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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 팔복의 삶

LNCK 2015. 6. 26. 13:29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 팔복의 삶       5:17~42   15.06.21.출처 

 

서론, 인생에는 극한상황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시고 나중이시듯이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들도, 믿음의 경주를 시작했으면, 잘 마무리를 지어야 하며,

또한 그렇게 되어지도록,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끝이 보장되었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인생의 끝이 미궁으로 빠지지만,

예수를 믿으면, 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순풍에 돛단 듯, 쉽게 잘 풀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끝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 과정은 험난합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풀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상황다시 말해 포기 상황에 다다르게 되는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오늘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본능 중에 하나는, 자기의 한계를 시험하고 넘어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익스트림 스포츠를 보십시오. 점점 스포츠가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요즘 격투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거에는 권투, 레슬링 정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 둘을 섞어서, 훨씬 더 과격하게 합니다.

링도, 5각으로 된 케이지 안에서, 훨씬 더 피터지게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극한 한계와 극한 상황을 시험하는,

그런 자극적 스포츠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여정에도 극한 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익스트림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을 극복해서, 신앙의 오메가 지점에, 결국 우리가 도달하게 될 터인데,

 

우리가 이런 과정들을,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좀 더 잘 이해하면,

쉽지 않은 극한 상황 통과의 과정을, 어쩌면 조금 더 쉽게 통과하는데, 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더라도, 끝없는 도전과 이에 대한 응전의 역사였습니다.

모든 문명의 발전은, 바로 이 한계를 넘어선 소수의 개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을 때, 어느 한 사람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여

불가능 같았던 그 영역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그 한계상황은 극복 되어져 왔습니다.

 

인생의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힘과, 영적 성장의 원리는 아주 비슷합니다.

인생의 한계상황 돌파가 어렵듯이, 영적 한계상황 돌파도 아주 어렵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설교를 통해서, 영적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좌초 위기를 만난 기독교를 건지고,

도전에 대한 새로운 응전의 역사를 써 내려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계상황에 부딪힌 믿음의 조상들

 

다윗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쟁터의 군인들이, 골리앗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골리앗의 전투력을 가늠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누구도, 골리앗의 전투력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시각으로는, 굉장한 사람 같아보였으니까요.

 

그때 그 두려움의 자기 한계를 이긴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어떤 데이터도 없는 괴물을 이길 수 있었던 근거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만군의 주 하나님의 이름’,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보이는 나의 능력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단순한 선택입니다.

 

갈수록 깊어가는 시험과 환난이, 욥의 인생가운데 연속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게 감소되어야 되는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졌습니다.

 

욥기를 읽으면, 우리가 당황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어져 가야 되는데, 오히려 더 깊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당사자는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극복해도 극복해도 계속되는 시험 앞에, 욥은 코마(의식불명)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바로 그때, 즉 한계상황(죽기 일보 직전)에 도달한 바로 그 때,

욥은 자기 자신을 깊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치가 제로베이스가 되면서, 욥은 비로소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됩니다.   욥이 받은 축복은 회개

 

욥기 1장에 나타난 욥의 모습과, 한계상황을 통과한 욥기 42장의 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참으로 의롭게 살았던 당대의 의인이, 더 깊은 회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환경을 탓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욥기 1장에서 나타난 욥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즉 욥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욥이 그런 자신의 감춰진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스스로 당황했을까요?

 

이렇게 한계상황은, 인간의 자기 민낯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욥의 모습 가운데서, 욥을 만나주셨습니다.

그제야, 욥은 자기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게 됩니다.

 

▲예수님

 

요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러분, 위 본문은 정말 엄청난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무한하신, 영원하신, 천지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 가운데 거주하여 사셨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 속에 갇히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이

정말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십자가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능하게 죽으셨다는 점입니다.

 

목이 말라도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으며,

아픈 곳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그 처절한 상태로 돌아가셨다는 점입니다.

