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눈물 눅19:41~42 출처보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눅19:41~42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며 하신 탄식입니다.
저는 자주 밤 등산을 합니다.
안산을 가든 북한산을 가든 꼭대기를 오르면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데 그 화려함이 눈부셔 감탄이 나옵니다.
어제도 저녁을 먹고 북악산의 팔각정을 올랐습니다.
찬 공기 덕분에 공해도 없어서, 야경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일찍 연말 기분을 내는 조명들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묵상을 하면서 올랐기 때문인지
그 화려함 뒤에 있는 서울의 어두움이 떠올랐습니다.
시민을 좋게 한다는 개발 때문에, 오히려 거리로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들.
도시의 범죄 속에 희생당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눈물은 이들의 눈물에 대한 눈물이요,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이들에 대한 눈물입니다.
▲예수님께는, 눈물을 흘리는 이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나
똑같이 안타깝고 애처롭고, 그래서 그들 모두에 대해 우십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은 내용이 다릅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 대한 눈물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눈물이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들에 대한 눈물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눈물입니다.
죄지은 사람과 그의 악에 대해서까지 우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람도 죄인도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죄악에 대해서도 분노할 수 없고
죄인에 대해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리는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팔복이 말씀하듯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있지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웃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의 눈물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눈물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보는 눈이 가린 예루살렘이 너무 안타깝다 하십니다.
없는 자를 악이 바치게 만드는 가진 자의 죄악도 문제지만
악이 바쳐 악에 대해 악으로 되갚는 없는 자의 저주도 문젭니다.
사랑이 없을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나
다 평화의 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 평화의 길을 모르건
분노에 눈이 가려 평화의 길을 모르건
그들은 모두 평화의 길을 모르고
결국 서로를 파멸하는 길을 갈 것입니다.
이 아침, 저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다른 사람을 악 바치게 하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오늘 이 아침, 희망합니다.
이런 저에 대해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제가 되기를.
모든 이가 평화를 이루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눈물, 나의 눈물
오늘 새벽에 복음을 읽으면서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마치도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시며, 한탄하시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2000년 후에 멀리 내 현실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시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죽이며, 도적질하며,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애통해 하거나, 눈물 흘리는 마음이 없으면.. 내 마음밭이 굳어진 상태입니다.
☞관련글/ 주여, 비통함을 제게 주소서 (1) 주여, 비통함을 제게 주소서(2)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이 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한탄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을 거두시고 예루살렘 한 가운데를 향하여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비록 이 길이 죽음의 길이지만 곧 부활의 길, 참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의 외침을 쏟아내시는 예수님의 절규를
나의 것으로,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나 몰라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외쳐야 하겠습니다.
이 외침의 반향이 아주 미미하다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외쳐야 하겠습니다.
◑싹수가 노란 아이를 변화시킨 눈물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된 한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철부지 아들 하나를 끌어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싹수가 노랗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 물건에 슬슬 손을 대기 시작하던 아이는 점점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조직의 일원이 되어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결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사고를 친다고 해서 결코 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사건 뒷수습을 위해 밥먹듯이 파출소와 경찰서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소년원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이튿날 보따리를 싸서 소년원 근처에 방을 얻었고,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몹시 추웠던 그 날도 어머니는 가장 일찍 소년원에 도착해서
면회를 신청을 했습니다.
"애야 오늘 날씨가 많이 추운데, 혹시 감기 걸리지는 않았니?" 하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감기 기운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져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던 아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철창 안에서 아들이 바라다본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추운 겨울날 감기가 들려 콜록대면서까지 자신을 찾아오신 어머니,
오랜 뒷바라지로 인해 나이에 비해 훨씬 늙고 초라해진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진 아들은
갑자기 대성통곡을 터뜨렸습니다.
