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분노를 그들 위에 부으소서 시69:1~36 스크랩, 출처보기
John Piper / Pour out your indignation upon them / June 22, 2008
※주제를 요약하면, 저주 시편 69편은
1. 다윗의 대적들이 받을 저주에 대한 예언이거나
2. 오실 그리스도(또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며, '개인 감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주 시편'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그래서 신약에도 인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는 그것을 '자기 개인 감정 표출'에 대한, 성경적 정당성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예언'은 될 수 있겠지요!
◑저주시편 Imprecatory psalms
성경에는 저주시편이 여럿 있습니다.
이름을 그렇게 붙이는 것은,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어서인데,
하나님의 원수들이 받게 될 저주, 심판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저주 시편"을 문제시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따라서 "저주 시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바와 상반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본문 시편 69편은, 대표적인 "저주 시편"입니다.
본문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 어떤 식으로 중요한 영향을 주는지.. 이해하고자 애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이 저주시편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그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이 시편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즉, 그들은, 이 시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입니다.
이 연구에 도움이 되는 성경이 시편 69편입니다.
왜냐하면 시69편 중에서, 저주가 담긴 구절이, 무려 7구절이나 신약 속에 인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저주시편 인용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주시편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우리에게 설명하는데,
특히 유용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시편 69편 개관
다윗이 처한 정황은, 그가 원수들로 인해, 크게 놀라서 당황해 한다는 것입니다. 수세에 몰린 것이지요.
그들은 적국의 군대가 아니라, 다윗의 동족 가운데 개인적 원수로 보입니다.
그들은 냉혹하고, 사악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5절에서 인정하기를, 하나님께서 그가 저지른 잘못들을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적개심은, 다윗의 그런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다윗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다윗을 비방합니다.
4절: “까닭도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나의 머리털보다도 많고, 나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자들,
내게 거짓 증거하는 원수들이 나보다 강합니다. 내가 훔치지도 않은 것까지 물어 주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 때문.
다윗이 처한 위태로움의 근본 원인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원수들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
7절: “내가 주를 위하여 오 하나님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나의 열성이 오 하나님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고통은 다윗에게 부당할뿐더러
그는 바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대신해서) 그것을 견딘다는 것입니다. ↙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하나님께서 비난 받으실 때, 다윗도 비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을 증오하는 이들이, 내 삶을 힘겹게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대변하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적용하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대해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들이, 성도들을 미워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탄원
다윗은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14절: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18절: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그리고 이어지는 22-28절은 전부 다 원수들을 향한 저주와 악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원수들이, 즉 자기 원수들과,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속속들이 경험하고, 유죄선고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구원을 기도하기는커녕, 그들을 심판해 달라고 탄원합니다.
22-24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런 다음 다윗은, 하나님께 다시금 구원을 부르짖고, 찬양을 다짐하며 시를 마칩니다.
29-30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중간 정리하면,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다윗 왕을 봅니다.
그는 흠이 있지만 :5, 의로우며 :28,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속량하시고 ransom, 구원하시는 redemption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18
곤고한 이들이 처한 사정을 변호하고(32-33절),
자신의 원수들과 하나님의 원수들의 부당한 박해로 고난 당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비탄에 잠겨 구원을 부르짖는 중에, 하나님께 원수들의 처벌을 구하는 기도가 일곱 절을 차지합니다.
◑신약에 나타난 시편 69편
그렇다면 신약은 시편 69편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신약은 시편 69편을 인용할 때, 본문을 민망하게 여기거나 비판의 시선으로 보는 법이 없습니다.
신약 어디에도 본문 시69편을, 우리가 거부하거나 신경쓰지 말아야 할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윗의 죄성에서 비롯된, 개인의 복수심에 불과하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신약에서 배우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들 시편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신약은 이들 저주시편을, 거룩한 진리로서, 존경과 경의로 대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시편 69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본문을 다윗의 말로 인용하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이 둘을 차례로 살펴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시함으로써, 저 파이퍼는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69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요?
-난폭하고 악한 자들이 처벌받기를 바라는 다윗의 기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1. 다윗의 말로 인용 - 행악자들의 말로에 대한 "예언"
첫째, 사도바울은 로마서 11:9-11에서 시편 69:22-23을 인용합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다윗은 기도 첫머리에서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분노를 쏟으실 것을 구합니다. :24
음식을 달라고 하면 원수들이 독을 준 것처럼, :21
잔칫상으로 인해 그들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보상이 도리어 심판임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길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떨며 전전긍긍하게 해 주십시오.
바꾸어 말하면, 이 기도는 그런 원수들이 정죄와 멸망, 심판 받기를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27-28절: “그들이 주님의 사면을 받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들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 버리시고, 의로운 사람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 주십시오.”
다윗은 그들을 영벌에 처할 것을, 지옥에 두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 저주는, 죄성에서 비롯된 개인의 복수심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반대입니다.
서슴없이 시편69편 저주 같은 말씀을 끌어다
로마서 11장에 나타난 그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 대부분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거부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이르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구약의 여러 성경 중에서 특별히) 시편 69편,
이른바 저주시편을 떠올리고, 그 말씀을 가져다 롬11장의 논지를 마무리 짓습니다.
