫어서 쓴 것을 먹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육체를 위한 보약은 안 먹어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보약이라 할 수 있는 인내란, 반드시 견뎌내야만 하는 신앙의 과정입니다.
▲시편을 보아도 우리는 이스라엘이 쉽게 원망과 불평과 낙망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편들을 '애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애가'는 전체 시편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애가들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 시작한 원망과 불평과 낙망이
후반부에 감사와 찬양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기에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불평할 수 있습니다. 낙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좋은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으라. 끝까지 견디라. 인내하라.
야고보서 서두에서 야고보 사도는 무슨 시험을 만나든지 온전히 기뻐하라고 하면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많은 부분 견디는 일로 이루어집니다.
제 아내도 제게 늘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자신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그리고 저희 교회가 가는 방향이 옳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대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어냐는 것입니다.
또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있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저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앞으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지,
주님께서 과연 우리를 위하시는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구원을 약속 받았지만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대부분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약속을 붙들고 견뎌내야 하는 일상의 시간들로 채워집니다.
그 일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지만, 그 참된 말씀이 진실로 참되다는 것을 깨닫기란 그렇게 어렵습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 주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그분의 섭리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앞을 바라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불안합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상태, 그런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긴 시간의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구원이라는 결말은
그 오랜 기다림과 인내의 끝에서 맛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길이 참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견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귀한 열매를 바라며 인내해야 합니다.
반면에 앞서 언급된 부한 자들은 인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불의하고 세속적이지만 귀한 열매를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풍년이든 흉년이든 귀한 열매를 늘 넘치도록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실에서의 삶은 너무도 풍족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힘들게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고, 지루하게 인내하며 비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소작농에게서 정한 수확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혹 흉년이 들어 적게 받을지라도 그것은 다음 해에 더 큰 수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내할 필요가 없는 그들에게
정작 그들 자신에게 필요한 영적 열매로서의 인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재물은 사치와 불의함 속에서 썩어갈 뿐입니다.
이 분명한 대조 앞에서 그러나 우리는 망설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무력한 현실을 너무도 싫어합니다.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너무도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현실의 안락함과 필요의 충족
그리고 한 번 멋지게 인생을 살아보고픈 우리의 욕망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우리의 그러한 욕망의 허무함과 썩어질 세상 재물의 독성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심긴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그 열매를 맺기에 이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짜릿한 인내
하지만 성도의 인내, 성도의 기다림, 성도의 길이 참음은, 그저 막연한 인내가 아닙니다.
그저 덕스럽기 위한 인내도 아닙니다. 성도의 인내는 어찌 보면 짜릿한 인내입니다.
밭에 심어 놓은 농작물은, 농부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무럭무럭 자랍니다.
잘 견디기만 하면 시간은 성도의 편입니다.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쇠락하고 썩어지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반대입니다.
겉 사람은 날로 늙어가고 보잘것없어 (후패해)지지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습니다.
장차 올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참는 인내가 아니라 짜릿한 인내입니다.
그래서 그냥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약1:3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진리의 말씀'(1:18)으로 거듭났으며,
그들의 안에 능히 구원할 심긴 말씀이(1:21)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는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하신 그분께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결국 그들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1:4, 17, 5:11)
처음과 끝이 너무도 확실하고, 그 인내로 품고 있는 내용이 너무도 확실한 하나님 말씀의 생명이어서
그저 견디기만 하면, 자고 일어나기만 해도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듯이 그가 길이 참는 가운데
그 말씀의 생명은 그의 속에서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음을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심긴 말씀의 씨앗도 확실하고, 그 생명을 통해 맺어질 열매 역시 분명해서,
인내는 오히려 기쁘고 흥분되는 설렘 가득한 짜릿한 기다림이 되는 것입니다.
▲농부의 비유는 또 다른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농부의 기다림은 그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렸습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그것을 돌보아줍니다.
싹이 날 것인지 아닌지를 그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땅은 정직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납니다.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싹은 날 것입니다.
비만 적절히 오고, 병충해를 조금만 견디고, 햇살에 익기만 하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 기대는 결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성도의 인내는,
과연 내가 도를 터득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채로
그저 가고 또 가고 또 가야하는 막연한 구도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분이 이미 걸으셨던 그 길을
성도인 우리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속에서 피어나고 열매 맺도록 기다리고 인내하는
살아 있는 소망의 연속입니다.
더구나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안전한 길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능력이 바닥나는 곳에서
오히려 당신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확실한 길인 것입니다.
◑약5:8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결코 외롭지 않은 기다림
'주의 강림하시기까지'라는 표현은 우리의 인내가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보증해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강림'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말에 뒤이어 나오는 농부의 비유 속에서 농부는 씨앗을 심어 놓은 그 땅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기다린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중동 지역의 특징적인 현상입니다.
농사에 필수적인 이른 비가 11월 전후에 내립니다.
그리고 늦은 비는 추수 전인 3~4월경에 내립니다.
이 말은 농부가 최종적인 열매를 기다린다고 하기보다는
그 열매를 기대하면서 실제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라고 한 '주의 강림'은
최종적인 심판의 순간이라기보다는, (으로 볼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임하시는 것을, 오래 견디고 참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인내는 견딜만한 것이 되는 셈입니다. 참고 기다리면 너무 늦지 않게,
너무 지치지 않게, 너무 낙심하기 전에
주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찾아오십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긍휼로 찾아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최종적인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하도록
항상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8절에서도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기대하며, 중간 중간 적절한 때에 비가 올 것을 기다립니다.
항상 쉽게 때맞추어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확신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아주 늦지 않게 적절한 비가 내립니다. 파종 후에 내리고 추수 전에 내려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열매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부의 기다림은 중간마다
위로와 격려를 받는 도우심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씨앗이 뿌려진 후 열매가 맺히기까지 아주 버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인내는 버려진 상태에서 막연히 참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오셔서 모든 일의 결말을 종결하실 것이지만
그분의 임재는 계속 되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형편과 처지에 따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성숙과 온전함과 유익을 위해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도우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오셔서 위로하시고 붙들어주시며 온전한 열매를 맺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의 강림'은 죄종적인 주님의 재림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성도의 최종 목표요 지향점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그 최종 방향을 향해 마음을 정하고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인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단순히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뜻을 정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의 임재를 통해 중간 중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가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뜻을 정한 인생
8절의 ‘마음을 굳게 하라’(스테릭싸테)는 표현은
단지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의미보다는
구체적으로 마음의 방향을 정하고 입지를 확정하여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이 세상에 휩쓸려 세속에 기울고
세상과 짝하여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임하실 주의 강림을 분명히 믿고, 그 방향을 향하여 돌아서서
주님을 따라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 것인지를
마음으로 단단히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지적해 왔던 나뉜 마음이나 두 마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하나 된 마음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며
끝까지 주님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중간 중간 임재 하셔서 은혜로 격려하실 것입니다.
최종적인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시고
최종적으로 주의 강림의 때에 그것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그 방향을 향하여 마음을 정하고,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싸우기를 즐겨하는 정욕(약4:1)으로부터 비롯되는 싸움을 그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을 외모로 판단하고 재판하며 서로 불평하는 다툼을 그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뜻을 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은 드물었습니다.
너무 드물어서 그런 사람들이 기록되어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주변에는 프란치스코를 영적인 스승으로 삼아 그를 닮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과연 움부리아의 작은 예수답게 모든 면에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 가운데 프란치스코처럼 살아가는 분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정한 인생을 살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뜻을 정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믿음이란 망망대해에서 뗏목을 타고 표류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막하고 암담한 상태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염려가 앞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이 말하는 것들을 믿는다면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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