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사랑하신 것같이 나를 사랑하신다 요17:23, 엡3:16~19 출처, 번역
부제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정감 갖기
Zac Poonen / Find Your Security in the Love of God *관련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힘들어하는 가장 근본적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진실로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제 푸닌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저도 역시 그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제게 주님이 주시는 계시(신령한 깨달음)가 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이
나도 지극히 사랑해 주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제 신앙생활은, 가히 혁명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런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보니까, 요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세상이 알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저(예수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우리를 그토록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을
세상이 알기를 원하신다’고.. 그렇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이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우리 '신자들이', 그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은, 하늘의 하나님이, 신자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론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피부로 실감하지는 못 합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 크리스천의 삶을 살면서도, 늘 걱정이 많습니다.
삶에 불안과 초조를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요.
그게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그래서 자기 삶에 염려 없이 사는 신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가르쳐도,
신자들은, 그 사실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현실로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위 본문 요17:23절은, 예수님이 그저 말씀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빈말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영안이 떠지고, 이 진리를 성령의 감화로 확신하게 된다면,
여러분의 삶도, 확연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얼마나 자주, 아니 매일 매 시간
하나님께 불평하고, 아니면 우울증 같이 축축 처지고,
마음과 얼굴에 기쁨이 없이, 늘 어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면,
그 모든 불평과 우울감은, 한 방에 날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제 푸닌에게, 먼저 확실히 일어났거든요!
▶저는 젊은 시절에, 수 년 동안, 늘 우울함에 묶여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게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쇠사슬처럼, 저를 칭칭 감고 있었지요.
그러니 늘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
물론 그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을, 제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도, 현실로는 제가 그 속박에서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던 중 요17:13절이 제 마음 속에 꽂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 주신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이 믿음이 생긴 이후로부터
제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달라진 것은, 제 삶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들에 대한, 제 시각이었습니다.
제 삶에 좋고 신나는 일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신하지요.
그런데 제 삶에 부정적인 일들이 생길 때, 내가 경험할 때
그걸 과연 ‘하나님의 사랑’으로, 제가 과거에는 확신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는, 제 삶에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나를, 예수님만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제게 허락하신 일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삶을 포위하고 옥죄었던
모든 우울감과 침울함에서, 저는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보실 때, 그저 밋밋하게 쳐다보시지 않고,
20억 명의 크리스천 중에 한 명으로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시17:8, 잠7:2, 신32:10, 슥2:8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그 후로 저는, 정말 어떤 환경과 처지를 당하든지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말 바울이 말한 대로, 늘 만족하고,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런 말씀들이, 이제는 제 삶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사랑하십니다!
GOD LOVES ME AS MUCH AS HE LOVES JESUS.”
▶여러분이 금식을 하지 않아서,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승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노력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결정적 요인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승리하는 삶은, 믿음에서 옵니다.
‘무슨 믿음, 어떤 믿음이요?’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믿으십시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보다는,
사탄이 주는 정죄의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금식을 너무 안 하잖아. 기도도 충분하지 못해!
전도도 하지 않고, 성경공부도 하지 않잖아?’ (그래서 네게 이런 모든 불행이 닥친 거야)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이런 식의 ‘자기 정죄 의식’가운데 살아갑니다.
물론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근본적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게 정상이지
‘자기 정죄/ 율법적 정죄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일례로, 자녀가 아무리 말썽쟁이라도
가정에서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개념으로 살아갑니다.
‘부모님이 나를 주워온 자녀로 여긴다. 나는 늘 말썽만 피운다’며 자학하는 것은
자녀의 근본적인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부정적 관념에 사로잡힌 신자는
이제 자기 율법적 공로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기도, 봉사, 전도, 금식, 헌금에 힘을 쓰게 되는데요..
여러분,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 신뢰 관계가 바탕이 된 데서 되어지는
기도, 봉사, 전도, 금식, 헌금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기뻐하시죠.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있으면서 (관계가 멀어져 있으면서)
율법적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해 드리는
기도, 봉사, 전도, 금식, 헌금 등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뭘 부족하신 분이 아니시잖아요.
작은 것 하나라도, 사랑으로 드려야.. 받으시는 분도 기쁘지..
그게 큰 것이라도, 두려움 가운데서 드릴 때.. 받으시는 분이 부담만 됩니다.
또한 그게 근본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괜히 자기만 힘들게 고생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봉사와 헌신 이전에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그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안정감 security !
