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출3:1~4:20 2015.01.11.설교 스크랩, 녹취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
즉 '부르심을 받았다' 라는 의미가 있죠.
두 가지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으로의 부르심> 이죠.
'아버지께서 너희를 내게로 이끌지 아니 하면, 그 누구도 내게로 나올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고, 판단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나를 믿음 가운데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게 되었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향하여 부르신 고유한 부르심>이 있는 것 입니다.
요15: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의 모두의 삶속에서 열매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 개개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느냐 하는 것은
개개인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거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이유가 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 사역, 그 열매를 위해서
나는 고유한 부르심을 받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부르심을 확인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덩달아서 가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헌신 조차도,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선택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의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거절해서 거절되면, 그건 "부르심"이 아니죠.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콜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잡아당기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잡아당기시는데, 만일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데 성공했다면,
하나님의 권위가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오묘하심이 뭐가 됩니까?
자기가 끝까지 버티고 불순종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결따라 사는 것이 쉽고, 거스르는 것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끝까지 버텨서 버텨지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 입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보니까, 고국에 계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런 소식 듣자마자
곧바로 공항에 가서 한국으로 가는 그런 성도들도 봤어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부르심, 거역하거나 거절할 수 없는,
나의 거절과 나의 불순종 조차도 뛰어 넘는
우리가 불순종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순종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내가 아무리 거절하고 거역해도, 하나님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든 반드시 순종하고야 말게 하시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 이라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깨닫고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속에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고려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이 일을 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시 하는 두 가지 요소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할 뜻이 있느냐,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두 번째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이 두 가지를, 직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 일을 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능력도 상관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대게는 준비되지 않는, 그리고 능력이 없어 보이는,
그 일을 할 자격이 없어 보이는,
그런 의사와 뜻도, 헌신된 마음도 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만 하나님이 부르시도록 기다리셨다면,
온전히 헌신된 사람들이 나오도록 하나님이 기다리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구 종말까지 기다리셔야 될 겁니다.
그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잘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 사람들만 부르셨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부적절해 보이는 사람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일하시는 경우가 성경에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을때,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셔서 창대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면,
아이를 잘 낳는 아내를 둔 남자를 고르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논리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계획과 정반대되는 조건을 갖춘,
능력이 안 되는 그런 사람을 부르셨다는 거지요.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실 때
기드온은 겁이 많았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그는 밀을 타작 하는데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숨어서, 몰래 밀을 깔 정도로, 겁이 많았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그 소심한 겁쟁이 기드온을 부르셔서
'큰 용사여!'라고 칭하시고,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전혀 '큰 용사'가 아닙니다. 그는 아주 소심한 겁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큰 용사로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를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신 선지자로 부르셨는데,
그 니느웨로 가장 가기 싫어하고, 니느웨를 가장 미워하고, 니느웨를 받아 드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요나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백성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니느웨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누군가? 이렇게 살펴보시다가 고른 사람 같아요.
니느웨로 가라했지만 다시스로 가고,
또 니느웨가 삼일길이나 되는데, 하루길만 걸어가면서, 그 멸망을 예언했죠.
삼일길을 어쩌면 지름길로 하루 만에 가면서, '하나님께서 이 니느웨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것도 큰 소리로 안 외치고, 조그맣게 얘기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멸망 시킬것이야. 멸망시킬 것이야’
근데 어떻게 옆 사람이 듣고, 그 소문이 퍼져서, 성 전체가 변화 된 거예요.
근데 니느웨에 가서 열심히 40일 동안 전했기 때문에, 니느웨가 변화된게 아닙니다.
그는 하룻길만 지나고, 언덕에 올라가서 '니느웨가 어떻게 멸망하나 보자'
그렇게 구경할 마음이 있었던 그런 사람이죠.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말을 유창하게 못했겠죠.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그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도
그들이 묵상했던 것은, 예레미아를 통해서 주신 그 말씀이었습니다,
다니엘을 변화시킨게, 그 예레미아를 통해서 주신 기록이있어요.
