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1

오직 은혜

LNCK 2015. 8. 10. 10:21

오직 은혜                 2:11~16, 3:16~17                       11.02.11.출처보기

 

 

믿음에 있어서, 은혜의 역할

 

은혜가 하는 일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도록, 믿음을 가지도록 '도와'줍니다.

믿은 후에,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즉 성화의 삶에 성숙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믿음으로 구원(칭의)을 얻은 후에,

다시 자기 율법적 노력으로 성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오직 은혜로, 성화와 구원의 완성에 이릅니다. 이렇게 하도록 은혜가 '도우십니다.'

 

다만 은혜를

'나는 로봇처럼 가만히 있어도 되는, 은혜가 다 알아서 해 주시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고,

나는 책임과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체이지만, 내가 연약한데, 은혜가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시작.

우리가 믿는 기독교, 그 가운데서도 개신교는 복음을 따르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대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데,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복음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대가 없이, 즉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복음입니다.

즉 기쁜 소식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이 복음을 믿는 일에, 모범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의 확신'이 매우 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저와 우리 크리스천들을 돌아볼 때마다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복음을 외치고, 늘 그렇게 복음을 잘 믿고 있는데,

왜 교회에 더 오래 다닐수록, 더 완고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인데,

그렇게 율법적인 한국교회에서

왜 크리스천다운 삶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복음을 외치지만, 사실은 율법적이고,

율법적이면서도 삶은 없는

이 모순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결과가 신앙의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왜 그런 것일까? ..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가면서, 그에 따라 신앙이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갈수록 더 (외식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저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던 가운데,

   복음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 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혹시 '복음주의' 라는 이름의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복음의 일부를 가지고, 전체로 잘못 확대함으로써

   복음에 정말 중요한 다른 부분들을 제거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기초부터 하나씩 다시 꼽아보며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그 복음에 가장 기초적이며,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이신칭의'로 불려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복음인데,

본문에는 그 복음이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요약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렇게 단순화 하곤 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여기에서 행위란, 윤리적 행위를 말하고,

믿음이란 십자가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종종 이해됩니다.

 

그래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은, '윤리가 아니라 교리'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됩니다.

우리는 윤리적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교리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교리를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이후에 우리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누구든지 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윤리적인 삶의 원칙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믿음을 오직 교리로만 관련되었기 때문에, 윤리의 원칙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다시 율법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이, 결국 율법으로 귀착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당연히 그렇듯 삶이 따라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이렇게 잘 믿고, 구원의 확신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 믿음으로부터, 삶이 나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복음이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서 있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그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아주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복음을 정식화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과 싸워서 복음을 지켜내는 것을,

평생에 과업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결과, 우리는 바울이 폐기시킨 율법을,

바울의 이름으로 다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윤리적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사람도 윤리적으로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 죄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데,

인간은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친히 그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내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 뜻은,

   나의 율법적/의지적/윤리적 노력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 윤리적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나를 도우셔서, 구원의 완성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로봇처럼 다 해결해 주신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은,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음을 통한 구원, 은혜로 받는 구원을 말할 때

이 말은,

그동안은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시지 않다가

예수님이 오신 후에, 구원의 원칙을 바꾸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이 이렇게들 얘기합니다.

'전에는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는데,

이제는 은혜로 구원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원칙을 바꾸셨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가르친 '오직 은혜의 복음'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구원의 원칙, 은혜의 원칙을 재확인 하는 것이지,

결코 새로운 구원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의 원칙이 바뀐게 아니라, 구약시대에서 내려오던 은혜의 원칙이 다시 관철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원칙을 다시 관철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은혜를 집단적으로 사유화하여

은혜를, 특권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은혜를 독점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 즉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했고,

그래서 이제는, 마치 율법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오해되어졌습니다.

 

 

율법의 행위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의 특권을 보여주는

외적 지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구약 중간시대, 그리고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수많은 이방인 민족들가운데 섞여 살면서

신앙적,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스스로 다른 민족과 구별시키는, 그러한 여러 표지들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결법, 안식일법, 할례 등으로 대표되는,

율법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인 행위를 규정하는 율법(도덕법)입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유대인 정체성의 외적인 표식으로서 기능하는 것(의식법)입니다.