이것을 더 우선해야 합니다!
<봉사> 이전에, <개인적 친밀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면,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엡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미 회심했고, 성령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령으로 그들의 속사람이 더 강건해질 필요가 있었고,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더 굳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엡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건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안정감이
늘 바탕에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성숙해질수록,
그 안정감이 더욱 뿌리내려지고, 터가 굳어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의 사역이 크게 효과적이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늘 ‘그의 안식 rest 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히4:10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늘 평안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도, 천국의 안식과 평안을 맛보고 사는 것이지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4:3
믿으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4:11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안에서 안정감,
하나님의 안식에서 멀어질/벗어날 수 있는지를, 권고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누군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심지어 일부 교인들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교회를 찾아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떠돕니다.
사람의 본능은, 친구의 사랑, 가족간 사랑을 갈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갈망은.. 결국은 실망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말고, 그 사랑의 갈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한 연인도, 서로 헤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사랑을 퍼부어 주었던 자녀도, 나를 떠나고요.)
그래서 우리들은, 마치 고아처럼,
언제나 불안정하며, 그 결과 자기 연민에 쉽게 빠져듭니다.
자기 스스로 외롭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자기가 자기를 동정합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신자가 회심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과 비슷하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래서 불안정한 감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를 사랑하는데도
그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으니까,
그것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너무 짧아서..
그 은총을 못 누려서.. 불안정한 감정과 느낌, 그 현실 가운데 불쌍하게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될수록,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깊어질수록,
억지로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초가집에 살아도, 강한 확신이 생기면서,
그 사랑 안에서, 현실 생활의 안정감/평안함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너희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
우리는 그걸 다 세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걸 세실 정도로, 우리를 깊이 관심가지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그 숫자가 얼마나 많으냐. 그들도 다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 숫자가 셀 수 없이 많아도, 그들을 다 입히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돌보신다는 뜻이지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다른 어떤 성경말씀보다도, 이 한 구절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십시오. 내가 정말 확실히 믿게 될 때까지요!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아들에게 주시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이것은 영적인 부요를 먼저 말씀하지만, 육신적인 필요도 그 속에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실망과 불안을 조성하시는..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우리를 믿음으로 더욱 성장시키시기 위함이고,
그 일환으로, 무엇보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사람이란 우상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간절히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의 종 안 되었으면, 부자집 아들로 살았을 사람이
주의 종이 되고 나서, 쫄딱 망하고 가난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을 의지 말고, 부모나 다른 사람을 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라’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자신해서, 자기 전 재산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릅니다.
자기는,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겠다는 프라이드인데요.
뺏기기 전에, 먼저 자진 반납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물질’ 외에,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라고,
다른 우상이 될 만한 것들, 다른 의지가 될만한 것들은, 다 빼앗아 가십니다.
나중에, 그 우상에서 자유하게 될 때는
다시 돌려주시고, 또한 더 채워주시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계속 실망시키는 상황으로 몰고 가시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당신을 더 강한 용사로,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도와 용사는, 어떤 세상 이유식도 다 떼야 됩니다.
성도와 용사가 사는 방식은 ‘오직 믿음으로’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렇게 ‘오직 믿음으로’ 사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안정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완전한 안정감 security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신자들 가운데
서로 경쟁심이나 질투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나보다 사역이 좀 더 잘 되거나, 경제적 상황이 더 낫다고 여겨지면,
그 자녀가 좀 더 잘 풀리는 것 같으면,
쓸데없는 경쟁심이나, 질투심이 생기는데..
이게 다 “불안정감 insecurity”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안정감을 누리며 사는 성숙한 성도는,
자기 주위의 사역자/신자가 잘 되고, 잘 나가는 모습을 볼 때
전혀 경쟁심이나, 질투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칭찬해 주고, 격려해 게 주고, 같이 기뻐해 줍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자산이 너무 확실하고 든든하기 때문에,
남의 자산/남의 은사/남의 유업을, 탐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왜 일부 신자들은, 끊임없이 주위 형제 자매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쓸데없이 경쟁합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위의 형제 자매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게 믿어져야 합니다. 억지로 믿는 게 아니라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에 늘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 지는 만큼,
그 하나님의 ‘구원 창고에 수북이 쌓인 보화’들을 많이 찾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정감’ - 그게 그 보화 중에 한 가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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