다니엘이, 그 예레미아서를 말씀의 기록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았죠.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살인자요, 핍박자였죠.
그를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을 보면, 그가 그 일을 할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그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고려 요소가 아니라는것,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신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선택을 뛰어 넘고,
우리의 능력을 뛰어 넘고, 또 우리의 뜻과 의사도 뛰어 넘으시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시편 32편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그것들은 아는 게 없고,
재갈과 굴레로 제어하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 않는다”
우리는 고집센 말이나 노새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진짜 부르시면, ‘하나님, 제가 정말 원하는건 이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짜 저를 부르시네요.’
그렇게 우리는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인도자요, 구원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4장을 통해서 보면,
모세는 5번의 변명과 회피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 우리가 피해서 피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내가 내려놓고 싶어서 내려놓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잘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해요.
잘 내려놓는 훈련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지요.
물론 우리가 마음속에 하고 싶은것, 내가 헌신하고 싶은 마음,
그거 자체가 다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죠.
내 마음에 있는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부르심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내가 하고 싶은게, 너무 큰 나머지
정말 하나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 소원과 뜻대로 가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죠.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동기생 한 명이, 언제나 기도실에 내려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거예요.
시험 볼 때도 내려가서 기도하고, 근데 그 기도하는 표정이 밝지 않고 힘들어요.
뭐가 그렇게 힘든지. 근데 그 마음속에 그런 기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신학교까지 왔는데, 왜 제가 이렇게 힘듭니까?'
그렇게 계속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거예요.
무슨 응답을 받았냐?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내가 언제 너 불렀니?’
하나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하고 싶어서, 그 길을 택하고 힘들다고
하나님 앞에 한탄하고 아우성하는 거예요.
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내가 하고싶은 일과/ 하나님의 소명을 잘 구별할 줄 아는것!
이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참된 인생의 길을 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부르심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죠. 출3:10절입니다.
“그러니 이제 너는 가거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로 보내,
너로 하여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할 것이다.”
이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네 가겠습니다.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번의 질문, 5번의 변명을 통해서, 이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겸손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이기에 나 같은 자를 하나님이 부르십니까?'
그런 겸손의 고백이라기 보다는 회피성, 도피성, 변명의 거절의 질문들 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5번의 회피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해 주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과 어떤 개인의 대화에 길이를 보면, 이 대화가 가장 깁니다. 가장 긴 대화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모세가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또 대답하시고,
이렇게 주고 받고 하는 5번의 대화의 싸이클이,
출3장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긴 대화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을 보면,
정말 우리 하나님이 인내가 많으시구나.. 알게 됩니다.
‘가라면 가지, 무슨 말이 많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변명인줄 알고서도, 하나님은 인자하게 대답해 주세요.
하나님은 권위주의적으로 그렇게 몰아 부치시는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때로 질문을 하고, 때로는 도망가려고 하고, 때로는 회피하지만,
하나님은 적절한 이유를 설명해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그런 자상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변명하려고, 5번의 질문을 던졌지만,
그 질문 하나 하나를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대답속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아주 중요한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1. 첫 번째, 모세의 회피하는 질문이죠. 그는 이렇게 회피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제가 도대체 누구라고 바로에게 간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출3:11~12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는 ‘내가 누구입니까?’라는 자기 정체성의 질문을 던졌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적어도 한번 이상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기 정체성의 질문을 덛지게 됩니다.
이 질문을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길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는, 나 자신을 파헤쳐봐야 깨닫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내가 세운 계획으로 깨달아 지는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는 이런 인생을 살겠다 그래서, 그 인생의 목적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분의 부르심을 깨닫고 순종해야만, 우리는 나의 인생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다는 거죠.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누구이기에" 라고 질문하는 모세의 질문은
아주 우리에게 유익한 질문인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때로 그런 회의가 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것은 마치 동상, 깎인 돌로 만들어진 이 동상이
진짜 살아있는 인간으로 되는것 같은 큰 변신이다."
