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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게 하시는 섭리

LNCK 2015. 7. 4. 18:14

돌아가게 하시는 섭리            왕상19:1~21      11.06.03 출처보기

 

 

 

오늘 엘리야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신 이야기죠.

이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엘리야가 굉장히 고갈되고 디프레스션/우울증이 찾아와서

차라리 죽고 싶다.. 우울증 증상이죠. 이런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만지심을 받게 되는지..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런 과정을 거치게 하셨는지.. 이런 부분을 나눌까 합니다.

 

저희가 읽은 내용 이전에는, 엘리야가 놀라운 영적 성공을 거두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영적 능력 대결을 하죠. 제단에 엘리야가 기도할 때 불이 내리고

능력으로 말미암아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그러면서 엘리야는 생각했을 겁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아합은 하나님께 돌이킬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될 것이고

우상숭배가 끊어질 것이고, 이 땅에 놀라운 영적 해방이 올 것이다.’ 기대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내 시대에 이걸 볼 수 있겠다 했는데

더군다나 그걸 뒷받침해주는 한 증거로 비가 옵니다.

오랜 기근 가운데 있다가 아 이제 영적인 기근에서부터도 해방될 것이다..

그런 많은 기대감을 가졌는데, 왠걸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세벨이 너를 죽여버리겠다.’

이 죽여버리겠다는 말 한 마디에, 엘리야가 위축되어서 숨으려고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왜 이렇게 낙담하게 됐을까요?

살아야지.. 하는 생각에서 살 방법을 찾느라고.. 그런 것만은 아닐 거구요.

엘리야가 이렇게 힘들었던 이유는요.

자기가 기대한대로 환경이 바뀌거나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누구에 대한 속상함이 생겼을까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이게 내 충성의 결과입니까?’ 이런 생각이 왔어요.

내가 이토록 열심히 했는데, 왜 달라진 것이 없습니까. 왜 내 기대대로 되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기대한대로 된 것이 있었어요. 제단에 불이 내렸고 기근 가운데 비가 왔어요.

그런데 정말 기대했던 중에 하나, 이스라엘의 왕과 왕비가 바뀌고

그것에 영적인 해방이 오는 것을 기대했지만, 기대한대로 되지 않았어요.

 

엘리야의 반응을 보면, 광야로 들어가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로뎀 나무는 우리 생각에 큰 나무 같은데, 큰 나무가 아니고 낮은 가시덤불 같은 거예요.

실은 로뎀 나무 밑에 그늘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곳은 아니고

여전히 그늘을 찾기 어렵고, 왠지 어디에 몸을 둬야할지 모르는,

그런 광야에서 하나님께 소원합니다.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잘 보면 무슨 이야기냐면 저는 이런 느낌을 받아요. 삐진 거예요.

하나님. 아니 그 아합하고 이세벨 마음을 바꿔주시든지..

그게 아니면 왕위에서 쫓겨나게 하든지 제거되게 하시면 되잖아요.

하나님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이 사람들 때문에 도망가야 합니까.

바뀐 게 없습니다. 이게 뭡니까.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사회가 바뀌지 않습니까. 환경이 바뀌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왜 늦추시고 계실까요?

제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아합과 이세벨에게 너 망할 거다, 죽을 거다계속 이야기하세요.

여러 번 이야기하세요. 왜 그럴까요?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기회를.

 

하나님은 엘리야도 사랑하시지만, 아합과 이세벨도 사랑하셨던 걸 볼 수 있어요.

계속 기회를 주세요.

 

우리는 때로 이런 하나님의 긍휼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이해가 잘 안돼요.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

 

한 가지 예가 있는데 몽골에 국제 대학교에, 러시아에서 와서 공부하는 학생이 많은데

그 중에 시베리아에 여러 공화국이 있고, 그 중에 투바 공화국이라고 있는데

거기 출신 아이들이 좀 거칠어요. 그런데 투바 출신 학생들이 한번은 그 지역에 와서

울란바토르에 살고 있는 깡패들과 패싸움이 연루됐어요.

 

그래서 공격을 받게 됐는데, 몽고 폭력배들이 굉장히 집요해요.

그래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투바 학생들을 여러 번 급습해서

학생들을 때리고 금품을 뺏고 그러는데

이걸 학생들이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 ‘네가 신고하면 너만 죽는 게 아니라, 투바에 있는 너희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죽을 것이다.’

