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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할 때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

LNCK 2015. 3. 6. 07:53

◈내가 약할 때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    고후1:8~9, 11:23~33       10.11.05스크랩,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L4gmH-iBFwY

    

◑서론

 

▲제가 목회를 마음의 소명으로 갖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고 순종하기로 결정할 때는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주님께 목회자로 충성하는 것이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래서 그때는 굶는 각오를 해야 했었습니다.

 

저희 선대 일제시대에는 죽을 각오를 해야 했었고,

우리 때는 굶을 각오를 해야 했었는데,

그럼 지금 시대는 없느냐.. 아뇨, 지금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이런 각오들이, 조금씩 내용이 조금씩 깊어지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 각오가, 그런 진지함이나 결의, 같은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배웁니다.

오늘 얘기하는 충성은,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면서도 그 정체성을 의심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구원과 은혜를 전했음에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이런 면에서 의심했습니다.

 

당신이 신의 사자라면, 최소한 신과 인간 중간쯤은 되어야지.

그렇게 사람이 여러모로 부족한 형편 속에 있는게 말이 되는가,

하는 사도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가져도 그렇고, 특별히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으면, 더욱 더 의문은 커집니다.

최소한의 남다름이 있어야 하고,

일반 성도들보다는 나은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게, 우리 인간의 당연한 생각인데요..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신앙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깊이 속을 들여다보면 잘 봐 주시지만, 일견 겉으로 보면, 신자라고 특별 대우 해 주시는 건.. 없습니다.

 

   신앙인의 현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동일한 현실이고

   사람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기도의 응답도 시원치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마치 로또 당첨되는 것보다도 어렵다고들 합니다.

 

지금 바울이 하는 얘기는 그겁니다.

'너희가 나를 보고 신의 사자라면, 이 정도는 최소한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것 때문에 나에게 뭐라고 그러는데

그건 두고 봐야 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 안다..

지금은 나도 나 자신을 판단치 않고, 내가 너희보다 우월하다, 세상 사람들이 안 가진 것을 가졌다,. 라는

객관적으로 증거를 갖고 있지도 않고, 또 그럴 마음도 없다.

나는 오직 충성할 뿐이다. 내 길을 갈 뿐이다.. 이렇게 답하는 대목입니다.

 

이게 참 재밌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초월적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신학대학원 채플 설교)

그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또는 특별대우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믿음은, 늘 순종과 인내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순종과 인내라는 것은, 군대에서 다 하듯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며,

인내라는 것은 확인 안되는 길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각오가, '믿습니다' 하고 끝내는 게 각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각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 얘기를 할텐데, 각오의 실제적인 내용을 확인하고나서 '그래도 가야한다' 할 때,

그게 비로소 진짜 각오가 될 줄로 압니다.

 

◑본론

 

▲고린도후서 1장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쉬운 말이면서 어렵습니다. 왜 쉬우냐 하면, 우리는 다 각오하고 있거든요.

예수를 믿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충성을 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니

그런 차원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도 바울 같이 유명한 하나님의 종이

아무런 프리미엄을 받지 않고 그의 사역을 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 고난으로 인도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사실은 대단히 무서운 증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거나 어떤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계속 자기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시련으로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그의 생애를 간섭하셨다면

목회지망생으로서의 우리의 각오가, 말하자면 쉽게 '목숨을 건다, 모든 시험을 물리치고 나간다'라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을 예감하셔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는 문제를 오늘 풀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나이가 되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며 배우는 것은

제가 신앙적으로 성숙하거나 배운 모든 것들은, 실패와 한계를 통해서 배우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인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는

기도에 응답도 주시고, 소원을 성취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바,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또는 신의 성품으로 성숙하는 그 진정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방법을 펼칩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들 중에, 의지가 제일 큽니다.