그런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우리 인간이 자기 한계성을 극복하는

가장 극치의 예를 잘 보여주는데요,

그건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주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자기 유한한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러므로 바닥신앙을 경험할 때, 신앙의 성장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는, 자기의 영적인/육적인 한계상황을 돌파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면서, 그 받으신 시험을 통과하셨을 때

비로소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 한계상황을 경험하시고, 극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에 가 보셨어요?

한 시간은커녕, 30분도 버티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40일간이나, 그것도 금식하시면서 버텨내셨습니다.

 

그 한계상황의 끝에서,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 (승진해서) 비로소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전에도, 여러 번 작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진정한 영적인 돌파가 일어나려면,

한계상황을 경험해야 하고, 그 한계상황을 극복/돌파할 때입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제 안에 그런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심령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짜 성장 할 때가 언제인가요?

바로 한계와 바닥을 경험할 때입니다.

 

바닥신앙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힘의 한계와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신앙은

언젠가 자기 힘보다 넘기 어려운 시험과 곤경이 올 때

절대로 그 파도를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 파도를 넘어갈 수 없습니다!

 

자의든/타의든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갈등의 시간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믿음의 성장과 진보를, 자기 사명을, 이뤄내지 못합니다.

 

실패 없는 인생, 좌절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건 모두에게 다 있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극복하는 인생과, 거기서 좌초하는 인생.. 거기서 차이가 납니다.

 

본문 행5장에서, 제자/사도들이

그 어려운 시험과 환난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자마자 또 복음을 전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철저히 바닥을 경험했던 복음서에서의 실패가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사도행전의 위기를 넘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일어섬과 승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신앙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이건 인생의 원리와도 똑같습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똑같다니까요.

 

부자가 3대 안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또 일부이지만, 3대를 넘어가는 부자들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과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부를 이룬 1세대 부자들 중에

-자녀에게 검소함을 가르치고, 겸손을 가르치는 부자가 있고

-나는 고생했으니, 자녀에게만큼은 고생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부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 대에 더 일어나는 부자 가문이 있고,

자녀 대에, 순식간에 다 깨어지고 망하는 부자 집안이 있습니다.

자녀가 람보르기니 우르릉부릉 소음 내며, 타고 다니다가.. 3대를 못 가는 거죠.

 

자녀가, 어려움 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해보고 자랐다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떤 어려움에 딱 부딪히게 되면,

그걸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이죠.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놀라는 것은, 대형마트의 풍요로움 때문입니다.

대형마트에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식료품도 아주 싼 편이어서, 적은 돈으로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맥도널드에 들어가 보면, 콜라가 슈퍼 사이즈가 있어서, 무슨 큰 물병 만합니다.

칩스 같은 것도, 무슨 작은 쌀가마니처럼 대형입니다. 뭐든지 풍요로워요.

 

한 번은 제가 맥도널드에 갔는데, 제 앞에 사람이 주문이 잘못 나왔나 봐요.

자기가 주문한 게 아니고, 다른 게 나왔던 거죠.

 

그러자 그 종업원이 너무나 쿨 하게,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오케이하더니

그 잘못 나온 세트(콤보)메뉴를, 쓰레기 통으로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그 작은 하나를 보면서, 미국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 풍요와 그 과소비가운데 흠뻑 젖어 살다가,

나중에 한번 시련이 닥치고, 한계상황을 만나면,

경제적인 어려움이 한 번 닥치면.. 속절없이 무너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 박탈감이 너무나 커서,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젊은 세대는, 옛날 어른들이 6.25, 보릿고개 얘기하신다고, 듣기 지겨워하는 데요,

정말 단골 레퍼토리 같지만, 주의 깊게 들으셔야 합니다.

 

그 바닥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저 같은 젊은 40대 목회자는, 과거 시대의 투지, 끈기, 한계극복.. 이런 저력이 사실 부족하죠.

그런데 과거에 개척해서 교회를 일구신 분들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투지, 끈기, 근성.. 이런 점들은, 오늘날 우리 후배들이 배워야 할 점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피곤하면, 새벽기도 안 해 버립니다.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거 선배들은, 그거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삶을 대하는 온도가 다른 거죠. 전쟁과 가난을 경험한 세대는요!

 

오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의 투지, 끈기, 근성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돌파가 일어나죠.