그런 협박을 하는 거죠.

한 명 죽이고, 3년 감옥 갔다 오면 돼.’ 무섭죠.

 

그러니까 투바 학생들이 신고도 못하고, 쫓기고, 두들겨 맞고 그러니까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됐어요.

 

그 상황 속에서 저희 학교의 한 용감한 교수님이

마음을 굳게 먹고 그 폭력배들을 고소해서, 몽골 경찰들을 데리고 가서 급습해서 붙잡았어요.

 

그런데 보니까 그 친구들을 붙잡아 와서, 그 몽골 경찰들도 굉장히 터프하거든요.

유치장 안에 던져놓고 몽둥이로 마구 패는 거예요. 그렇게 막 두들겨 패고 있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유치장 밖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교수님이

이제 한 건 했다. 겨우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속으로 하나님 나 잘했죠?’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하나 했어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의외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뭐냐면 어떡하다가 내 자녀가 이 지경이 됐니?’

 

이 교수님이 처음엔 당황하고 화가 났어요.

하나님,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감행했는데

하나님, 나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셔야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쟤네들 편을 들 수 있어요?

쟤네들 진짜 나쁜 애들인데. 우리 애들 잡아다가 패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던 친구들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런데 계속 그 질문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맞다, 주님의 말씀이 맞다.’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생각과 차원이 달라요. 때로는 그것이 불편해요.

왜냐면 하나님이 내 편만 들어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동일한 긍휼을 가지실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납하실 수 있는 거예요.

 

엘리야가 불편했어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하나님 이건 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차라리 날 죽이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 너 왜 이렇게 속이 좁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먼저 위로해주세요. ‘힘들지? 내가 그걸 알아.’

 

남편들이 이걸 못해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래, 내가 네 마음 안다. 너 그러다가 탈나겠다. 일단 먹을 것부터 먹고 봐라.’

 

먼저 먹이시고 그리고 난 다음에 엘리야가 길을 가게 하시는데

40주야(밤낮)를 갔다고 그러죠.

 

실은 브엘세바 근처에서 호렙 산까지 한 300여 킬로미터.

물론 힘들고 지치는 거리지만, 부지런히 가면 3~4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요.

빨리 가면 3일에도 갑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40일을 갑니다. 왜 그렇게 오래 갈까요?

 

하나님이 처음부터 엘리야보고 호렙산으로 가라고 했던 거 같지 않아요.

엘리야가 자기 마음 속에 여러 갈등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는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아요. 40일 동안.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하나님을 찾습니다. 40일이 걸립니다.

 

이게 낭비인 것 같은데, 하나님은 때로는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게 하십니다.

 

우리 현대사회는요 특별히 미국 생활이나 한국 생활을 보면, 직선거리를 원해요.

네비게이션. 최단거리. 가장 빠른 길..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는 방식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몽골에서 비행기를 탈 일이 있어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지금 몽골에 푸르름이 막 돋기 시작해요.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있어요.

 

강들이 형성되는데, 강이 똑바로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바다를 향해 쭉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구불구불 이렇게 갑니다. *사행천

 

그런데 제가 볼 땐, 목표가 없이 가는 것처럼 보여요.

강이 똑바로 가지 않고, 구불구불 자기 멋대로 가는 것 같은데

그런데 방향이 실은 정해져있어요. 그게 어떤 방향인지 아세요?

낮은 곳. 낮은 곳을 향해요.

 

인도함 없이, 제멋대로 흐르는 것 같은데, 인도함을 받아요.

무엇의 인도함? 중력의 인도함.

 

그런데 그 나타난 결과는, 갖가지 지형을 만나면서 구불구불 흐르는 거예요.

그런데 강이 직선으로 가지 않고 구불구불 가는 것이, 우리한테 유익합니다.

 

그렇게 감을 통해서, 강 주변에 나무들이 자랄 수 있어요.

몽골의 초원은 풀밖에 없는데 (나무가 없는데) 이 강 주변에는 나무들이 자랄 수 있어요.

 

나무들로 인해서 푸르름이 형성되는데

강이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푸르러지는 지역이 점점 넓어져요.

 

어떤 강은 바다까지 못 가기도 해요. 호수까지 못 이르기도 해요.

중간에서 말라버려요. 하지만 그러한 길, 내려가는 그 길을 따라 가는 과정에서

주변의 푸르름이 더해지게 돼요.

