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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

LNCK 2015. 3. 27. 08:19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              출5:1~23               2015.03.13. 스크랩, 출처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화작가 정채봉 님의 잠언집의 제목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가진 굴뚝새가, 오늘도 굴뚝에 앉아 시름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 새와 아가 새가 하늘을 날다가, 아가 새가 엄마 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저 새는 걱정이 많은가 봐요.'

   '그런가 보구나. 그러나 걱정은, 결코 먹이를 가져도 주지도, 눈물을 그치게 해주지도 않는단다.'

 

   '그럼, 어떻게 걱정을 해결해요?'

   '너의 발과 날개로 해결해야지.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단다.'

 

   그 때에 아래에서 땅! 하고 총소리가 울리고는

   굴뚝 위에 앉아서 걱정에 잠겨있던 굴뚝새가 땅으로 떨어집니다.

 

비슷한 말을,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바쁘다’라는 것은 일이 많고 서둘러서 어떤 일을 끝마쳐야 하고,

그러다보니 마음과 신경과 행동을 다른 곳에 쓸 겨를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좀 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마음을 쏟아 붓고 있는 대상이나 일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다른 대상이나 일에 마음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바쁜 것인데,

이 ‘바쁘다’라는 말 속에 참 신비한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됩니다.

 

출5:9에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모세의)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라고 바로가 명령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는 말들이 다 가짜이고, 비현실적인 말/허튼 소리로 들리게 하라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모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말이 가짜처럼 되고

비현실적이 되어서, 거짓말이 되느냐?

바쁘게 만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쁘다’는 이야기와 신앙의 상관관계를 오늘 우리가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두에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난다고 하는 바쁜 일 때문에 걱정할 틈이 없다는 것이고, 난다고 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새는 날아야 새입니다.

좀 더 확대 해석하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은 걱정할 틈이 없다는 것이고,

걱정을 한다는 것은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굴뚝새는 나름대로 바쁩니다.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걱정하는 새는 날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둘 다 바쁜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날면서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것도 바쁜 일이지만,

굴뚝에 앉아 하루 종일 걱정만 하는 굴뚝새도 나름대로 걱정하느라 마음이 바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나는 새가 나느라 바빠서 걱정을 못하는 것이나,

굴뚝새가 굴뚝에 앉아서 걱정하느라 바빠서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이나,

둘 다 바쁜 것은 마찬가지이고,

바쁘기 때문에 걱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바쁘기 때문에 날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에 바쁜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바쁘게 사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 굴뚝새도 바빴다니까요.

어차피 사람은 바쁘게 살게 되어 있고, 걱정을 해도 바쁜 것입니다.

 

직장을 못 구해서 한가하게 집에서 뒹굴고 있는 자식은, 한가할 것 같습니까?

마음을 볶이고 있는 것이고, 한가할 틈이 없습니다. 자기 미래의 걱정 등으로 바빠요.

 

그러면 이렇게 바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이 크게 보고 중요하게 보는 일에 바쁘게 됩니다. 시시한 일에 바쁜 사람은 없습니다.

 

제 3자가 볼 때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당사자는 그 일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소중할 정도로 큰일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바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바쁘게 만드는 것들은 문제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우리를 바쁘게 하는 대상의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고,

더 중요한 일에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은 마음을 쏟아 붓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것과 관계되어서만 행동을 하게 되어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바쁘게 하는 문제들의 크기는 어떻게 결정이 되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크다고 생각해서 그 문제에 마음을 쏟아 붓다 보니

다른 문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을 바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부모님과 형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로 인해서

마음이 바쁘고 행동이 바빠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은 생겨날 때부터

스스로의 크기를 결정해서 태어나는 것일까요? 도대체 이 문제들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요?

 

여기에 참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상해요. 원래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들과 그 중에서 나를 바쁘게 만드는 것들이 있는데

가정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직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내 건강문제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 외에도 나라 문제, 환경 문제, 지구온난화의 문제, 에티오피아의 난민 문제, 기아 문제가 있고

온 세상이 문제가 사실로서 많이 있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내 마음을 잡아당기면서 바쁘게 되고,

내가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나 자신의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일까?

 

원래 사실로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은 그 자체로 크거나 작거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운명처럼 본래 크고 본래 작은 문제가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를 바쁘게 하는 일들의 크기는, 그 문제 자체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결정하느냐?

다른 사람에게는 눈곱만한 작은 사실이라도, 내가 마음을 그 사실에 쏟아 붓기 시작하면

마치 풍선을 입김으로 불어서 커지는 것처럼,

내 마음이 쏟아 부어져서 들어가면 그것이 커지게 되고, 커진 그것이 내 마음에 크게 느껴지고 맙니다.

 

이것은, 조그만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서, 크게 만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원래 그 문제가 큰 것이 아닌데, 내가 마음을 집중해서 그 문제에 몰입해서 쏟아 부으면

그 문제가 커지고, 내 마음 때문에 커진 문제인데

 

나는 그 문제를 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문제에 대해서 바쁘게 되고,

바쁘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등한히 하게 되고,

다른 문제들은 사실로 존재하지만, 내 마음에는 느낌이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로 치부되어 버리고 맙니다.