시편 69편 22-23절을 인용해 로마서 11:9-11을 씁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이 시편의 의미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윗의 말을, 죄성에서 비롯된 개인의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의 대적들에게 일어날 일을 진실되게 표현(예언)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이고, 원수들은 그를 거부하고, 비방하고, 모욕합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 가운데 상당한 인내를 드러냅니다(시편 109:4).
그러나 언젠가 다윗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말하고,
그의 기도로 대적들은 어둠과 완악함에 처하는 때가 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예언하는 까닭에, 그들은 다윗의 말대로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임할 심판에 대한 진지한 "예언", 저주처럼 들리는 '예언'입니다.
바울은 다윗이 내는 목소리는, 그저 앙갚음의 감정이 실린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심판에 대한 진지한 "예언"으로 들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자신의 대적들에게 내리려는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시편 69편을 인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논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메시아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완고해질 것이다."
신약이 시편 69편을 인용하는 첫 번째 측면은 즉,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는 대언자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대적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저주시의 성격 하나를 .. 우리를 풀어내었습니다.)
▲2.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인용 -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예표
신약성경이 시편 69편을 인용하는 두 번째 측면은, 이것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기름부음 받은 마지막 왕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 있을 일을 예시(豫示)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반드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고난 받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을 주는 대적은 나쁜 사람이지만.. 어쩌면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이기도 합니다.
1)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님
요2:13-17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어떻게 성전 밖으로 내쫓으시는 지를 봅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집”이라 하는 것을 듣고, 그들은 시편 69:9을 떠올립니다.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이, 그런 다윗의 고백 속에 예시(豫示)됨을 보는 것입니다.
2) 백성들에게 미움 받으신 예수님
요15:24-25에는, 다윗이 백성들에게 미움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시편 69편을 인용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는 시편 69:4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겪은 일을 알고 계시며, 위 말씀을 자신에게 일어날 일의 예시로 보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적들에게 미움받을 때라는 이 대목은, 내가 겪을 일을 가리키며, 내 안에서 성취되어야할 말씀이구나.
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역사상 가장 중대한 순간에, 예수님은 숨을 거두십니다.
다시금 시편 69편 말씀을 이루기로 작정하시고, 몸소 고난 당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2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을 타서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시편 69편 가운데 사셨고, 이 시편을 전적으로 이해하셨고,
그것을 자기 존재와 생의 일부로 받아들이셨다는 점입니다.
이 외에 요한복음 19:28-30을 달리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는데, 요한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시편 69편을 성취하셨습니다.
시편에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헌사가 주어질 수 있을까요?
저주의 내용 때문에, 우리가 대개 문제시하는 시편 69편은
예수님께서 삶으로 살아내셨으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한 바로 그 시편인 것입니다.
4) 비방을 견디신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시편 69 편을 인용한 실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9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인내로 대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놀랍게도, 여기서 바울은 시편69:9을 떠올리고 그 말씀을 인용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꾸어 말해서, 바울은 그러한 다윗의 기도를 들어서,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사람들의 비방을 견디셨다는 것, 그것에 특히 그의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정리하면
그래서 시편 69편에 관한 주장은 신약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 것처럼 보입니다.
1. 하나는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저주의 내용은 죄성에서 비롯된 개인의 복수심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보응에 대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받을 "고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을 위해 견디는 고난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그의 대적들이 회개하면.. 구원받는 수단이 되거나
-완악함을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에 이르는 수단이 됩니다.
시편 69편은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요?
그래서 한 걸음 물러나 이런 질문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시편 69편을 읽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것인가요?
여기에 세 가지 답이 있습니다.
1.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시69편의 '저주'는 옳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신약에 심판을 선포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말하는, 다윗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 받는 다윗,
회개하지 않는 주님의 대적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갈망하며
그분의 심판이 옳음을 인정하는.. 다윗의 예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정 임할 것이고, 그분의 심판은 옳은데다, 더 나아가 우리가 바랄 일이다.
주님의 대적들이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한 심판의 때가 임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신적인 심판이 임할 것이고,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다윗의 저주시편이 분명히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고 느껴야 할 바가 이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사역을 예시(豫示), 기름부음 받은 자가 받을 고난을 예시함.
우리는 다윗의 말을 예수님의 사역을 앞서 보여주는 예시(豫示)로서 들어야 합니다.
다윗이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겪는 바를
예수께서는 더 위대한 측면에서, 몸소 자신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을 위한 것이자,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그 고난을 자기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위한 고난이요,
그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들이지/이해하지 못하고, 완악한 채로 있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2:4-5)
3. 용서할 수 있는 특권
그리고 우리는 어떻습니까? 위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며, 행해야 할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저주 시편에 나타난 저주를 두고
원수들을 저주할 수 있는 특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시편 69편은 우리에게 그와는 정반대로 행할 것을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로마서 15:3에서 시편을 인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자기부인을 권면하기 위함이지,
보복을 바라는 욕망을 채울 것을 부추기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꾸어 말하면, 인내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는 시편 69편 말씀 속에 진노와 형벌과 심판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심판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이 옳다는 사실을 힘입어,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는 다른 이들로 인해 겪는 고난 중에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고난을 묵묵히 참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9-21)
회개한 사람에게는, "타는 숯불"은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에게 형벌이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옳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즉,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눅6:27-29,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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