의지. 야심. 우월감. 이런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적 덕목들,

겸손. 용서. 이런 것들은 어떻게 배우냐면

기도 많이 해서, 신앙이 좋아져서는 배우지 못합니다. 그것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실패와 한계를 경험하지 않고,

여러분이 꺼내놓은 헌신과, 진지하고 신앙적인 이름으로 소원한 것들이라도

다만 여러분이 소원하고 응답을 받으면, 그 근거는 여러분(자기 의)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성품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에게서 가장 큰 증거를 보여주었듯이, 서신서 모두에 이 내용이 배어나옵니다.

우리를 한계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가지는 각오와 충성은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살며, 복음을 위하여 살겠사오니, 이 한 몸 받아주시옵소서' 이거든요.

 

하나님은, 그걸로는 절대 일 안하신다는 거죠. 헌신과 투지만 갖고는 부족하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결의와 의지와 소원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 위에 뭘 쌓은 것이 되어서, 본질을 추적해 들어가면

바친 나, 드린 나, 소원한 나가 그 내용의 근본적인 본질이 되기에

절대 그렇게 안 하십니다. 대신에 우리를 죽여버리십니다. '자기 의'로는 하나님께 안 통합니다.

  

일례로 '용서'라는 것은 어떻게 배웁니까?

제가 배운 용서는, 처음에는 성경이 말하는대로 사랑하기로 해서,

그 마음에 있는 미움을 내던지고, 은혜 받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친 감격으로, 맹수 같은 원수를 부둥켜 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오래 안 갑니다.

이 은혜를 계속 반복해서 요청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그 은혜를 요청하면 마약 중독처럼 약효가 계속 떨어집니다.

처음에 은혜를 입으면 6개월 가는데, 약발이 떨어지면 석 달가고, 나중엔 기도도 안하게 됩니다.

 

제가 용서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보면,

사람은 말이죠, 정답을 얘기한다고 항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느냐면 자기가 한 말이 옳으니까, 내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게 하나 있고

상대방이 하는 말이 옳은데, 그 말에 따를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게 있습니다.

 

사람이란 옳고 그른 것 정도로 항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감정이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정이 움직였다고 해서 평생 가는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후회하는 감정들 많습니다. '그때 내가 왜 괜히 울어갖고 병신됐나,.' 누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 인격이라는 것은, 나중에 보면 영원한 우리의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성품으로 고정되는 것인데,

들락날락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뭘 배운다고요?

우리가 용서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를 배우는 데서부터 용서가 나가지,

용서가 '자기 힘'이 되어서, 용서가 쓰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남의 말을 안 듣듯이, 상대방도 내 말을 들을리가 없다는 걸 배워서

논쟁을 중단하고, 화내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누가 요즘 고집 부리면, 가만히 웃습니다.

'지가 성질 부리다 언젠가 그치겠지, 그 때 보자' 이겁니다.

 

상대방이 막 성질 부리면 '그렇구나, 그렇구나'하는 게 최고에요. 그래야 불길이 잦아들지,

'그 무슨 멋대가리 없는 소리를 해' 그러고 맞불을 놓으면, 합동신학교가 다 탈 때까지도 논쟁이 끝나질 않아요.

 

사람이란 희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그를 힘으로 굴복시킬 수가 없는데

하나님은 그 힘을 물리력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고집으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대신에 시간을 주십니다.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것은, 우리의 헌신과 고백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한계를 아는 데로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을 통해서요.

 

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각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내가 누군지 알게 하며, 죄인인 걸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 한다는 것을, 좀더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죠.

 

우린 살면서, 내가 가진 믿음, 소원, 비전, 헌신들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결과되지 않는 현실을 맛 보아야만 합니다.

 

좌절을 겪어야 하고, 그러면 분노하든가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좌절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체념을 한다든가아니면 신앙인으로 걷는 길이든, 둘 중 하나입니다.

