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정말 지금 행복해? 창26:26~35 2015.01.09. 설교 스크랩, 출처
창26: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엄마! 정말 지금 행복해?’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아주 잘 나가는 분이십니다. 세상적으로 아주 유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기업의 지사장을 하고 계시던 분이신데,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안 믿으십니다. 세상에서 똑똑하고 인정받고 잘 나가시니, 아쉬울게 없지요.
권사님 말씀에 의하면, 남편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아보면 이상하고 약하고 병든 곳이 한군데도 없어요.
몸이 건강하고, 잘 나가고, 돈 많이 벌고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분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식물인간처럼 되셨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여러분! 건강 검진을 너무 믿지 마세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는데, 전신의 혈관이 100년 된 수도관 같다는 거예요.
100년 된 수도관이 어떨지 아시죠? 녹이 슬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혈관 전체가 한두 군데 터지고 말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비싼 돈 주고 건강검진 받았을 때에는 항상 건강한 걸로 나왔다는데…
하여간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셨는데, 권사님을 만났는데, 기뻐하세요.
뭐가 그렇게 좋으시냐고 여쭈었더니,
그래도 하나님이 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드신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멀쩡할 때에는 교만해서 팅팅 거리며 튕겨내던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설교 말씀을 듣고 전할 때마다 우신다는 거예요.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생리적인 현상인가 싶어서 그 다음에 또 말씀을 전해보시면 또 우신다는 거예요.
권사님은 소름이 확 끼치면서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는 거예요.
‘하도 교만해서 이렇게 꼼짝 못하게 쓰러뜨려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기쁨이 샘솟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갔어요. 미국에서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아들이 한국에 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병원도 가고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그러더라는 거예요.
“엄마! 정말 지금 이 상황에서 그렇게 행복해?”
엄마가 다 죽어가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와서 엄마를 보니 펄펄 날고 있는 거예요.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 물어봅니다.
“엄마! 이런 상황에서 정말 그렇게 행복해?”
엄마가 운전을 하면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나 행복하다.”라고 했더니, 아들이 참 이상하다고 그러더라는 거예요.
“뭐가 이상한데?”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왜 안 믿어져? 엄마가 지금 행복하다는데. 왜 못 믿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이니?”라고 했더니
아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일류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다니는데
이름난 석학들이 와서 강연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그들의 말에는 논리가 있고, 그들의 말에는 아주 많은 지식이 들어있고, 그들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그들이 그 논리와 지식과 설득력을 가지고 이야기한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행복을 향해 갑시다.’
라는 이야기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논리도 없고, 지식도 없고, 설득력도 없고
더군다나 그 분들이 차지한 성공적인 위치도 아니면서,
날마다 시간을 다 빼앗기며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간호하고 있는데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엄마에게 다시 묻더래요.
“지금 행복해?"
"그래, 엄마는 행복해”
“엄마가 왜 행복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정말?"
"정말”
“그러면 나도 이제 엄마가 믿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님 한 번 믿어볼래”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권사님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아들 손을 붙잡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셨답니다.
지금까지 아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지만, 아들도 아이비리그에 다니면서
아버지처럼 얼마나 교만이 꽉 찼겠습니까?
그 얘기를 듣고 제가 그랬어요.
'그게 바로 세례입니다. 진정한 세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들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처럼 이런 상황에서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것,
이 상태에서 아들이 엄마 속에 있는 하나님을 봅니다.
잘될 때에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설명
본문의 내용은, 아비멜렉이 자기의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더불어 이삭을 찾아와서
화친을 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비멜렉'이 왕을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골'도 '장관 직위'을 일컫는 말인 것 같아요.)
이삭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고, 변덕이 죽 끓듯이 이제 찾아와서
화친을 하자고 청하고 있느냐'고 하니, 뭐라고 대답을 하느냐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는 것이 필요해서 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호와께서 이삭과 함께 계심을 어떤 점에서 봤느냐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읽었어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셔서 100배의 수확을 하고,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난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앞에 12절부터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받아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막강해졌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위협을 느껴서 화친을 청하러 왔다고 주석들이 똑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서 여호와를 발견하게 된 상황은,
이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에요.
12절부터 뭐라고 하는지 잘 들어보세요. 진짜 막강해 졌을 때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요?
