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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나귀 타신 예수님을 환영하는가?

LNCK 2015. 3. 30. 10:48

나는 정말 나귀 타신 예수님을 환영하는가?               11:7, 마21:9                    스크랩

 

 

 

1. 나는 정말 나귀 타신 예수님을 환영하는가?

 

2013년 실시된 의정부교구 신자들의 신앙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묻는 질문에

건강’(43.5%)가족’(33.5%)이라고 응답한 분들이

종교(신앙)’이라고 응답한 신자(15.6%)보다 월등하게 높게 나와서 충격을 줬습니다.

 

저는 과연 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 생각하고 있을까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맞이한 군중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11:7

요한복음에는 어린이란 단어가 없지만, 공관복음 전체는 어린 나귀로 표현합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놀라고 흥분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이 사건 직전에 많은 유대인들의 무리가

예수님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자로를 보려고 모여들었다라고 했습니다. 12:9~11

 

그들은 죽은 이를 일으키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며

떡과 포도주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희망의 왕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능력을 지닌 예수님이 멋진 말이나 병거를 타고 오셔야 하는데

농민들이나 이용하는 보잘것없고, 볼품없고 나약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겸손과 사랑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9:9~10

 

다시 서두의 신앙설문조사로 돌아가 봅니다.

오늘날 신앙보다, 건강이 우선이고, 가족이 우선이고, 직장이 우선이며

신앙은 그저, 내게 소중한 건강/가족/직장을 잘 되게 하기 위한 수단 쯤으로 여긴다면,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호산나하며 맞이했다가도,

즉시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친 군중들과.. 어쩌면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열광하다가

나중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외치는 유대 백성들과

나는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고 한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가

배반한 제자들과.. 나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정말 나는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 주위의 성자들을, 혹시 루저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신 문을 조금 지나면, 갈래길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쪽 길은, 점령한 로마 군대의 군단 본부가 있는 길이고

저쪽 길은, 유대교 성전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호산나를 연호하던 무리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로마 부대의 본부가 있는 길로 가셔서,

로마 부대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무찔러 주시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도, 절반 이상 섞여 있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 뜻이, '우리를 구원하소서 save us'입니다.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 구원'이 그 일차적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로부터 구해 달라는 뜻입니다.

 

'호산나'에 이어지는 '다윗의 자손이여' 이란 말에서,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지지요.  마21:9

'다윗의 자손'이란 '정치적 메시야'를 뜻합니다. 

그러니 군중들이 외친 '호산나'의 의미는, 당시 정황으로 보면 '정치적 구원'을 뜻한 것이, 그 일차적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완전 달리

예수님은 저쪽 길로 향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유대교 성전이 있었고, 예수님은 도리어 성전 청소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컸기 때문이었을까요?

성난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친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기대한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예수님은 구원주 메시야로 오셨기 때문에, 너무나 실망이 컸던 것입니다.

 

2. 인생은 장대높이뛰기

 

어떤 시를 읽다가 시인이 삶을 장대높이뛰기에 비유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이 시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우선 장대높이뛰기는 일정한 거리를 전속력으로 장대를 들고 달려서

적절한 시점에 장대를 바닥에 박고 높이 뛰어서 가로대를 넘는 육상경기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갱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그 가로대를 간신히 넘습니다. 삶도 그와 같지요.

 

시인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나 시련, 그리고 세상의 유혹 등

모두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간신히 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가로대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장대를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대를 놓지 않으면, 절대로 가로대를 넘을 수가 없지요.

이처럼 삶에서도 내가 꽉 움켜잡으려는 욕심을 확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예전에 지하철에서 봤던 한 장면이 떠올려집니다.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당황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시는데,

손잡이를 너무 꽉 잡고 계시는 바람에,

발판이 올라가는 속도와 맞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할머니를 잡고 할머니, 얼른 손을 놔요.”라고 말했습니다.

 

내 삶에서 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만큼은 놓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디딤대로 삼었던 장대를 놓아야

원하는 가로대를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놓아야 하는 것들을 놓지 못해서

더 어렵고 힘들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삶

 

제가 여러 차례 떨어졌다가 간신히 신학교 입학했을 때,

선배님에게 인사차 들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 떠나오던 아침,

선배님은 제게 꼭 필요한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OO! 네가 신학교에 들어가거든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말거라.

