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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안 되는 것이 신앙

LNCK 2015. 4. 2. 09:49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신앙                  계3:14-22                   2015.03.08. 설교스크랩

                                                                                                                 *원제목 : 미지근한 신앙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제까지 대부분은, (돈으로) "사서" 부요하게 하고, 옷을 사 입고, 안약을 발라 보게하라..

그래서 네 믿음을 고쳐라..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했지만,

 

아래 설교는 

"돈으로 사서 그게 되겠느냐, 한 번 사서 해 봐라, 그게 되겠는가! 그건 돈으로 되는 게 아니다"

18절을, 이런 식으로 반어법 적으로,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문맥을 볼 때는, 이런 해석이 더 매끄럽습니다.     

 

 

 

 

 

현대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유사점

 

성령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됐으니 망정이지

일반 수필이나 잡지에 기고가 됐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사회만평이 되었을 것입니다.

 

계시록 2~3장까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맨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7교회의 순서가, 교회의 연대기적인 순서를 반영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사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마지막 시대의 모습을 묘사한 다는 말인데,

그 해석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모습과

지금 이 시대에 모습과는 많은 흡사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풍요함입니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과거 어느 시대에 누리지 못했던 물질적인 풍요함을

지금 이 시대에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뿐만 아니고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은 아마 거기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유사성은 미지근함입니다.

이 미지근함은 신앙의 미지근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 신앙이 미지근하다라고 하지 않고,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라고 했습니다.

 

행위가 미지근하다는 말인데, 신앙뿐만 아니고

모든 면에서 사람들은 확신이나 열정을 결여하면서 삽니다.

 

과거의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든지 연애를 하든지 화끈하게 하려는 성향이 있었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하느라고 바쁘고

그 이외의 일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요즘에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이전보다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예전에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열정은 어디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점잖고, 얌전하고, 조용합니다.

 

-세 번째 유사점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더 이상 구경하러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고, 행사에 식상했습니다.

 

모든 면으로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그런 면으로 냉소적입니다.

쉽게 감탄하지 않습니다. 속지 않습니다.

겉으로 화려한 것에 속으려고 하지 않고, 실속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바라는 신앙은, 어떤 형식이나 겉치레가 아닌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에요. 주님이 계시다면 주님을 경험하기를 바라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는 부흥할 것이고

경험할 수 없는 교회는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물질적인 풍요함에 대한 주님의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도다’ 3:17

 

여러분 우리가 알 것은 인간의 경제적인 발전이든 또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든

이런 것들이, 주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새 발의 피에요.

 

이사야40:15절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물질적인 풍요함을 사모하고 부러워하지, 주님은 감탄하시시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제가 산 이 자동차를 보세요. 주님, 제가 딴 학위를 보세요라고 주님께 아뢨다면

주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실지.. 주님은 그런 것에 별로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나, 주님은 중심으로 그 사람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고 다니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 하는 것은 주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게 다 그것입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중심!

우리는 내가 좋은 옷을 입으면 내 중심에 가련함을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꿰뚫어 보십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는 다 곤고하고, 다 눈 멀고, 다 가난하고, 다 벌거벗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나는 부자다라고 생각을 할수록

우리 중심의 참 모습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차라리 부자가 아니라면 쉽게 인정을 했을 텐데,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아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물질의 올무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곤고함, 가련함, 고독함을

주님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가련한 사람은 여전히 가련하고, 곤고한 사람은 여전히 곤고합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말씀하십니다.

 

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돈으로 이런 것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이것은 풍자적인 말씀이에요.

 

이들이 나는 부자라라고 스스로를 말하기 때문에

주님이 풍자적으로 그러면 네 부유함으로 이것을 사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뜻이지요)

 

불로 연단한 금이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흰 옷이란 거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얼마나 주면 불로 연단한 믿음을 얻을 수가 있으며,

돈을 얼마나 주면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게 돈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돈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부유함의 한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으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

 

미지근함에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추가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

 

이것이 뜨거운 신앙을 바란다는 해석은

20세기에 사는 우리 생각을 투영한 것이지

 

주님이 너희 신앙이 미지근하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내가 너희 행위를 아노니 덥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차라리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만일 우리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찌 차가운 신앙을 미지근한 신앙보다도 더 선호한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사는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는 말은, 우리가 확신이 없이 산다는 말입니다.

 

제가 차를 몰고 갈 때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교차로에서 어디로 갈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 사람.

그래서 파란불이 조금 있으면 꺼질 텐데, 건너가려고 하지 않고

일부러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천천히 가는 사람이에요.

 

또 어떤 사람은 좌회전을 할 것인지, 우회전을 할 것인지

불분명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려면 가고, 말려면 말아야지

갈려는지 말려는지 그게 불분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건 목사님이 성격이 급해서 그래요.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주님은 성급하시지 않지만, 분명한 것을 원하십니다. 분명함!

 

믿음이란 무엇이냐? 분명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은, 확신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반대로 무슨 일을 하는데 미적거리고, 소심하고, 꾸물댄다면

그 사람은 확신이 없는 것이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 중에,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얼마나 있다는 말입니까? 많지 않아요.

-그보다는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하고,

-남이 하라고 하기 때문에 하고,

-남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하고.. 그래서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지근한 것입니다.

 

-차갑다면 차라리 안 할 것이고,

-뜨겁다면 열심히 할 것이지만

-미지근하기 때문에 안 할 수는 없고, 하고 싶지는 않고

억지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당연히 축복이 되지 못하고,

주님도 그것을 기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사회적 비용을 많이 지출하는 분야가 뭡니까?

교육이죠, 교육.

 

그런데 학생들 중에 정말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학생은 극소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되기 때문에 하고,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하고,

-엄마의 등쌀 때문에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지근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엔

목사님,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하기 싫더라도 해야 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에 해야 된다면 뜨겁게 하는 게 낫다.

기왕에 할 수 밖에 없다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누가 너희로 오리를 가자하면 몇 리를 가주라고 했습니까?’

십리를 가주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에요.

오리를 가게 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지만

기왕에 가야된다면 아예 십리를 가주라..

 

그러니깐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인생이 나에게 요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미지근한 삶을 살게 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된다면 내 마음을 다하여 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강요한 일이였지만

예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가신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만일 안 해도 된다면, 안할 수 있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게 바로 차갑든지 더웁든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그리고 안 할 수 있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요.

그리고 안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습니다.

 

차갑든지 더웁든지 하라이것은 신앙뿐만이 아니고

우리 삶 전체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불신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믿는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서구사회의 기독교가 지난 2,000년 동안에 실수한 것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을 제도화하고, 전통화하고, 예식화하고, 심지어 윤리화 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려한 기독교 문명을 만들기는 했지만

사람 속에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Christ is not in them’ 그리스도가 사람 속에 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에요.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 아니에요.

주는 영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들어오십시오,

주님을 모셔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이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내가 너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welcome-어서 오십시오' 모셔드리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이 우리에게 ‘welcome-어서오너라

우리를 영접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인격체이시고 우리도 인격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시지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합니다. 주님은 인격과 인격의 교제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 저와 더불어 먹고 저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이 말은

주님과 우리의 인격적인 교제가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통행이라는 뜻입니다.

 

일방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도 주님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만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인격적인 교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20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누구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자에요.

주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번 주께서 노크하시는 소리를 들으신다면

이미 여러분은 주님의 양이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