12-16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라고 나옵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고 강하게 됨을 보고 아비멜렉이 보인 반응은, 시기심이고 떠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므로 화친을 청하러 온 것은
이삭이 세상에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성해졌을 때에는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겠지만,
더 큰 마음의 감정 상태가 시기심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강해진 것을 보면서
여호와가 함께 한다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서 여호와가 함께 하심을 보았을까요?
그리고 또 여호와가 함께 하심을 봤으면, 자기들도 여호와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안 받아들이잖아요.
그 때의 신이라는 것은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나라마다 신이 따로 있어서
이게 꼭 부부관계처럼 맺어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네 신이 있고 내 신이 있는데
누구의 신이 더 잘 살게 해주고, 강하게 해주느냐는 이런 관점에서 본 거예요.
나도 신이 있고 이삭도 여호와라는 신이 있는데,
여호와라는 신이 진짜 살아서 이삭과 함께 한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이죠. 신앙적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삭에게서 여호와가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봤습니까?
100배의 수확과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많은 노복이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에요.
▶우물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가 함께 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물을 거듭해서 빼앗고 매립해버립니다. 중동 땅에서 그 이삭의 가족과 수많은 노복들과 가축들의
목숨 유지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우물을 확보하는 것인데,
그 우물을 빼앗고 매립하는데,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자리를 옮겨서, 또 우물을 팝니다.
거기서도 또 우물을 빼앗고 매립했는데,
또 아무 소리 안 하고 자리를 피해서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이 모습에서 여호와를 본 것이에요.
중동 땅에서 우물이 없으면 죽으라는 이야기와 같은 겁니다.
우물을 대체할 수 있는 강이나 시내가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물을 빼앗는데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거듭 반복해서 물러날 뿐입니다.
이 모습에서 여호와가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발견 할 때가 언제입니까?
큰 부자가 되고,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을 이루고, 막강한 군사력과 힘을 갖출 때에 하나님을 발견합니까?
아니에요.
간증 집회를 가만히 보면 하나님 때문에 사업을 성공했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면
사업을 성공을 한 것을 바라보고, 병이 나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적인 가치들을 이루고 싶은 희망이 강화되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 세상적인 가치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한 희망이 강화 될 때에,
그 이유가 하나님이라는 강력한 수단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이루게 될 부(富), 하나님 때문에
이루게 될 성공과 형통이 눈에 들어오지,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순교현장으로 가 봐요. 바울이 사울 시절에 기세와 살기가 등등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 때,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한 순간에 뒤집어 집니다.
그런데 많은 성경학자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다메섹에서 한 번 만난 것으로 뒤집어 진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언제부터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봤어요.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입니다.
그런데 그 목숨이 돌에 맞아서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데, 얼굴이 천사처럼 빛납니다.
그때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마음속에 있었던 유대교에 대한 확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보고,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면서, 쫙 벌어지며 쫙 깨져버린 것입니다.
▶자, 어떨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납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어요.
그 가치들을 상실하고 있는데도 평강이 깨어지지 않을 때,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 없어졌는데도 기뻐하고 행복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내게서 하나님을 봅니다.
내가 돈 많이 버는 성공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었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그 때에는 하나님 때문에 이룬 성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공이 없어지고 가치가 없어지고 소중한 모든 것들이 다 사라졌는데도 내가 웃고 있으면
사람들은 그때 내게서 하나님을 봅니다.
▶십자가가 어떤 자리입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모든 가치들 돈, 명예, 인기, 건강, 장수, 자녀의 복, 결혼의 복…
모든 소중한 것들의 무덤이 십자가예요.
단순히 한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는 저주의 자리이고,
저주의 자리라는 의미는, 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의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보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현실이 되기 전, 주님이 살아계실 때에도
주님의 마음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다 죽어버린 거예요.
하나님 한 분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쫓아가시기 위해서.
그 때에 주님은, 이 세상 만민이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첨성대였고,
하늘을 바라보는 첨성대가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예요.
그 권사님의 아들의 말을 그대로 우리가 패러디해서 보자면?
아비멜렉은 ‘이삭! 너 중동 땅에서 우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너희 온 가족과 노복과 그 많은 재산을 유지하려면 필요한 우물을
내가 빼앗는데도 단 한 마디도 안 하고, 저항 한 번 없이 다른 장소로 옮길 마음이 생기냐?