그냥 살기 위해서 살고,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것 같은 인생, 동상과 같은 인생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생기가 불어넣어지는, 그런 인생의 목적이 살아나는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거죠.
모세는 40세때 자신의 혈기로, 자신의 성급함으로 살인을 했고, 도망자가 되었고,
이제 80세까지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첫 40년 동안 그는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건가?' 그런 생각 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겠다고 했을때,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본거예요.
'내가 누구이기에? 나는 누구인가?' 그 말은 할 수 없다는 거죠. 나 자신을 볼 때,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제 나이 들었고, 이제 목자의 생활을 너무 오래했고,
내가 어떻게 바로 같은 존재를 내가 감히 상대한단 말입니까?
저는 왕궁에 돌아갈 수도 없고, 나는 상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볼때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속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나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하게 되고, 실망하게되고, 낙심하게 되고, 비교하게 되고,
우리는 포기하게 되는것이죠.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때만
내가 누구인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렇게 자상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12절에 말씀에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와 분명히 함께 할것이다.
내가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고나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
이것이 내가 누군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라는 거예요.
내가 누구인가 철학책을 탐독하며, 아무리 파헤쳐봐야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는거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철학자들이 설명해 주는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것 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사실은 내가 깨달을 수 없어요. 내 인생의 목적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그 목적을 가르쳐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정확한 대답이예요. "내가 분명히 너와 함께 할것이다."
이 첫 번째의 대답에 이어서
▲2. 모세는 두 번째 질문을 덛집니다.
그는 논리적으로 아주 연관성이 있는 그런 질문을 덛지고 있어요.
모세의 질문은 그 막 내밷은 질문이 아닙니다.
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너와 분명히 함께 할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아 나와 함께 하신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보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질문하면, 내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모세는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라고 할 때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 3:13
하나님은 너무나 자상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14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I AM WHO I AM,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이렇게도 번역이 되죠.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말씀을 번역하려고 많은 번역들이 나오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들이 많이 나오죠.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샬롬, 여호와 이레..
이런 하나님의 이름들이, 다 우리들의 필요에 맞춰 주어졌을 때,
때론 하나님 우리를 싸우시고, 우리를 공급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고치시고,
그런 여러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붙여진 이름이예요.
그런데 그 모든 이름을 합하여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겁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
I AM 사실 이것은 동사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설명할 때 명사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동사로 설명하신 것은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I AM으로만 설명하신것은, 뒤에 어떤 단어를 붙여도 하나님께 해당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혜가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이 지혜가 되십니다. I AM Wisdom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십니다. I AM Power
우리에게 화평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화평이 되십니다. I AM Peace
우리에게 필요한 그 무엇이든간에 우리가 구하시면, 그것을 응답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것이 “I AM THAT I AM”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고, 그 무엇이라도 하실수 있는, 완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엔 응답하지 않고, '하나님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어떤 속성에 대해서, 아무리 우리가 머리로 탐구하고, 책으로 읽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어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갈 때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고 알수 있는 거예요.
머리로는 다 알죠.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다 알죠.
그 머리로 아는 지식을 나열한다고 그래서 하나님을 다 아는것이 아니죠.
진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봐야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거예요.
▲3. 세 번째 모세는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만약 저를 믿지 않거나 제 말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4:1
자 모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약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앞서 염려하는 단어가 '만약'이죠.
하나님 만약 백성들이 저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런 불필요한 염려, 불신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에서 나오는 거예요. 미리 앞서 염려하는 것이죠.
우리의 염려중에 80%이상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라는 통계가 있죠.
모세는 백성들이 나를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백성들 핑계를 대죠.
사실 모세의 상처에서 나온거죠. 그가 40세때 어떤 상처가 있습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때, 그가 중재자가 됐을때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라고 백성들로 부터도 모세는 버림받은 상처가 있죠.
그의 아픈 상처 때문인지, 그는 ;백성들이 나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세가지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첫 번째, 내가 가진 지팡이를 던져 보아라 던졌더니, 뱀으로 변합니다.