 

돈 버느라고 바쁠 때에 “골프 치러 가자”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들리게 되는 것은,

지금 내가 나가서 어떻게 하든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데,

골프를 치면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고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연애할 때, 연애의 절정에서 느끼는 충만함이 있잖아요.

‘충만하다’는 것은 사랑하는 애인만 보면 마음이 가득 찬다는 것이고,

마음이 가득 찰 때에 나타나는 일은 입이 헤- 벌어집니다.

마음이 충만하면 입이 벌어지고 웃음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마음을 충만하게 하던 여자가, 왜 3년 만에 별 볼일 없게 느껴지고 맙니까?

 

그 상태를 가만히 보면 충만할 때에는 마음이 100% 그 여자에게 몰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그 여자로서 똑같은데 내 마음이 100% 몰입되면, 그 여자가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마침내 결혼을 하는데, 3년이 지나고 보니, 여자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하고 나서 집을 사야 되므로 마음이 벌써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마음이 빠져나간 만큼 여자는 작아지는 거예요.

아기를 낳으면 또 아기 때문에 마음이 빠져나가고,

여자에 대한 마음은 아기 때문에 빠져나간 만큼 쪼그라듭니다.

 

여자라는 풍선이 크게 부풀어 있다가 집이라는 곳으로 빠져나가고,

직장으로 빠져나가고 하면서 점점 작아지게 되고, 집에 가서 보면 그저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가 바뀐 것이 아니고 내가 마음을 쏟아 부으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연애를 한창 할 때에는 바쁩니다. 그 여자와 관계된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비현실적인 일이고,

아지랑이 피어 올라오는 일처럼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직장 나가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데 마음을 다 빼앗기다보니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고, 세상의 전부처럼 보였던 그 여자가

그냥 살림살이하는 아줌마로 보이게 됩니다. 마음을 주어야 매력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쌍꺼풀 수술을 반복하다가 잘 안되니 자살한 여자가 있습니다.

   쌍꺼풀이 잘못되어도 그대로 살면 됩니다. 없어도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거울보고 자기의 쌍꺼풀 문제에 마음을 집중시키니, 그 문제가 태산처럼 커지는 것입니다.

   원래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풍선에 바람을 넣듯이 내 마음을 넣어버리면, 커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이용해서,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비현실로 여기게 만들어버립니다.

오늘 바로가 쓴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3절에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광야로 사흘 길쯤 나가겠다.’

고센에서 사흘 길이면 시내 산 부근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겠다는 요청을 하게 되자,

바로가 화가 나서 요청을 들어주기는커녕, 노역을 가중시킵니다.

 

6-7절에 “바로가 그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기존에는 짚을 주면서 벽돌을 만들게 해서 건물을 지었는데, 이제 짚을 주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재료 자체를 스스로 구해서 해야 하니 일이 힘들어지는데, 예전과 똑같은 양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굉장히 바빠졌습니다. 바로가 겨냥한 목적은

바빠짐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나간다는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이 되고,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로 들리고 거짓말처럼 들리게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방금 연애 절정에서, 아가씨가 상대방의 마음으로 가득 채웠을 때에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하나님 때문에 웃으면서 직장에 나가고, 하나님 때문에 웃으면서 아내를 대하고,

하나님 때문에 웃으면서 자식을 키우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 충만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 있을지 물어봅니다.

 

간단합니다.

마음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보내야,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커지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 마음에 집어넣으면, 커지지만 풍선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큰 것이 아닌데 내 마음이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고, 내 마음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건, 사람이건, 돈이건, 마음을 불어넣으면 크게 느껴집니다.

돈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닌데, 실제로 내가 마음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불어넣어서 크게 느끼더라도

본래 하나님의 크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한 분만은, 아무리 마음을 많이 집어넣어서

그 분이 크게 느껴질지라도, 본래 하나님의 크기에는 무한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집어넣어서 크게 느끼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광야로 사흘 길쯤 나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광야로 사흘 길쯤 나갑니까?

 

출애굽이 일어날 정도가 되려면, 애굽을 초토화시킨 다음이고 완전히 장악한 뒤여야 합니다.

애굽을 장악한 다음에 애굽에서 제사를 드리면 어떻습니까? 누가 방해합니까?

 

그런데 광야로 사흘 길쯤 나가서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광야’는 바쁠 일이 없는 곳이고, 사람이 살 수 있게 일을 할 수 없는 곳이 광야이고,

무엇에 바빠야 할지를 모르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서 내 마음을 빼앗아 가는 바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크게 느껴지기를 원하셨던 것이고,

하나님이 제1의 현실로 느껴지기를 바라셨던 것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사는 사람들이 다 어떻게 살고 있고, 특히 선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바빠요. 무지하게 바쁩니다.