또 빼앗았는데도 또 말 한 마디 없이 옮겨? 그런 마음이 생길 수가 있어?’라는 것이지요.
우물을 빼앗긴 것뿐만이 아니라 그 곳에서 쫓겨났으니 100배로 수확했던 밭도 빼앗긴 겁니다.
그 중동 땅에서 수확을 할 수 있는 밭이라는 것이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곳을 떠나면 어디에 가서 밭을 새로 일구고 얻겠습니까? 죽는 거예요.
우물도 없고, 밭도 없고, 가축도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말없이 떠나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아비멜렉은 소름이 끼치는 겁니다. 이삭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본 거예요.
아비멜렉이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인 거예요.
우리는 기껏 이 본문을 보면서도 경제력과 군사력을 무서워해서 화친을 청하러 갔다고 생각하는데,
아비멜렉이 본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니라
이삭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 세상을 이기고 있는 힘을 본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뭡니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들이
이삭의 마음속에서 평강과 행복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겁니다.
무슨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이 지구를 이기겠습니까? 이길 수 없어요.
그런데 이삭이 이 지구를 이기고 있는 것을 보는 겁니다.
이 지구 위의 그 누구도 생명의 근원인 우물을 빼앗겼는데 말 한 마디 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빼앗기는데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물러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물러갑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이삭아, 우물을 빼앗기고도 정말로 행복하냐?’
이삭의 삶에서 평강을 보는 겁니다. 소름끼치는 힘이죠.
스데반에게 사울이 마음으로 물어보는 겁니다.
‘어떻게 돌에 맞아 죽는데도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그렇게 행복하냐?’
스데반이 대답합니다.
‘그래, 돌에 맞아 죽어도 나 행복하다.’
이삭이 아비멜렉에게 대답합니다.
‘네가 우물을 아무리 빼앗아도 나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는 것이지 땅의 우물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스데반이 말합니다.
‘내가 돌에 맞아 이 몸이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늘이 열려있는데 무슨 소리냐?’
▶‘엄마! 정말 지금 행복해? / 그래, 나 행복해.’
‘왜 행복해? /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행복해.’
이게 힘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남편은 쓰러져서 식물인간이 된 상황인데도,
세상의 가치가 사라진 그 상황에서 행복을 유지하는 엄마를 보며,
그 동안 버티고 논리와 과학과 이론을 들이대며 신앙을 거부하던
아이비리그 소속 대학원의 학생, 아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그 많은 석학들이 참으로 놀라운 논리와 지식과 설득력을 가지고 웅변을 하고 있는
그 강연의 현장에서 만나지 못했던 그 하나님을,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엄마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서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을 본 것은, 경제력과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경제력을 주시고 군사력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에게 아무런 세상 가치가 없어야 하느냐?
중요한 것은 세상의 가치들인 돈, 명예, 건강… 그런 것들이 있든 없든 내 마음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돈이 없으면서도 마음에는 돈이 가득 찬 사람이 있고,
실제로 돈이 있으면서도 마음에 돈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딱 한 부류의 사람, 늘 십자가를 마음에 기억하는 사람만 돈이 있는데도 마음에는 돈이 없는 사람일 수 있어요.
돈이 없어도 평강을 유지하며 행복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처럼,
동시에 돈이 있는데도 전혀 돈의 티를 내지 않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돈의 힘에 좌우되지 않고 돈의 힘에 먹히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더 많이 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돈 티가 나지 않는 거예요.
마음이 돈에 먹히지 않고 돈 쓰는 맛에 먹히지 않습니다. 돈이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흘러나갈 뿐이지요.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이 세상의 가치가 없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눈 떠서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 의식은 언제나 십자가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에는 십자가만이 들어와 있으면 됩니다.
십자가가 들어와 있으면, 돈은 나가고 들어오고 난리를 치겠지만,
돈이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하늘로 인한 평강을 유지할 수 있고,
그렇게 이 땅과는 상관없는 평강을 유지할 수 있을 때에
사람들은 내게서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본다는 것이에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아서
이 세상의 소중한 가치들이 내게 주어지거나 없어지거나 상관없이,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절대 평강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여 주심으로,
어디를 가든지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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