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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도덕적으로 개입하시는가? 삼하11:14-27 15.06.14스크랩, 출처
◑하나님의 도덕적인 개입..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신데, 왜 이렇게 크신 하나님이
인간의 작은 행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실까 궁금하실 때가 없습니까? ←문제 제기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현대과학과 천문학의 발달에 의하여, 우주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데
하나님이 그것을 지으셨으니, 하나님이 도대체 얼마나 크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이 그 바쁘신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작은 생각과 우리의 작은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실까요?
그리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실까요?’
아마 여러분 중에는 거기에 대하여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못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왜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간섭하실까?’라는 의문을
한번쯤은 가질 수 있습니다.
▶대학교 총장이,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도할 수는 있지만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고
그들이 누구랑 싸우고 어떤 갈등을 빚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유치원 교사가 아동들을 보살피고 지키지만
놀이터에서 누가 누가와 싸우고, 누가 누구와 친한지는 알 수 없고,
거기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냥 서로 친하게 지내라고 말할 뿐입니다.
과거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맞고 집에 온 것을 분이 여겨서
남자들을 동원하여 그 때려준 사람들에게 보복을 했다는 기사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안개는 거기까지예요. 내 혈육, 내 자식, 내 가족, 내 친한 친구를 두둔하고
편을 들어주려고 하지만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남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관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명분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차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아, 내가 보기에는 저 사람이 잘했고, 저 사람이 잘못했다’라고 판단해서
잘못한 사람을 때려주었다면, 그 사람은 경찰에 붙들려 갈 것이고
그리고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것입니다.
만일 동물의 왕국을 촬영하던 기사가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는 것을 보고
촬영을 멈추고 뛰어가서 얼룩말을 보호해주려고 했다면
촬영은 무산될 것이고, 생명의 위협을 초래할 것입니다.
촬영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대로 촬영을 하지
거기에 대하여 어떤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악어가 소를 잡아먹는 것을 신나게 촬영을 하지
어느 누구도 거기 가서 그 짐승을 도우려고 하는 기사는 없습니다.
그렇게 싸울 수도 없고 또 목표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죠.
다윗이 곰과 사자를 쳐 죽인적은 있지만
그것은 초원의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양떼를 낚아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사에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근거로 개입을 하시느냐?
이것을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자신의 억울함과 한을 풀어줄 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라는 교리를 만들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결국에는 심판을 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심판’(신학)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갚아주실 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게 된 것이 아니냐 라는 주장인데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와
하나님의 계시로 비롯된 종교를 우리가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내 욕망, 내 불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고 할 수 있어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모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알라의 심판, 알라의 정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미혹, 인간의 불만을, 알라의 이름으로 표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본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자가 만일 운전을 하다가 종교경찰에게 걸리면
길바닥에서 매를 맞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여자가 그런 행실을 하는 것은
알라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때려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자가 운전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것을 따지고 벌을 주려고 하실까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작은 행위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에요. 밧세바는 남편이 있는 여자였는데
다윗이 밧세바를 좋아해서 데려다가 자신의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밧세바가 아기를 배었어요.
성경에 별의별 이야기 많아요. 사람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성경에 오로지 경건한 이야기만이 기록돼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에게 일어날만한 일이라면 성경에는 다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요.
그래서 다윗이 머리를 굴려서 우리아가 휴가를 받아와서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아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집에서 자지 않고, 곧바로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이제 다윗에게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은폐 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자기 신복들을 시켜서
전쟁터에 우리아가 혼자 적진에 남게 하고 다 후퇴하게 해서
우리아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이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기의 처를 삼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이야기에요.
그런데 본문 마지막절에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 NIV성경을 보면 ‘다윗의 소위를 여호와가 기뻐하지 않았다’라고 써있는데
저는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따르는 제 3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행실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있고, 기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승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귀엽게 여길 수는 있지만 기뻐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자식에 대해서는 자식이 바른 일을 행한다거나,
자식이 책임을 진다거나, 자식이 부모에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행하는 일을 보고 기뻐하실 때가 있고, 기뻐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죄인은 주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든, 하나님의 심판이든, 하나님의 무서움이든,
이런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할 때가 대부분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소리를 듣고 무서워 한 것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은 방법보다는 나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기뻐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려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럽니다.
하나님은 나쁜 분, 무서운 분, 두려운 분, 내가 피하고자 하는 분,
그러나 그건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좋으신 하나님. 할렐루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따른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 또 피하고자 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소위(소행)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다윗의 경우에는.. 여러분 다윗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 어린 나이에 골리앗과 싸워 이긴 자,
장차 그의 혈통을 좇아 메시야가 탄생할 자,
다윗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불의한 일을 행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의 소위를 기뻐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기뻐하지 않으셨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사람은 팔이 안으로 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냐?’ 하지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끼리끼리 사상이에요.
