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C 오대원 선교사] 예수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150322 - YouTube
◈예수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 사53:4~6 2015.03.26.출처보기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 찬양 속에 거하시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저희들 모두에게, 사랑을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여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실 때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수 있게 해주시옵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말씀 안에서 주님과 만나게 해주시옵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사순절 기간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 시기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해서, 나가기 시작하시는데,
이제 조금 지나면, 마지막 고난주간이 옵니다.
주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저희를 위하여 하신 역사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종교가 이 세상에 있는데, 기독교라는 것이 어떻게 달라요?
뭐 말씀이 좋아서, 그런 면만이 아니고,
혹은 하나님 안에 은혜를 받고, 좋은 사상이라든지, 좋은 신학,
좋은 그런 것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예수님 못 믿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세상에서 좋은 일 많이 하는 면도 있지만, 그것도 기독교의 독특성/차별성이 아니에요.
기독교가, 다른 종교가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시고, 말씀하시고, 구약성서 시대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 마지막 때에, 히브리서 말씀 보면,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히1:1~2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을 때는,
그냥 말로만 우리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만, 그렇게 말씀 하시지 않고,
역사를 일으키면서, 행위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사실, 주일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면 안 되지만, 십자가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이 확실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에 응답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다뤄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53장 말씀 보시면, 구약성서 말씀인데도,
오히려 신약성서에 있었던, 예수님 십자가를,
가장 저희들에게 분명히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6절까지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의 보고서로 보고를 하는, 그런 형식입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는 이렇게 하셨다’고, 목격하고서 보고하는 그런 말씀인데,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보고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우리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멸시를 당하시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
그런 사람같이 보인다고, 그들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렇지만, 4절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 목격자/보고자들이 마음을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그 분을 뭔가 귀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너무 고난 속에 있어서, 너무 비참한 그런 모습을 보니까,
‘아 참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 같은데’,
그런데 이제 보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그 분이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4, 5, 6절 말씀을 보면,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십자가 안에서 얻게 되는, 우리를 위한 온전한 구원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허물’이라는 뜻은, transgression
날마다, 속으로나, 몸으로나, 말로써 짓는 죄를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죄를 집니다.
안 짖겠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그 실제 행동으로 짖는 죄를, ‘허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위해서, 우리의 짓는 죄들을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는 아침마다, 보좌 앞에 가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가서,
긍휼을 받고, 용서를 받고, 다시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용서를 받아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iniquities
우리 죄악은,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죄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행동으로 범하는 죄는, 죄악된 마음의 결과입니다.
죄는 먼저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입니다. 거역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시는 것보다는,
나 자신이, 내 삶에 주인이 되고,
내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말하자면,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그 죄성 때문에, 우리는 나쁜 행동도 하고,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 못 믿는 사람들답게 살지 않게, 그런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그대로,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속에는 그런 거역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반항하는 마음입니다. 교만.
※’허물’과 ‘죄악’을 평행법으로, 본질상 동일한 ‘죄’로 보셔도 되겠습니다.
고난당하시는 종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게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해주셔서, 구원을 받게 해주신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는 물론,
전 세계에 있는, 온 인류의 죄와 질고와 그 교만한 마음을, 예수님께 다 짐 지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 ‘죄악’을 위하여,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53:5b
그리고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평화는, 바로 롬5:1절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됐습니다. 하나가 됐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러면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영원한 평화.
이 영원한 평화는,
어디가든지 영원하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해결됐으니까 얻어진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화목하게 됐기 때문에, 영원한 평강,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줄 수 있는 평화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화로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고..’
나의 평화,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 깊은데 있는 평강이 임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불안과 걱정과 근심, 이길 수 있는 길은, 빌립보서 4:6~7절에 말씀대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면서, 이제는 깊이가 있는, 영혼의 쉼과 안식 속에 들어갑니다.
불안을 이길 수 있는 것이고, 걱정하는 대신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예수님께서 평강을 주셨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53:5b
구원 그 자체가 하나의 영원한 치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질병의 속박으로부터,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 집에 방문했습니다.
마침 그 장모님이 열병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때 마태가 이사야 53장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에요.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또 십자가의 공로를 받아 드리는 사람이라면,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함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진리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삶에서, 육신의 질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서,
주님 우리 영혼/육신에 질병의 문제 있으면, 같이 기도하고, 용서와 치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의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해 달라고, 같이 화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생활하는 식으로 살면, 우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몸도 아프면, 서로 위해서 기도하시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출발할 수 있는 문이 열려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 보시면, 이제는 소망, 소망이 생깁니다.
그 소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든든하고, 견고한 바탕이 되는 것이에요. 히6:19
그러면, 어떠한 요란스러운 일이나, 어려운 일속에 있어도,
내 영혼에 닻anchor이 있기 때문에, 확신이 있으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확실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주신다고 믿고 확신니다.
우리가 죄를 짖고 있을 때는,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보면 포기하는,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떤 종교를 만든다고 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본문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와 허물을 자기 몸에다가 짊어지우시고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은 사망에다가 맡겼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왜냐면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완전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어떤 뭐 돈이라든지, 명예라든지,
혹은 무슨 쾌락이라든지,
그것을 통해서 자꾸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생활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세상에 물질이라든지, 그런 것만 소유해야만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안 그렇습니다.
있어도 할렐루야, 없어도 할렐루야!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람 있게 삽니다.
무의미하는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저희들입니다.
그러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뭡니까?
사망, 죽음이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죽어도 할렐루야, 살아도 할렐루야!
우리는 주님 안에 영원히 삽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를 보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았는데,
더 좋은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에게다가 자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자유,
참된 자유는 남을 섬길 수 있는 자유.
그 자유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씀하는 것이에요.
그럼 우리 이번 사순절 지나면서, 고난주간 되가시면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이 있습니다.