 

이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인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직선 코스, 앞만 보고 계획대로 가는 그 삶 가운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그 중력의 섭리를 보기가 어려워요.

낮은 곳. 그리고 돌아돌아 가는 곳.

 

얼마 전에 홉스골이라는 몽골의 큰 호수를 다녀왔어요.

 

호수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려고 갔다 왔는데,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데 강아지 한 마리를 봤어요.

강아지가 막 긁고 하품하고 막 뒹굴뒹굴 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멍하니

그러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꼬리를 흔들면서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걷는데 보니까, 처음에 뒤따라오던 녀석이 저희를 앞질러가요.

그러면서 힐끔힐끔 우리를 봐요.

 

우리가 호숫가 나무 많은 쪽으로, 빙 둘러서 돌아가는데

이 녀석이 앞질러가면서 우리를 계속 보면서 방향을 맞춰요.

 

우리가 한 군데에서 머물러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거기서 멈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제가 문득 그걸 보면서, ‘혹시 이게 선교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향이 없이 살아가던 누군가에게,

내가 그 땅에서 걸어줌을 통해서, 방향을 제시해주는 거예요.

 

그 강아지에게 그날 하루의 목표가 생겼어요. 아주 신나서 우리를 따라오는 거예요.

제가 그 땅에서, 한 방향을 향해서 걷는 것 그 자체가

주변에 어떤 에너지를 주는 거예요. 방향성을 주는 거에요.

 

그 날 그렇게 해서 강아지와 즐거운 산책을 했어요. 강아지도 아주 신났어요.

 

이게 선교인 것 같아요.

그냥 그 땅에서 한 방향을 향해서 걸을 때, 그것이 주는 영향력이 있어요.

(구불구불한 강물처럼요)

 

엘리야의 길, 하나님께서 40일동안 방황하게 하세요.

멈췄다가 갔다가 여러 곳을 다니게 하세요.

 

하지만 그가 가야 되는 한 목표가 있었어요. 하나님을 찾는 길이에요.

하나님이 그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즉각 만나주시면 됐을 텐데,

하나님이 그에게 그 분을 찾아가는 충분한 시간을 주세요.

 

, 이제 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여호와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그런데 이걸 다른 번역으로 보면 왓 아유 두잉?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너 여기 왜 온거니. 너 왜 나 찾아왔니?’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셨을 때 엘리야가 할 말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내가 정말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내가 이 바알의 선지자들 죽여가면서 이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 하나 남았습니다.

. 지금 나 하나 제대로 버티고 있고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이 하나 남은 나까지도, 이들이 공격하고 있는데

하나님, 뭐하고 계십니까.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고 계십니까?’

 

,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설명을 안 하세요.

, 너 왜 이렇게 속이 좁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네가 나를 만나야 한다.’ 하시는 것 같아요.

 

내가 너에게 나를 보여주겠다.’ , 하나님께서 처음에 권능 가운데 임하십니다.

바람 가운데. 불 가운데. 지진 가운데..

 

엘리야가 알았던 하나님은요, 불의 하나님이에요.

불의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불을 주셨는데, 그 불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은 없었어요.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어요.

 

그것이 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 세미한 음성을 주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시는 거예요.

 

내가 왜 그렇게 기다리게 하는지 아니?

내가 왜 그들을 두고, 이렇게 오래 참는지 아니?’

 

그 세미한 가운데, 그런 뜻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제가 해요.

 

, 그 가운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너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니?’

하나님은 다른 설명을 안 하세요.

너 지금 뭐하고 있니. 왜 그러고 있는 거니?’

 

엘리야가 다시 말합니다. 똑같이.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은데,

나 하나 남았는데, 나도 지금 힘들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다른 말씀을 안 하세요.

여러분이 뒷 구절을 보고 이해가 되세요? 무슨 내용일까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 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 나 하나 남았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하는데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너는 지금 이스라엘이 왜 안 변하냐고 그러고 있지?’

내 나름의 계획이 있단다.

지금 현재 중동 지역에 가장 강대한 나라인 아람, 여기의 왕을 내가 바꿀 거야.

그리고 이스라엘 왕도 바꿀 거야. 그리고 너 혼자 남았다고 그랬지?

너의 뒤를 이을 사람이 있어. 너 힘이 들면 여기서 놓아도 된단다.

너의 뒤를 이을 사람이 있어. 너 혼자 남았다고 그랬지?