우리가 남이냐? 우리끼리 돕고, 우리끼리 편이 되고, 이런 식으로 눈을 감아줍니다.
내편이기 때문에, 내 자식이기 때문에 눈을 감아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마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는
‘우리가 예수님 믿은 후에 이거 다 해결된 거 아닙니까?
이제 와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관여를 말하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실지 몰라요.
‘하나님이 더 이상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송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것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셨습니까?
은혜라는 것이 그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잘 위하면
이웃에 대하여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다윗이 하나님의 기분만 잘 맞춰 드리면, 이웃에게 어떻게 행해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이
누구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곧 나(예수님)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 못하면서
예수님에게만 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십자가에는 수평이 있고 수직이 있습니다. 이것이 만나는 것이 십자가에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게만 잘하는 수직적인 것만이 아니에요.
서로에게, 이웃에게 공의롭게 하는, 수평적인 것이 있어야
하나님이 그것을 경건한 신앙으로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공의’란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잘 하기만 하면, 그 이외에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불의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고
나의 불의함에, 하나님을 끌어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매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불의함에 하나님이 파트너가 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신앙이 안 뜨거운 것처럼 보이더라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공정하고, 남을 바로 대우하는 사람이
뜨거운 것 같은데 사람들을 함부로 다루고, 불의함을 밥 먹듯이 행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융숭하게 대접을 해드리고,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아무리 잘 섬겨도
이웃에 대하여, 내 주변에 작은 자에 대하여 함부로 대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건 잘못 믿는 것입니다. 잘못 배운 것입니다. 누군가가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신앙을 우상화하고 기복신앙화 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 발전을 막고, 신앙에 발전을 막고, 기독교에 성숙화를 가로 막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는, 의를 행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우리는 늘 기도하지요. ‘하나님 좀 나를 도와달라고..
나에게 무심하지 말고 내 삶에 간섭을 해달라고..내 삶에 개입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면
나의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하여 개입하시는 것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는 받고, 하나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딸이 친정어머니에게 살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면
어머니가 오셔서 부엌이 지저분하다고 나무라는 것을 마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IMF에 차관을 들여왔을 때 IMF가 와서
국내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것을, 마다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우리에 행위를 살펴보시고
거기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하시는 것을 우리가 마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통하여 기쁨을 얻기를 원하실까요?
여러분 이것은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통하여 기쁨을 얻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성공은 부모의 성공이에요. 자녀의 실패는 부모의 실패에요.
자녀의 아픔은 부모의 아픔입니다.
우리는 자식이 공부만 잘하면, 아무리 잘못행해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얼굴이 예쁘면 다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업적을 세우고 공로를 세워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감탄하시는 적이 없어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감탄하신 적 없어요.
다윗이 업적을 거두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그런 말씀 없어요.
그러나 다윗이 자기보다 힘이 약한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분명히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를 지켜보기를 원하십니다.
▶욥의 예를 안들 수가 없습니다. 욥이 자기의 소유가 다 잃어버렸습니다. 다 날아갔어요.
욥에게는 큰일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욥에 잃은 것을 2배를 더해주셨습니다.
욥에게는 큰일이었지만, 하나님께는 큰일이 아니었어요.
그럼 하나님은 무얼 보기를 원하셨습니까?
욥이 이 모든 것을 잃은 후에, 어떻게 하느냐를 지켜보기를 원하셨어요.
그게 하나님의 관심사였어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관심사와 달라요.
우리는 제물을 잃든, 건강을 잃든, 괴로운 일을 당하든,
그것을 크게 여기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염려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 때문에 별로 염려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심사는, 그 후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걸 지켜보고자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을 통하여 당신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아주 중요한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기뻐하게 만든다는 구절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
분명하게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하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절이에요.
그것 이외에도 야고보서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건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 성경이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나쁘신 하나님을 만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쁘신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쁜 방법(자기가 받는 징계, 남의 보복 기원)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따르지 마세요.
좋은 쪽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따라야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이 죄인도 사랑하시는데, 무조건 다 사랑하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은.. 신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죄인이 정말 가슴을 찢고, 심장이 부서지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죄인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있는데,
이건 큰 오해이고, 그 오해의 결과는 모두 자기 몫입니다.
‘하나님이 세리, 창기,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세상의 저변층을 무조건 다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세리의 죄, 창기의 죄, 죄인의 죄를 다 끔찍이 미워하시지요.
그런데 그 중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도덕법을 범할 수밖에 없는
세리, 창기, 죄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셨지요.
그들은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를 늘 한탄하고 살았지요.
대놓고, 밥 먹듯이, 뻔뻔하게 하나님의 도덕법(율법)을 범하는 세리, 창기, 죄인을
예수님이 무조건 다 사랑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