안 그러면 자기한계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늘 그 안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이 '바닥신앙'의 정신과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신앙의 조상들이 이 바닥신앙을 경험했고요,

오늘날은 이제 우리 순서가 되었다는 겁니다.

 

특히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 부분을 다루십니다.

여러분은 꼭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데이터를 비웃습니다.

 

오늘날은 소위 데이터 시대입니다.

문명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가장 눈부신 결과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데이터화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불가능했지만,

요즘은 IT기술이 발달해서, 이게 가능해 졌습니다.

 

이 말은 데이터를 분석함으로 인해, 패턴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패턴은 인간의 습성과 생활방식을, 예측 가능하게 해 줍니다.

빅 데이터의 세상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분석 - 데이터화 - 패턴 - 예측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데이터가 주는 모든 결과물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믿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A라는 사람을, 아침부터 밤에 잘 때까지, 모든 동선과 하는 일을 CCTV로 관찰합니다.

그의 삶을 한 달만 찍어서, 그 데이터를 분석하면, 그의 삶의 패턴이 파악됩니다.

 

어디를 잘 가는지, 누구를 잘 만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의 패턴을 보면서, 그의 습성 자체가 그냥 읽혀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비즈니스와 연결되면, 그 사람에 대한 마케팅 전략이 나오는 거죠.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게 다른 목적으로 악용될 잠재적 요인도, 늘 안고 있다는 거죠.

 

데이터를 이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불안한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은

데이터가 주는 자료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자리는, ‘데이터의 모든 예상이 빗나간

바닥과 한계의 상황으로부터 출발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숙지해야 합니다. 데이터가 무용지물입니다. 

 

지금 선교계가 당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모슬렘권 등 선교지에서, 여태까지 되어지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일들(창조 역사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데이터와 패턴으로, 전혀 예측되지 않았던 일들이

초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당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대회에 같은 곳에 보면, 수 십 년 전에 되어진 논의들을

아직까지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CALL TO ALL 같은 모임에서는

핸드폰에 성경 칩을 넣어서, 듣게 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핸드폰은 다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핸드폰에서 쓸 수 있는 어플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황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으니,

아직도 예전의 답보상태로, 선교를 계속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깊이 깨달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의 철저한 죄성은, 데이터를 넘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에 보면,

사탄이 갖고 있던 데이터, 그걸 하나님께 내밀었죠.

이 정도 환경이면, 그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넘어지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욥, 다윗, 노아, 요셉 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환난과 어려움을 통해, 그들이 무너질 줄로, 사탄은 예상했어요.

 

사탄이 자기가 가진 데이터로는,

이 정도로 누르면, 욥이 승리 못할 줄 알았던 거죠.

이 정도 환란이면, 요셉이 넘어질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믿음의 조상들은, 사탄이 갖고 있던 그 데이터의 한계를 넘어버린 것입니다.

 

노아가 그 데이터를 깨버렸습니다.

50년 지나면, 방주 그만 짓고, 포기할 줄 알았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이 정도 때리고, 박해하고, 겁주면, 죽이려 들면,

데이터 상으로는 포기해야 되는데, 예수님은 그 한계를 넘어버리신 겁니다.

 

그 데이터를 깨는 사람들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이 믿음의 사람들의 출현에 당황합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아브라함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보통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식 바쳐라 그러면, 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게 인간의 본성인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데이터를 깨고, 자식을 내어드리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 부모가 갖고 있는 인성의 한계..

그의 믿음이, 그 데이터를 깨어버리는 겁니다.

 

거기에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제가 TV에서 <진짜 사나이, SSU>을 보았는데요.

SSU는 수중 폭파 특공대입니다.

 

거기는 정말 훈련이 쎈 곳입니다.

보니까 팔 벌려 뛰기를 시키는데, 수천 번 이상 시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훈련생들이, 인사불성이 되어가지고, 그걸 하는 겁니다.

눈이 무슨 약먹은 환자처럼 풀어져버릴 정도로,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더라고요.

 

거기는, 마치 포기를 강요하는 것 같았습니다.