내가 너 외에도 7천명을 남겨두었단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는 하나님이야.

네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보다 큰 틀에서 너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그걸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냐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엘리사에게 세 사람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셨죠?

하사엘, 예후, 그 다음에 엘리사.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 성경 뒷부분을 보면

엘리야는 엘리사 한 사람한테만 기름을 부어요.

 

그리고 하사엘에게 기름 부은 사람은 엘리사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예후에게 기름 부은 사람은 엘리사의 생도였어요.

 

세 대에 걸쳐서 기름 부음이 이루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엘리야보고 하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세 대를 거쳐가면서 각각 기름을 따로따로 붓게 되는 걸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셨죠.

‘7천명 남겨두었다. 너 혼자 힘든 게 아니라 너는 나의 큰 계획 가운데 팀플레이하고 있는 거야.’

 

보세요. 그 다음 번에는 엘리야는 등장하지 않고

다른 선지자가 예언을 받아서 아합 왕에게 예언을 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엘리야는 잠시 무대 뒤로 내려가서 공백을 갖고

다른 선지자들이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왕에게 대언하는 일들을 합니다.

 

이 예언 이후에, 엘리야의 영적인 역할은 굉장히 제한되게 되고요.

엘리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 됩니다. 대를 거쳐요.

 

또 보면, 하나님이 아합왕보고, 아람의 왕이었던 벤하닷을 죽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죽였으면, 아마 엘리야가 하사엘에게 기름 붓게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합 왕이 순종하지 않죠. 아합 왕이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다음 대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적인 권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이루십니다.

그 일들을 다 엘리야의 일로 보시는 거예요.

엘리야가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 일들이 엘리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걸 보십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서셨을 때, 거기에 누가 있었어요? 모세와 엘리야.

모세와 엘리야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세대의 임무가 완수되지 않은 것처럼 느끼고 죽었던 사람들이에요.

모세가 자기가 가나안까지 들어가고 싶었는데, 여호수와가 그 일을 대신하죠.

그러면서 모세는 어떻게 되죠? 하늘로 들리우죠.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데.

엘리야의 경우도 엘리사에게 다 넘겨주고, 자기는 하늘로 들리웁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인 것 같아요.

길을 가는데, 초원에서의 길이 특별히 강이 가는 방향이 아래를 향해서 가는데

이것이 이렇게 구불구불하면서 간다..

 

제가 이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식이 이러한 강의 흐름으로도 한 번 표현될 수 있겠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인도하시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번지점프 아세요? 절벽 같은 데서 발목에 줄을 묶고 밑으로 떨어지죠.

그럼 어떻게 돼요?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죠. 다시 떨어졌다 올라왔다.

 

제가 그 장면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번지점프의 스릴을 느끼고 싶은데

많은 분들이 보면 어떻게 하고 있냐면, 발 한쪽은 대에 그냥 두고, 한쪽만 허공에 대고

나는 그래도 적당히 영적인 스릴을 누리고 있어. 무섭다그러고 있어요.

 

그런데 뒤에서 누가 탁 건드리려고 하면 어떻게 되죠? 어휴,

큰일 날 뻔했네. 두 다리를 다 놓을 줄을 몰라요.

 

그래서 실제로는 번지점프를 누리고 있지 못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다 자기 두 다리를 믿고 있어요.

이걸 차마 못 떼요.

 

그런데 제가 경험해봤거든요. 하나님을 향해 그냥 뛰어내리는 것.

제가 인생에 그런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저에게 주어진 영적 통찰력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제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한번은 기도하던 중에 유학을 놓고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전공을 바꾸라는 사인을 주셨어요.

 

전공을 바꿔서 유학가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인데. 받아줄 학교도 없을 것 같은데.

기도 가운데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말씀을 주셔서

제가 그것에 순종해서 방향을 바꿔서 미국 대학에 지원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내게 됐어요.

 

그 기간이 저에게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향해서,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고요.

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어요.

 

그 후 몽골에서도 7년을 사역했는데, 하나님께서 몽골에 저를 보내신 이후에

저는 어떻게 보면 몽골로 갈 때 또 한 번의 번지점프를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잡아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뛰어내리는데,

이 잡아줄 것을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떨어지는 순간이 너무 공포스러워요.

죽음이에요 죽음.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분명히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고 뛰어내리면 스릴이에요.

 

셋째 아이가 있는데, 얘를 안아서 훅 올렸다가 내리잖아요. 얘는 그걸 너무 즐겨요.