 

가장 중요한 은혜는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벗어던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우리는 이런 좌절 속에서도, 결국은 분노와 타협과 체념 속을 맴돌아서

'하나님, 왜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를 계속 묻게 하고 타협하는 나,

체념하는 나, 분노하는 나를 통하여

 

불붙고 집어던지고 속상해하고 쥐어짜고 해서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수만 남는 길로 결국 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늘 이해하는 바 

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서고, 밝은 길로만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자빠지고, 한숨쉬는 일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과거를 회상해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분명한 사건들일 것입니다만

분명한 사건 사이의 긴 날들, 하나님이 여러분을 놓아두고 있거나 간섭하지 않았거나

그 특별한 날들보다 소홀했던 날들은 없었습니다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지 않는, 반복되는 일상과 별 볼일 없는 것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신 날입니다.

 

어떤 한순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시지 않으며

자신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향하여 가지시는 뜻을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당신이 원하시는 눈금대로 고집하시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반응과 우리의 못난 것과 우리의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나중에 보면 한 사람의 신앙적 성숙이라는 것은

보이는 눈금, 우리가 확인하는 식으로 확인된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절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얘기를 하는데, 사도권을 증명하기 위하여, 내가 유익을 위하여 이 길을 걷지 않았다.

이 길을 걸어서 얻은 게 없다. 손해만 봤다. 그런데도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라.

내가 사리사욕을 위해 걷는 길이겠느냐.

 

그러나 동시에 이 문제는 뒤에 뭘로 연결되는가 하면 28~33.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굉장히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치사하게 도망갔다는 거거든요.

내가 고생한 것이,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니다는 거죠.

 

'내가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목숨 걸고 이 길을 온 사람이다, 라고 써먹으려 하지 않았다.

나 잘난 구석 없다. 나 잡히게 되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간 사람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까?

 

그 속에서 사도 바울은, 비로소 하나님이 부른 사람의 내용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더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비로소 가지게 되더라는 거죠.

 

자기가 누군가를 알고, 자기의 한계와 절망과 좌절과 분노와 의혹과 고민과 갈등을 거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자신이 누군가를 알자.

 

자기가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로만, 우리는 누구를 만날 자격이 있고,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과 쓸모없음으로 물러납니다.

자기가 어떤 근거나 내용이 될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에 영웅들이 있습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단 소수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영웅을 세우지만 보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들을 보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이고 별볼일 없는 반복된 현실 속에서

실제로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걸으면서 배우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기대, 배신, 이해, 치사함, 교활, 아첨, 결벽 이런 것들이 현실입니다. 매일 찾아오는 일들입니다.

 

오늘 하루만을 진정한 신자이고 싶다는 결심을, 늘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위치입니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오늘 새벽기도 나오라고, 나를 깨우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 동료들을 깨우고, 멋지게 앞장 서서가서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하고 온종일 하나님과 마주한 것 같이 모든 일을 하리라.. 하는 기대를 갖지만,

 

실제로 현실을 살아보면, 아침부터 일이 어그러져서. 순 엉터리로 가게 됩니다.

이게 반복 경험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배신감을 갖게 되는 거죠.

'내가 이렇게 훌륭한 각오를 했는데도, 하나님 이러시기입니까'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각오하는 게 내 모습이 아니라, 실천하는 게 나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거든요. 둘 사이에 끼여있다는 겁니다.

멋진 각오는 하는데 멋진 실천은 하지 못하는 나,

 

그리고 혹시 잘 실천하면, 그날 하루는 완전히 멋대가리없이 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우습게 보고, '이 훌륭한 내가 이런 거지같은 동료들 속에 있어야 하는가'

그런 교만한 생각이 들고, 또 어떤 날은 자기가 무너진 날, 남이 똑같이 나를 무시하는 험한 꼴을 본다구요.

  

그런데 이게 다 얼마나 꼭 거쳐야 하는 일을 하는 건지 아십니까. 그러면서 매일 다듬어지는 거예요.

그 속에서. 기대와 배신, 허탈. 참담. 타협..