 

   이 세상일이 바쁘다 보니 당면한 세상 일이 크게 느껴지고, 세상 일이 크게 느껴지면,

   하나님을 불러도 본래 복음이 전해주는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으로 내가 바쁘게 종사하는 일을 잘되게 해주는 신이 되어버리는데,

 

   그런 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고, 그것은 그냥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불교에서 불상에 절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충만해집니까?

광야로 나간 것과, 십자가 생활화가 똑같은 효과를 갖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 박혔고, 창에 허리를 찔렸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썼습니다.

생각도 못하고 손도 못 대고 발로 갈 수도 없고 배에는 창이 찔려서 마음에

자기 소원도 없고, 뭘 바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바쁘지 않다는 것이고,

내 마음을 불어넣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불어넣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문제가 있습니다.

한가할 때에 몸이 좀 이상하고 적신호가 느껴진다면

그 적신호가 기어코 내 생각 속에서 암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자꾸 생각하다보면 커지는데, 인터넷을 찾아서 증세를 찾아보고

그 암 증세의 제일 끝에 나오는 1/100확률의 증세와 맞아도, 암이라고 생각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을 하다가도 직장에서 전화가 와서 취직이 되었다고 하면

아팠던 것도 다 잊어버립니다. 다른 현실로 바뀌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내가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가시 면류관을 썼고,

창으로 허리가 찔려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내 마음이, 문제에 대해서 들어가지 않고 있으면,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일이 일어나고,

이 마음이 가는 길을 따라서, 하나님께 마음이 드려지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당장 돈이 없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돈이 없는 것에 마음을 쏟아 붓지 않고

십자가에서 돈 문제에 대해 죽고, 마음이 하나님께 갔더니,

돈 없는 현실보다도 하나님이 더 큰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 충만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꾸 온 세상 가지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바빠하면서

하나님 충만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왜 광야로 사흘 길쯤 끌고 나가십니까?

광야는 세상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이 없는 곳으로 끌고나가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일에 바쁘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붓게 하여서,

하나님이 마음에서 가장 큰 현실로 만들어지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 일이 크게 보이게 하고, 세상일이 자꾸만 마음을 잡아당기게 해서

내 마음을 집어넣으면 넣을수록, 세상일은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문제를 계속 크게 만들라고 합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그게 무슨 이야기냐며,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세상 일이 크게 느껴지는 것이지, 하나님이 비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일들의 본래의 크기는 무엇일까요?

제목이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틈이 없다’였습니다.

굴뚝새는 날지 않고 굴뚝에 앉아서 세상을 보니, 세상 문제가 커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새처럼 우리 마음이 땅에 바쁘지 않고 하늘에 간다면,

그 하늘에서 하나님 품에 안겨서 세상을 바라볼 때의 느껴지는 크기가 본래의 크기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그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이시고, 그 스스로 있는 자가 이 지구와 삼라만상을 만드셨고,

지구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있는 자가, 계시는 하늘에서 보는 크기가 진짜 크기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을 바쁘지 않게 하고, 마음을 집어넣지 않고,

문제가 크게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

마음이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길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품에 안기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세상의 문제를 하늘에서 볼 때에는, 남산 타워나 북한산도 성냥갑 만하게 보입니다.

 

마21:2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태산 같이 느껴지던 돈 문제도 성냥갑으로 보이므로

마음에서 성냥갑을 탁 치워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문제가 다 없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 왜 이렇게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느냐?

누가 키워낸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자꾸 불어넣어서, 애드벌룬처럼 큰 풍선으로 불어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고, 내 마음이 자꾸 흘러가는 것을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마음만 차단시켜도 문제는 작아지기 시작하고, 마음이 안 들어가면 문제가 작아져서

바람 빠져서 쪼그라든 풍선 같아집니다. 반대로 마음을 집어넣을수록 문제는 커집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마음 넣는 것을 차단하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이 현실이고 하늘이 현실인데, 이게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죽은 다음에나 생각할 일이라고 여겨서 마음을 거기에 쏟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기업으로 나의 성공으로 하늘나라가 얼마든지 주어지는데, 다들 이걸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몸에 짊어진다.’

이 말은 몸이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마음에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나는 손과 발에 못 박히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창에 찔리고, 온 살갗이 찢겨나가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누가 아무리 바쁜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세상 것에 바쁘지 않게 되고,

내 마음이 바쁘지 않으면,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그 시간이 지속되고 하늘로 바빠야 하나님이 더 커지시고 더 충만해지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 문제를 보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살아도, 주님은, 세상일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시지 못했습니다.

바쁜 것과 신앙 관계를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로 나의 삶의 환경을 광야로 만들어서,

이 세상 어떤 일에도 바쁘지 않고, 마음을 쏟아 붓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마음이 쏟아 부어짐으로 하나님만이 오늘보다 내일 더 크게,

내일보다 모레 더 크게 느껴져서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하늘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여 주셔서

이 세상 문제들은 문제로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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