영원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는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혹시 오늘이라도 죄를 짓는 것이 있다면, 혹시 오늘이라도 내 마음속에 있는, 숨어져 있는,
남이 볼 수 없는, 나만 볼 수 있는 죄가 있어도, 회개하면,
그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받아서 이제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길 수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과 가까이 가게 하시고,
죄와 싸울 수 있게 해주시고, 그리고 세상을 섬길 수 있게, 성령께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참 유일한, 유익한, 하나밖에 없는, 그런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의 삶을 다스리시고,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찬양하실 때, 너무 힘차게 찬양하시고,
아름답게 찬양하시는, 교회가 된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니요. 어떻게 살아 합니까?
그러면 이만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뭐라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사실 십자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뭐 때로는 목걸이로 십자가로 걸고 다니지만,
혹은 교회다가, 높은 십자가를 세운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의미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슨 장식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 사람을 죽이는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죽인, 로마시대에 있었던 그런 하나의 도구/형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오늘 바라볼 때에도, 어떤 교회다가 큰 십자가를 보면,
‘아 그 교회가 죽었군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죽어야죠. 그래야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라”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우리 십자가는 같은 겁니까?
같다고 볼 수 있는 거는, 둘 다 죽이기 위해서 있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다른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만민의 구원을 위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뭡니까? 뭐 다른 사람의 구원할 수 있는, 그런 십자가는 아니고,
온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복음화 할 수 있는 능력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열두명의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고 하면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도 이 마가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수신자는
일차적으로 로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에 사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들도 큰 핍박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핍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보고,
‘너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우리가 북한사람에게, 북한의 교회는, 존재하지만 겉으로는 안 보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숨겨두신, 감춰두신 신자들이 많아요.
그러면, 그들에게
‘위로의 하나님께서 오셔서 사랑해 주시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여러분 그분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런 분들이에요.
그 분들의 신앙은,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배울 것이 많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관광객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성도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아버지께 승복하셨기 때문에, 다 맡겼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끝까지 예수님께서는, ‘아버님, 예스, 네, 아버지 뜻대로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명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나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정도 하셨다면,
우리에게 ‘너는 그냥 믿기만 하면 되요. 믿고, 예 할렐루야, 전 믿습니다.’
그것만 말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지 않아요.
예수님과 똑같이, 성령께서 하시는 제일 큰 역사가 뭡니까?
예수님의 형상, 우리 안에 재형성시켜 주신 겁니다. 항상 우리는 빚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같은, 예수님의 동생들, 아버지의 자녀들,
그렇게 생활할 수 있게 해주신 겁니다.
그러면 함께 뭉쳐져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 드리면서,
‘아버지 순복합니다’ 그러면,
그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은,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들을 보시면서,
‘너희는 여기까지 가겠느냐? 아니면, 축복받기 위해서만 하겠느냐?’
그 질문 그때나 지금이나 하십니다.
‘끝까지/십자가까지 갈려고 하는 마음이 있느냐?’
그래서 해마다, 우리 사순절 기간, 고난주간은,
우리 자신을 다시 살펴보면서, 회개하면서, 다시금 결심하면서,
주님 끝까지, 잠깐만 아니고, 끝까지 주님만 따라 갑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다시 재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선교할 때, 단기선교를 많이 합니다. 그것은 좋습니다.
뭐 그때 어떤 나라 가서도 돌아오고, 또 축복하고, 많이 배우고,
선교는 단기로도, 장기로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주님께 대한 헌신에는.. 단기는 없습니다.
일생 동안, 주님만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생활의 중심은, 나(자아) 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기주의적인,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버리고,
예수님께서는 내 보좌 안에 앉으시고, 나의 삶에 중심이 되고, 나의 삶에 전부가 되신다.
그렇게 받아 드리시면, 바로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거죠.
그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에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신약성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지만,
조금 따라 가다가, 중간에 그만 두고 돌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9장 말씀 보면, 세 사람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 저는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아니요, 오지 말고, 돌아가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에 종교적인 핑계로, 예수님께서 따라 오라고,
‘아 예, 그런데 아버지의 장사를 먼저 해야 되겠습니다.’
근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아직 정확히 모르겠어요.
암튼, 자기 일부터 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 사람, 예수님께서는 따라 오라고,
‘아 예수님, 예 좋습니다.
그런데 먼저 집에 가서 조금 의논하고, 여러 가지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근데 그거 나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뭐, 이제 어떤 사람, 너무 갑작스럽게 살짝 없어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고,
그건 가족도 모르고, 그렇게 너무 극단적으로 하는 것은 안 좋습니다.
그렇지만은, 가족과 함께, 사실 우리 온가족도
십자가로 지고 나간다면 됩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그 세 사람을 보니까,
그들에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동기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만 따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에요.
▶그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다른 복잡한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해서, 살아오신 것처럼, 우리가 죽음을 향해서 살아갑니다.
바울사도가 말씀하신대로, 죽든지 살든지, 하는 것은 이 모험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고난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난은 오히려, 고난 속에 들어가면,
더 깊이 있는,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는,
우리 요즘도 고난당하는, 여러 나라에 고난당하는 교회의 신자들을 보면,
아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도 있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십자가를 지고 가면, 조금 모순이지만은,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죠.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면은, 잃을 것이요,
자기 자신을 잃으면, 자기 자신 생활을 잃으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런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안정감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참된 안정감 있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에게 다 맡기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다 맡겨서, ‘아버지! 오직 아버지만, 저의 전부입니다.’
그러면 안정감 있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바탕위에다 세워져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교회로, 이 계신 분들을 잠깐이라도,
만나 뵙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저희 모두에게,
위로와 도전과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리고 은혜 가운데 살게 해주시옵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타이핑 j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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