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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랑은 서로 이해하는 것

LNCK 2014. 12. 8. 13:52

 

삶과 사랑은 서로 이해하는 것           13:10-17             스크랩

 

거의 설교 되지 않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13:10-17

 

   

삶과 사랑은 서로 이해하는 것! (정용철, ‘초록이야기중에서)

아무도 삶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삶을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며 성숙해 가는 것은, 서로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서로의 삶을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누군가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아픔을 알기에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해하는 것이 삶과 사랑이라는 것. 이 아침에 크게 와 닿는 말씀이네요.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

 

본문에서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여인의 병을 치유하십니다.

당연히 회당장은 분개하고 사람들에게

1주일에 안식일이 아닌 날도 많으니 다른 날 치유 받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회당장은 나무랄 데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 사람이고,

그의 말대로, 굳이 안식일을 어겨가면서 고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옳고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 안에

예수님께서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법은 보는데..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잘못은 보는데.. 고통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안에 사랑과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자비하다고 하면

즉시 보통 잔혹한 살인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심성이 그렇게 잔혹하지 않아도

 

어떤 이유로건 자비가 없으면, 무자비한 것입니다.

법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고,

합리성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며,

정의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입니다.

 

   저는 올 해의 경구를

   잘못이 아닌 고통을!”으로 삼았습니다.

   올 한 해, 이웃의 잘못을 보기 보다는 고통을 더 보겠다는 뜻이지요.

 

저는 자주 옳고 그름, 즉 시시비비를 심하게 가르는 마음때문에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지나칩니다.

그것은 회당장이 열여덟 해나 앓은

여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의 눈으로 보면 그 열여덟 해의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고통이 그렇게 큰데도 회당장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은 보지 못하고 큰 것은 잘 보는데

여인에게는 그렇게 큰 열여덟 해의 고통이

회당장에게는, 너무도 작은 것이기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고통은 크고, 남이 고통은 작다고 해도

열여덟 해나 앓아온 여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하지요.

 

그런데 어떤 때 우리가 이렇게 너무합니다.

오늘, 너무한 저를 성찰합니다.

 

 

자신에 대한 수치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자신을 짓누르는 병에 시달리던 여인을 보십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감이 컸다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자신을 사랑하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살기는커녕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여, 땅 바닥만 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다른 이와 너무도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이가 자신을 볼까봐, 부끄러운 자신이 드러날까봐

늘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여인이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는 여인이기에, 예수님이 가까이 부르십니다.

여인아, 너 자신을 그토록 혐오스럽게 여기고 쭈그러들게 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며, 땅만 보고 살게 만든 그 병마, 그 생각들에서 너는 풀려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에게 손을 얹는 것은, 너도 나와 같은 귀한 사람이라는 의미란다.

네가 혐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존재라면, 내가 너를 손 대고, 너를 이토록 사랑하겠니?

너는 나처럼 귀하고 훌륭한 존재란다. 너를 병들게 만든 네 생각에서 너는 풀려났다.

 

너는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모상이 들어 있는 딸이란다.

하늘과 땅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딸아, 너도 너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면 좋겠구나.

나의 명령이다. 너는 너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라.”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뒤 여인은 누구보다도, 당당히 허리를 펴고 꼿꼿이 일어서서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병든 이들, 삶에 지쳐 허덕이는 이들,

   스스로 죄인이라는 죄책감에 싸여 하나님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사랑의 잔소리꾼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바울 사도의 말씀은 잔소리가 좀 심합니다.

그것도 당부의 말이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라.

-하나님을 본받아라.

-사랑 안에서 살아라.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우리 형제들 중에, 참으로 잔소리가 많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좋은 얘기는 다 쏟아놓습니다.

 

듣기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첫째는 좋은 얘기이지만, 너절해서 지겨웠습니다.

다 좋은 얘긴데, 이 얘기 저 얘기 많아지면 왜 너절해지는지

그 심리를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둘째는 한 두 마디 짧게 얘기해도 다 잘 알아들을 터인데

못 믿겠기에 그리 하는 것 같아, 불쾌감도 늘 들었습니다.

 

셋째는 지겨워하고 불쾌해 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그 무지스러움을 이해할 수 없어 불만스러웠습니다.

 

넷째는 그 많은 좋은 얘기를 다 실천할 수 있을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나이 먹은 지금 그 형제의 사랑이 고맙습니다.

지겨워하는데도 괴의치 않는 그의 꿋꿋함이.

싫어하는 걸 눈치 보지 않는 그의 순수함이.

그 많은 얘기를 해주고 싶은 그의 열성이.

 

옛날에는 얘기해주지 않고는 주체치 못할 정도로

좋은 얘기를 많이 담고 있는 그 형제가 욕심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성인이 되어가는 그 형제의 늙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왜 이 형제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앙과 죄는 병존할 수 없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일단 딱딱한 나무를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게 자르든지 삶아서 찌던지(한지를 만드는 경우) 부스러뜨리는 과정이 가장 먼저 요구됩니다.

 

어떤 종이를 만들던지, 먼저 나무의 딱딱한 성질을 죽여 부드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워야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표백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보통은 약재를 첨가하여, 나무의 고유한 색이 빠지도록 만듭니다.

 

대부분인 부드럽게 부수는 작업과 표백이 동시에 반복되며 여러 번 진행됩니다.

그리고 아주 희고 잘게 부서졌다면, 그것들을 다시 원하는 모양의 종이로 모아서 찍어내거나

한지와 같은 경우는, 채로 걸러내어 물을 빼 냅니다.

희고 부드러워져야만 , 원하는 종이를 만들 수 있는 단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하시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잘게 부수어

   순종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드시고

   깨끗하게 하시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였다면 죄는 빠져나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아직은 그분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요일3:6. 8

 

물론 바리새파들과 율법학자들이나 대제사장들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깨끗함은 위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분을 받아들이려는 목적이 아닌, 속세의 목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님이 거지 아이들을 데려다 키울 때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들면, 예전에 입던 몇 년 동안 빨지 않은 옷을 입어보라고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살았는지를 깨닫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만나면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두 가지, ‘항상 감사하고 죄를 멀리하라는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닌 믿음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행위가 따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죄가 병존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시에 있는 링컨의 기념관은 국회 의사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기념관 안에 링컨의 좌상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조각가 죤 보그룸의 작품입니다.

그가 링컨의 좌상을 만들 때의 일화가 전해집니다.

 

조각가 보그룸이 땀을 흘리며 큰 바위를 두들깁니다.

그리고 매일 그 떨어지는 돌 조각들을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여러 날 후에, 한 덩어리의 바위 속에서 훌륭한 링컨의 형상이 나왔을 때,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묻습니다.

 

어떻게 이 돌에서 링컨의 형상이 나왔습니까?”

이 돌 안에 링컨의 형상이 있음을 믿고

그 링컨의 형상이 아닌 모든 부분을 다 없애버렸더니 이렇게 나타났네요.”

 

그렇습니다. 무언가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형상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죄가 사라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저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났다면, 죄는 다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선과 악이 병존하는 신앙은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성체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과 죄는 병존할 수 없음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내가 죄를 지어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우리 안에 생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