 

율법적으로 산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유대인들은, 외적인 율법의식을 지킴으로써

그렇지 않는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윤리적인 기능''구별하는 기능'의 두 가지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구약 중간시대를 통해서, 이방민족들 가운데 살아온 유대인들이

집중적으로 발전시킨 율법의 기능은

첫 번째 윤리적 기능보다는

두 번째 기능, 즉 유대인의 정체성의 외적 표지로서의 기능이었습니다.

 

,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2: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2:16a, 새번역

 

이 구절이 말씀하는 것은, 단순한 행위와 믿음의 대립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면

윤리와 교리가 대립되는 것처럼 이해(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행위입니까?

'율법을 행하는 행위'입니다.

 

또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행위''믿음'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행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대립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율법의 행위''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위의 새번역은 풀어서 쓴 것이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인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단지 예수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요,

오늘은 '율법의 행위'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행위'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동안 그것을 '율법을 행하는 윤리적 행위'라고 단순하게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바로 앞에 나오는 2:11절부터

그 문맥 속에서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11절부터 읽어보면, 소위 '안디옥 사건'이라 불리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 이슈가 된 것은 '음식법'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세웠고, 바울과 바나바가 목회하던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바울 자신도, 스스로를 이방인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법에 따르자면, 유대인은 이방인과 절대로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지만,

안디옥 교회는, 그 율법을 따르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식탁에서 어울려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2: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게바 즉 베드로가 방문하여,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야고보에게서' 즉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몇몇 신자가 안디옥을 방문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음식법'의 울타리를 이미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이후에

베드로는 늘 유대인들 속에서, 유대인을 상대하며, 유대인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 율법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서, 함께 식사를 잘 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것이 부담이 되었던지, 식사를 하다가 황급히 일어나, 그 자리를 피해버린 것입니다.

 

그로인해 바울이, 베드로를 나무랐다는 것입니다. 그게 14절인데요.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는 16절은

이런 배경 가운데 쓰여진 구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에 나오는 이신칭의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맥, 소위 '안디옥 사건'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안디옥 사건을 배경으로 읽어볼 때

16절에 나오는 '율법의 행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건 음식법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 할례입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식탁에서 물러났다고 말씀했습니다.)

 

음식법과 할례는,

율법의 2가지 기능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요?

 

1) 윤리적인 기능입니까?  2) 유대인을 구별하는 기능입니까?

, 구별하는 기능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정체성의 표지로서의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율법의 행위'

-율법의 윤리적인 행위를 뜻하지 않고,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외적 의식을 뜻합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말씀의 뜻은,

'윤리적인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라는 뜻이 아니라, (물론 이 말은 맞지만)

 

'너희가 율법을 지킴으로 너희 스스로 이방인과 구별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윤리적인 행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 16절은,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16절에서 사도바울이 뜻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윤리가 아무 관계가 없다' .. 그런 말을 하려는 뜻이 아니라

(그런데 과거에 우리는 이런 뜻으로 오해해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에 관계없이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를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구원 받은 신자의 거룩한(윤리적인) 삶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롬2;13절과, 17절 이하에서

율법을 자랑하기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았던 유대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은혜를, 특권으로 사유화하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했을 뿐

실제로 은혜 받은 자답게 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세례 받으러 온 유대인들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기만 할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한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그건 우리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요.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통해서요)

 

 

자기 수행이 아니라, 은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삶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끊임없이 성숙시켜 나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율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믿음을 따르는 삶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삶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하면, 하나님께 칭찬 받고

내가 못 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르는 삶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이끄셔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경지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믿음을 따르는 삶입니다.

'율법의 윤리'가 아니라 '믿음의 윤리(성화)'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윤리', 자기 노력적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은혜로 내가 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이처럼, 은혜를 따르는 신앙성장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엡3:16~17절입니다.

 

3: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은,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자기 수행이나, 노력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위 말씀의 주체, 주어를 보십시오. '아버지께서'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물론 나의 순종이 필요하지만요.)

 

우리의 성화 과정은, 결코 윤리적인 수행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머물게 하셔서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심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한 성장이 아니라,

은혜를 통한 성장입니다.

 

그러한 성장이, 여러분 모두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신앙 성장을 이끄시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열어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친히 하실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패와 책임   (0) 2015.11.16
물위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  (0) 2015.08.13
신앙의 최후의 보루  (0) 2015.07.23
돌아가게 하시는 섭리   (0) 2015.07.04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  (0) 201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