눈을 삭 감으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즐겨요.

 

이 짧은 순간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담겨있어요.

아이가 아빠에게 신뢰가 없으면 즐길 수가 없어요. 공포의 순간이 될 수도 있어요.

아빠를 신뢰하기 때문에 즐기는 거예요. 재밌는 거라는 것을 알아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면서 가는 길은

비록 환경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전개되지 않을지라도

그 가운데서 스릴을 찾을 수가 있어요. 기대감이 있어요.

 

제가 지금은 어쩌면 또 다른 번지점프를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 차례의 번지점프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냥 맡기고 하나님 속으로 뛰어들 때

보통 번지점프가 촥 내려오면 탁 줄이 굉장히 장력이 세서 탁 내려왔다가 올라오죠.

그리고 다시 떨어져요. 그러면서 이 안의 에너지가 생겨요.

 

제가 말씀드렸죠, 물길이 이렇게 가면서 거기서 생기는 영향력이 있다고.

이게 뛰어내림이 갖는 나는 그냥 망하는 것 같은데

뛰어내리는 걸 통해서 생기는 에너지가 있어요. 주변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있어요.

그래서 그 영향력 때문에 튀어올라요.

 

이 자연계의 법칙은요, 한번 떨어지면 두 번째 올라올 때는

그 떨어졌던 자리보다는 덜 높은 데로. 다시 떨어질 때는 덜 낮은 데로. 그렇게 되죠.

 

그런데 제가 영적 세계에서의 원리를 보니까

떨어졌는데 올라가는 건 더 위로 올라가요.

하나님께서 발을 높게 하셔서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나는 뛰어내렸는데 하나님은 나를 높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떨어지는데 더 올라가요.

나의 목표는 이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야 해요.

아래를 향할 때 올라가는 영향력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다 점프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요셉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다이빙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모세도, 다윗도 그렇고. 그런데 다이빙 이후에 올라가는데

그 다음에 또 다음의 내려감을 준비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멈춰서 다이빙 보드를 붙잡고 나는 이만하면 됐어. 거기서들 많이 멈춰요.

 

지속적인 아래로의 방향성을 유지하면 계속해서 그 스릴을 누릴 수 있어요.

영적인 원리인 것 같아요.

 

엘리야가 하나님께 맡겼어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어요.

그랬더니 하늘로 들리움을 받는 거예요.

엘리야가 원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결론이에요.

 

엘리야가 원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놀라운 변혁이 있고 변화가 있는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합 왕의 몰락을 최대한 늦추세요. 이세벨의 죽음은 더 늦추세요.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엘리야가 원하는 대로 안됐어요.

 

그런데 대신에 엘리야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을 때

올림을 받아요. 내려가는 순간 이후에 올라가는 역사가 있었어요.

 

말씀을 다 전한 것 같습니다. 같이 기도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 안에 신앙생활 가운데 지속적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죠?

 

하나님.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습니까.

내 열심이 특별한데. 그런데 상황은 이렇게 어려운데.

지금 나만 혼자 남아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 대적은 여전히 저렇게 팔팔한데.

하나님 왜 대적은 건드리시지 않고 나를 건드리십니까.

왜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을 보고만 있게 하십니까.’

 

그러면 아 죽고 싶죠. 차라리 하나님. 이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긍휼을 신뢰하겠니?

내가 너의 허리를 붙들고 있고 밑에서 내가 손으로 너를 받치고 있을 텐데

너는 그 모습 그대로 뛰어내리지 않겠니.

나의 긍휼을 향해 신뢰하면서, 뛰어내리지 않겠니?

내가 너를 받을 것이고 너를 높일 것이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안 될 수도 있는데

내가 너를 위해서 예비한 특별한 방법이 있다.

너는 이 과정 가운데서 나를 누리지 않겠니. 나를 경험하지 않겠니.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영향력이 있단다.

그 과정에서 너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엘리야를 힘들게 하셨던 하나님. 엘리야를 좌절시키셨던 하나님.

그 분은 불의 하나님으로만 엘리야에게 인식되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미한 음성을 가지고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찾아오길 원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알았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너는 이 과정에서 또 한번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겠니.

너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영향력을 기대하면서. 네가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좋단다.

하지만 내가 너를 통해서 이 땅 가운데 드러내길 원하는 나의 마음이 있다.’

 

같이 기도합니다.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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