뱀의 꼬리를 잡아라 그랬더니 뱀의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로 변했어요.
두 번째로 내 손을 품안에 넣어보아라 넣다 빼니, 문둥병이 발생했어요.
다시 품에 넣었다 빼니 또 깨끗이 나았어요. 이런 표적들을 통해 모세에게 확신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도 너를 믿지 않으면, 나일강의 물을 잠깐 조금 퍼서 부워라 그러면 그것이 피가 되리라.
이런 기적들을 통해서, 이런 표적들을 통해서 백성들이 너를 믿을것이다..
아마 모세의 마음속에는 '아 이런 표적이라면 사람들이 믿을것이다.' 라는 믿음이 생겼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확실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지 않았어요. 이런 표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또 다시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유를 자신의 문제로 가지고 옵니다.
'그런 표적이 있다면 백성들은 믿겠지' 라는 거죠. 모세도 이제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4. 그래서 모세는 다시 네 번째 질문을 자기의 이유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저는 말을 잘 못하는데요'
“모세가 여호와께 여호와여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4:10
예전에도 그랬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후에도 그렇습니다. 저는 말이 어눌하고 혀도 둔합니다”
사실 첫 번째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 온거예요.
첫 번째 '제가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을 했을때,
‘하나님은 네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약속을 주셨죠.
하나님이 함께 하실것이라는 그 대답에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진 거예요.
'나는 말을 잘 못하는데요.'
'내가 너와 함께 할것인데, 네가 말을 잘못하면 내가 말할 능력을 줄것이 아니냐.'
이어지는 11~12절에서 하나님 이렇게 말씀 하시죠.
“사람에게 입을 준자가 누구냐? 네 입에서 무슨 말을 할지 내가 가르쳐줄 것이다.”
'너가 말을 못하면, 내가 말을 잘하게, 잘 듣지 못하면 듣게 할것이다. 보지 못하면 보게 할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할것이다. 너가 지혜가 부족하면 내가 지혜가 되어 줄것이고,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이 되어 줄것이다.'
사도 바울을 보면, 우리는 그가 편지를 많이 쓰고, 정말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자로 알기 때문에
그가 말을 잘하는 설교자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자료들을 통틀어 보면, 사실 사도 바울은 말에 어눌한 사람이였다라는 증거가 나와요.
미국에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였던 조나단 에드워즈, 그분도 사실 이 스피치 능력은 없었다고 알려졌죠.
그가 엔필드 교회에서 설교할 때, 원고를 그냥 이렇게 코 앞에 들고 읽었다고 그러죠.
촛불을 켜고 원고를 읽는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거예요.
말을 잘하고 /못 하고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거에 초점은 아니라는 거죠.
이동원 목사님 설교집에 보니까 이런 간증이 나오더라구요.
어떤 목사님이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는 본받으려고 하면 안된다.
그 분은 선천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라고 자신을 평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명하셨대요. '저는 정말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하고, 수없이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는 거예요.
사실 저도 지금 설교하는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청소년 때까지 제가 제일 두려운게 사람앞에 서는 거였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서 말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 했어요.
지금은 너무 두려움이 없어서 걱정이예요.
정말 저는 확실히 알아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선천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능력을 주시는 거구나.
'내가 말을 잘하기 때문에 사역자로 내가 일해야 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안 부르실 가능성이 더 많아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약한 능력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부르신다는 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의 약하고 무능한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 차이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됩니다.
▲5. 이제 하나님께서 또 다시 대답해 주시는 다섯 번째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드디어 모세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4:13절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그 일을 할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자상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대답해주시니까, 더 이상 변명할게 없는 거예요.
막판에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하나님 보낼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 할수 있는 것을,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는 것처럼 도피하고 회피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겠다고 하지만, 진짜 부르시면,
그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였다라고 도망가는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실 모세의 이 질문은 고민인것 같고, 그리고 질문인것 같지만
자기 불신과 두려움을 겸손으로 치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로 나가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인것입니다.