그 눈물을 계기로 아들은, 조금씩 어둠의 생활을 청산해나갔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거듭했지만, 지금은 운전기사로 있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새 출발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끊임없는 방황과 타락 앞에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아마도 그 어머니의 마음과도 흡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갖은 고통이나 끝없는 방황이
너무도 안타까워 찢어질 듯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배신과 떠나감이 너무도 아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게된다면 그때 우리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는 예수님,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파악하게될 때,
우리는 위에 소개해드린 아들처럼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의 길
인도의 옛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 밑에 아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잘 이해해 주었고, 서로 서로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는 싸움도 없었고, 다툼도 없었죠.
그들은 모두 신의 뜻에 의해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마가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에게 “신이시여, 저 사람들이 항상 행복하리라 봅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보아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악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심통이 나서 “좋아요. 나하고 내기합시다.
나는 저 마을 사람들을 아귀다툼하는 인간들로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마가 끈질기게 졸라대기도 했고,
사람들을 믿었기에 그럼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는 세 번의 기회를 얻어 사람들을 유혹하러 지상에 내려 왔습니다.
악마가 지상에 내려와 행복한 마을의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아귀다툼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을까하며 살펴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바로 보면서 서로가 그렇게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빼앗아
히말라야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마을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매일 바로 보던 사랑의 힘이 없어졌기에 불안과 초조가 엄습했죠.
그래서 마을의 원로들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 “사랑의 마음”을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히말라야의 눈보라를 헤치고, 어떤 어려움도 다 물리치고는
그 “사랑의 마음”을 찾아왔죠.
악마는 마을 사람들이 “사랑의 마음”을 찾아가자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빼앗아 태평양 바다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특공대를 조직하여 오랜 고난과 시련 끝에
결국 이것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흡족해 하셨습니다.
▲악마는 고민에 빠졌고, 어떻게 하면 인간을 고통 속에 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그러다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랑의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서
한 조각씩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랑의 마음을 조각내 행복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한 조각씩 넣어주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공대를 만들어 세상 곳곳에 다 보내봐도
사랑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것이 한 조각 한 조각씩 들어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사랑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훔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마침내 살인을 해서라고 차지하려고 했죠.
히말라야의 행복한 마을은 이제 악마가 원하던 데로 아귀지옥이 되어버렸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불행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길은 “하나님의 뜻, 바로 구원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평화의 길은 “함께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보내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함께 사는 길”이 흔히 가장 크게 위협 받는 것은 사람의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누구나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과 행복을 “함께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의 길”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 저희를 평화의 길로 나서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주님은,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요15:5
이 주님의 말씀은,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신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우리 인간이,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너무도 상하게 하는 말,
인간의 능력과 업적과 위대함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를 터무니없이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금 뭐라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불신자일지라도
그것은 다 주님이 그 불신자와도 함께 계시는 표시라고 말입니다.
불신자는, 틀림없이 하나님 없이 자기 혼자 그것을 하고 있다고,
하나님을 힘입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 일을 이룬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서 힘주시기에 해내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햇빛이나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정말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에게 햇빛이나 공기는 당연히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찌 공기와 햇빛뿐이겠습니까.
물이 없으면 우리가 어찌 살 수 있고, 땅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곡식을 생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할 수 있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바로 그 모든 것이신 분이십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나도 없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힘주지 않으시면 아무 힘도 없고
하나님께서 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아무리 무엇을 해도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실감이 나게 하기 위해 막말을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다 헛짓거리, 헛지랄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고, 그래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베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유예의 기간을 주십니다.
포도원 주인(하나님)이 3년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베려고 하자
포도원 지기(예수님)가 나서서 1년만 유예 기간을 주시면,
거름도 잘 주고 잘 가꿔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그러고도 열매 맺지 않으면 그때 베어버리자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유예의 기간을 주시는 것을 우리가 악용해서는 안 되지요
이 유예의 기간은 깨달음의 시간이고, 결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시간이요,
주님께서 주시는 거름, 영양분을 받아 열매 맺는 시간이죠.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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