몇 번 지나면 그 다음부터 아무 때나 웃죠. 빙긋 빙긋.

'다 그런 거야. 다 해봤어.'

그런 나날들이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실은 바로 앞에 제가 설명한 배신감, 자괴감, 치사함, 스스로가 싫은 자신이 스스로 싫어지는 분노,

이때 여러분이 강한거라고요.

 

바꿔 말하면. 여러분이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비전이 충만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게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런 기초 위에 서야지 이 기초,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고 만드시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본질적 기초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자기가 누군지 아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셔서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를 붙들어 나를 통해 일 하시겠다는 것이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하고, 여러분이 성공하면 금방 망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합니다. 여러분이 약한 지금

하나님이 가장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준비를 하시는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멋있는 사람이 되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은 웃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 가장 감동적인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웃음이 있어야 한다."

 

웃음이란 인간이 자신과 동료들의 한계를 넘어가주는 것이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약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명분과 옳다는 것을 얘기할 때마다 사나워집니다.

 

사람보다 신념과 신앙이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의로우심을, 우리가 아는 의를 뛰어넘는 의로 찾아오는 겁니다.

옳고 그른 것을 뛰어넘어 오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고칠 수 있는 분이니 안 웃으셔도 되지만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고칠 수 없고 자신을 고칠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대하여 실수와 멋 없음에 대하여 웃어야 합니다.

낄낄대라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여유를 가지고, 멀리 보라는 뜻이죠. 

 

웃을 수 있는 능력은, 기도에서 나오지 않고,

여러분 자신이 누군가를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으로 훈련받아 알게 됩니다.

 

누가 각광을 받고, 보상을 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나를 이렇다 저렇다고 얘기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라서 나오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그날까지, 우리는 서로를 판단할 필요,

다만 능률과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하여 허락된 길들입니다.

 

'나에게 보여지는 어떤 부족함들, 미심쩍은 것들 그것도

지금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신비한 손길이라고, 나도 그것을 안다. 그러니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로마서 5장에 가면, 이 일을 상당히 일찍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5:1~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영광을 약속받아 소망 가운데 걷게 된 우리의 인생과 존재가

어디로 인도되느냐 하면.. 환란으로 인도된다는 겁니다.

 

환란은 이미와 아직 사이를 걸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가지는 것일 겁니다. 당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이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를 이루신다는 겁니다.

인내란 경험이란 뜻을 가진 표현입니다. 우리는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과 우리 안에 이루시려고 하는 것들을 우리가 얻기 위한 경험들입니다.

 

계속 얘기한 것 같이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이며

그것이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를 연단시킵니다. 진정한 정금으로 제련될 것입니다.

훌륭해집니다. 훌륭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고로 가지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능적이지 않습니다.

우린 이러한 현실들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우리 자신의 개인 신앙 과정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그 가르쳐야 하는 내용, 하나님이 약속한 내용과 그 내용이 만들어지는 과정, 현실을 소홀히 합니다.

 

날개를 달고 다 날아오르자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신다구요.

바울은 날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를 죽음 앞에 직면케하는 길로만 이끄십니다.

평생을 맞고 터지고 뭔가 되는 일이 없었던 인생을 걸어야만 했던 사도 바울의 인생에

자랑. 의미. 진정한 하나님의 신비를 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바울과 비교하십시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들로 인하여 흔들리지 마시고,

여러분 각자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 기적의 손길. 그 하루하루를 사십시오.

 

여러분의 치사함과 유치함과 그 소원의 단순함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하루하루를 사십시오.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사람이 되십시오. 어떤 사람?

 

내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을 더 깊이 알리시고 나를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시키신다.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그 각오를 하십시오.

 

날아오르려 하지 마시고 박박 기십시오. 우리는 다 보병입니다. 우리는 비행기 타고 날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증언입니다.

이제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그것보다 더 강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없나니,

하나님의 신비며 능력이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