신학교는 천사들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저는, 삼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 보았더니, 정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신학교도 인간이, 그것도 죄지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말씀인즉, 고귀한 성직자의 길에서, 결코 인간에 대한 갈등과 상처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하지 말라는 충언이었습니다.

 

어차피 인간이 모인 공동체는 천사가 아닌 죄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도요한은, 우리 죄 많은 인간을 향하여 분명한 가르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요일 1:10).

 

때문에 독일의 저 유명한 신학자인 한스 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실의 교회는 죄 많은 교회입니다.

역사상 교회의 모든 그릇된 결정과 그릇된 발전의 내면에는

항상 개인적인 실수와 개인적인 과오가 있었고,

온갖 불완전한 결함과 기형적 현상, 죄악과 비행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도외시 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떠나 환상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이 아닌 현실, 그 죄 많은 인간의 세상에 오신

겸손과 가난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안고 있는 불협화음과 죄악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특별히 당시 기득권에 안주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 지키기에 급급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악이 만연한 자리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우리도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맞닥뜨렸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에 휩싸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온갖 불평불만 속에 찾고자 했던 것은

이집트에서의 쾌락과 방종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옛 죄악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시기 위해서

악의 대표적 소굴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어둠을 깨뜨리고 오소서, 내 마음 속으로 오소서!

 

   스승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결단코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려던 옛 신앙인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같은 고통과 눈물의 믿음 속에서도 그들의 한결 같은 희망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것을 버리려면 반드시 당하게 될 박해의 조롱을 견디면서도

그들의 한결 같은 믿음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값진 십자가의 죽음과 희생을 닮은 지상의 삶이

구원으로 이끄는 삶임을, 누구보다도 절절히 깨달았기에

그 같은 곤궁과 박해를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장 값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루살렘 입성의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4. 고통은 인생의 숙명이 아니다. 사랑의 순종이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야훼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욕과 수모를 받지만.. 당하지는 않습니다.

 

당하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받아들이면.. 절대 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과 모욕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피할 수 있어도

고통과 모욕을.. 절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고통과 모욕은, 내게 천부당만부당한 것으로 생각했고,

거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결단코 거부했지요.

그러나 살아갈수록..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너무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그저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인생의 종착지로 다가갈수록,

고통의 파고가 더 높은 고통의 바다임을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실상 살아 있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고

   반대로 죽으면 고통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고통은 살아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인생에 다소곳이 순명하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고통을 인생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슬픕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고통을 "당하지" 않고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수난주일, 주님의 고통 사랑을 우러릅니다.

 

 

5. 나귀와 겉옷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사람들이 깔아주는 겉옷을 밟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나귀가 의미 있게 등장하는 첫 구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모리아 산이란,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의미하고, 나중에 그 위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때 희생제물과 나무를 운반하는 역할을 나귀가 합니다.

 

오늘 예루살렘 입성과 같은 장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하여 희생제물이 바쳐지게 됩니다.

 

나귀는 겸손 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임을 당할 하나님의 어린양을 나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귀는

오늘날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르는 역할인 것이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루어지게 하겠고

그 희생의 제물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나귀로서 그리스도를 등에 메고

우리 각자의 성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셔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겉옷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이들이 겉옷을 나귀 위에 얹고    눅19:35  

그 겉옷을 깔았다는 것을 되새겨야합니다.   :36

 

성경에서 겉옷은 자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전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모든 능력을 부여해 줄 때

그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줍니다. 왕상19:19

 

그 나의 전 존재로, 주님이 들어오실 문을 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당신 안에 가득하신 은총으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마음의 성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당신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부터 왕을 맞이할 때는 자신들의 겉옷을 까는 풍습이 있었는데 왕하9:13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 왕이 오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분의 길 앞에 까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버리는 완전한 순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귀에 탄 희생제물로서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모신 성령의 힘으로 내 자신을 내려쳐서

그분의 뜻이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순결한 신부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겉옷을 깔지 않으면, 신랑은 돌아가 버립니다.(아가 5 참조)

그리고 그 겉옷은 파수병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내 겉옷을 깔 용기를 내야합니다. 그러면 신랑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군중들 중에는, 며칠 후에 성난 군중으로 돌변한 진짜 군중(무리)’이 있었는가 하면,

일부는 참 성도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겉옷을 깔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찬양을, 이렇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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