내가 과연 보낼만한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하는게 겸손인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 순종하지 않는것은 교만이요 불순종이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셨는가? .. 보다 더 중요한것은
"누가" 부르셨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낼 만한 사람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보내는 사람이 보낼 만한 사람이죠.
모세는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보낼 만한 사람인 겁니다. 그게 부르심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진노하십니다.
이렇게 네 번의 질문에는 자상하게 대답해주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다양한 말씀과 표적으로 설득하셨지만, 그리고 모세의 그 마음을 이해하시고, 대답해 주셨지만,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모세가 정신이 바짝들었겠죠. '어휴 이제 해야되는구나. 이제는 다른 질문을 할 수 없겠구나.'
그렇게 하나님은 다루시는 거예요. 더 이상 질문할것이 없는 상황에서, 모세는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도 아론을 붙여주세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14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가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가 너를 보게 되면 기뻐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말해, 그의 입에 말을 넣어 주어라.
내가 네 입과 함께할 것이며 그의 입에도 함께해, 너희가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
'아론이 너의 입(대변자)이 되어 말할것이다. 너가 말을 못한다 그랬지 내가 아론을 붙여줄게.'
근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셨잖아요.
내가 너와 함께 할것이다. 그때는 믿지 않고,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그러다가
아론을 함께 보내주겠다고 하니까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해주겠다는 말은 실감있게 안 받아 드리고,
어떤 사람을 붙여주면 어 하나님 그럼 하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받아드리지 못하고,
보이는 사람의 도움은 기뻐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실 모세오경 전체를 보면, 아론이 모세의 입이 된적이 없어요. 모세의 가시만 되었을뿐 이예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또 모세를 백성들이 배반하는데 앞장 섰지 않습니까?
아론이 대신 말한적이 없어요. 전부 모세가 말했지.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하나님 보실 때는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지팡이를 들고 가라. 그것으로 표적을 이끌어 보여 주어라.' 말했어요.
그래서 20절에, 모세가 나갈 때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4:20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지팡이는 새롭게 받은 지팡이가 하늘에서 떨어진 지팡이가 아닙니다. 마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모세가 양을 치던 지팡이였어요. 그저 평범한 막대기 지팡이 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를 통해 기적을 이르킨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때는 전혀 새로운 무기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또 다른 내가 되는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나, 나의 일상, 내가 쓰던 뭐 어떤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거예요.
나의 손에 있을때는 평범한 지팡이 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내가 부르심에 응답할 때는
내가가진 모든 내가가진 작은 지식도, 내가 가진 작은 물질도, 내가 가진 연약한 건강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그것이 위대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는 모세를 부르셔서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왜 이렇게 원치 않는 일을 끝까지 부르시는 것일 까요? 하나님이 하나님 됨이 더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더 위대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절하고 싶고 또 때로는 회피하고 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이게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저희 교회는 선교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 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 부르심이 달라요.
어떤 교회는 대학생들에게, 어떤 교회는 또 농촌, 어촌의 주민들에게
어떤 교회는 탈북민들에게, 어떤 교회는 다른 소명,
그 교회가 어떤 지역 어떤 위치에 있냐에 따라서 각자 고유의 부르심이 있는 겁니다.
저희 교회는 분명히 선교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요.
하나님은 한 개인도 부르시지만 공동체도 부르시는 거에요.
이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고 나갈 때, 우리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확인하게 되는거에요.
우리 개인의 인생 목적도 확인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복음을 받아들일까요? 그것은 마치 모세가 '백성들이 나를 인정할까요?'
라고 질문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져 순종할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우리의 모습은 다 지팡이 입니다.
저희 교회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드리는 작은 물질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기도와 헌신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오히려 은퇴 이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분명하게 깨닫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직업과 함께 나타날 수 있지만, 직업과 상관 없을 수도 있어요.
어떤 모습이던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평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지속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 넘어서까지 지속되는 겁니다.
나를 통해 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후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계속될 수 있는거에요.
이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 앞에, 우리모두가 순종해 나아가는 응답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타자 J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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