특공대원 훈련생들에게, 빨리 포기하고 자기 부대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과정을 마치고 정식 특공대원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의 훈련 목적은, 인간의 악(끈기)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오늘 설교주제와 너무 유사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거의 포기할 상황인데,

악으로, 깡으로버티면서 그 훈련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더라는 겁니다.

물론 포기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요.

 

인간의 육체적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데,

악으로/즉 인간의 정신력으로, 그걸 뛰어넘는 겁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런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신앙의 저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죽겠다는 각오로 나아갈 때,

그 사람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SSU대원들의 군가가 원망 마, 원망 마였습니다.

아브라함, 노아, 요셉이.. 다 그런 특공훈련 과정을 통과하는, 한계상황을 뛰어넘었고요,

그러면서도 원망 말았던믿음의 조상들이었습니다.

 

 

한계상황을 뛰어넘었던 본문의 사도들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성령 받은 후 사도들의 삶 가운데 확연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축복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의 증가입니다.

 

그 일은 초대교회를 통한 복음전파가, 힘을 얻을수록 비례하여 더 나타났습니다.

축복이 아니라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여러분이 잘 믿을수록

어쩌면 더 어려운 점들이 생길 것입니다. 물론 더 평탄한 길들도 나타나지만요.

둘 다 나타납니다. 모순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한계 상황들이 다 돌파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옥에 가두어도, 주의 사자가 와서 옥문을 열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환난이 와도, 전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복음을 전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 사도행전적인 삶입니다.

 

핍박이 연속적으로 다가왔지만,

사도들의 복음 전파 열정이, 그 한계상황을 다 타고 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본문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은,

무엇이 고난과 환란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실제적 힘이었을까?’ 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해답을

<팔복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찾았습니다.

 

그 단서는 본문 41절에 나와 있습니다.

5: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

 

많이 보신 말씀 같죠? 바로 팔복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드디어, 그들이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뻐했던 이유를,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팔복을 생활화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성도들의 생활방식과 삶의 본질이 바로 팔복입니다.

한번 얻었다가 없어지는 복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 평생의 삶을 통해

체질화된 하나님 나라의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본문에 사도들이, 그들 앞에 있는 환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의 삶에, 팔복이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팔복이 체질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자기 삶에 풀어지므로,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능욕을 당하며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가 받는 복을 알면 간단합니다.

 

8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지는 복에 대해 초점이 있습니다.  고행(미화)주의가 아닙니다.

 

즉 너희가 힘들게 고난 받고 살게 될 것이다.. 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런 가운데 너희가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 초점이 있지 않고, ‘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데, 초점이 있는게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았을 때 누리는 복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천국이 더 확실히 소유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 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 삶에, 팔복이 풀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한계상황이 오면,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팔복이 자기 삶에 체질화되어 있지 못하면,

사역을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자기가 만나는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중도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것은요, 늘 개척교회에다 셋방에 사셨는데

어찌 그리도 늘 당당하셨는지 몰라요.

팔복이 체질화 되어 있고, 천국이 임하셨으니까 그렇지요!

 

제가 몰랐을 때는, 그 당당함이 얄밉기까지 했었지요.

아들이 등록금이 없는데도, 아버지는 어찌 그리 당당하셨는지요.

 

아버지 등록금!’

있어 봐!’

 

아버지는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가셨다가, 몸이 허약해 보였는지 뽑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일이 마감 날인데, 마침 오늘 해외우편이 하나 날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할렐루야! 아들아,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셨습니다.

 

사연인즉, 아버지가 과거에 국어교사를 하셨는데,

그때 가르친 학생이, 중동에 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과거의 은사가 생각이 났대요.

그래서 보고 싶은 선생님하며 편지를 보냈는데,

그 안에는 제 등록금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쌀뒤주에 쌀이 다 떨어지면,

바깥에 나가보니, 까만 비닐봉투에 쌀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걸 제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버지의 신앙이었고, 제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제 신앙은, 제가 지금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사탄의 데이터를 뛰어넘는 신앙!

팔복을 체질화하는 신앙 말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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