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의 문제 창37:1~11 2011.10.28.설교스크랩, 녹취
◑불공평한 사랑이 초래하는 문제들
야곱의 아들들은 장차 이스라엘의 족장이 될 사람들로서
열두지파가 이들로부터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열두 아들들이 하나도 빠짐이 없이 하나님의 구속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들과 같은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있었습니다.
외부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이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데,
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이 편애라는 것은 가정의 분란을 일으키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똑같이 사랑을 하던가, 안하려면 아예 똑같이 안하던가 해야 하는데
편애를 하게 되면 사랑의 불공평처럼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좋은 것이다 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예요.
사랑도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사람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마음에 섭섭함과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이죠.
차라리 사랑이 불공평하게 없었더라면, 상처를 입는 일도 없었을 텐데...
▲본문을 보면,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무엇을 지어 입혔다고 했습니까?
채색옷, 이것은 ‘염색을 한 옷’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그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야곱이 다른 아들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지요.
자기가 낳은 아들인데 왜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보는 눈은 차이점에 주목합니다. 차이점.
야곱이 다른 아들들도 사랑했지만,
요셉은 차이점이 있는 방식으로 사랑한 것을, 그 형들이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고,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으니까, 요셉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망가진 자식이 대성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나 아이들이 고생 없이 평탄하게 풍족하게 자라나는데
어떻게 큰일을 이뤄낼 수 있을까?‘ 이런 염려를 하지만
그런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염려할 부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학교가 그것을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셉도 아버지에게 편애로 망가진 아들이지만, 장차 어떻게 됩니까?
그가 애굽을 구원하고, 자기 가문을 구원합니다.
그러니까 망가진 자식이라고 해서, 크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요셉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는, 인생의 학교에서 받아야 할 시련의 분깃이 있지요.
그건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이 미움을 받게 된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가 형들의 실수를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그가 또 자기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고 자기의 꿈을 말했지만,
우리의 꿈을 남에게 말할 수 있는 때가 있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그 형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어요.
그 꿈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그걸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꿈을 말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이 시험에 듭니다.
내게 귀중한 것이 남에게 귀중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게 귀중한 것을 내가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어야지
섣불리 그것을 남들에게 뿌리게 되면,
내게 좋은 것을 남들도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준비되지 않았을 때 내 꿈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은 업신여기면서
‘전혀 그가 그럴 가망이 보이지 않는데...’
‘이 사람이 허풍을 떤다. 이 사람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이 사람이 뭘 모른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정말로 내 꿈이 이루어질 조짐이 보이기 전까지는
우리도 그것을, 자기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형들은 시기하되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창37:11
아버지 정도 되니까 자식의 꿈을 마음에 두지요.
형들조차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꿈을 자신의 마음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그를 축복하고 위하는 사람입니다.
내 꿈을 자기 마음속에 두어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나를 축복하고 위하는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내 꿈을 시기하고 시샘합니다. 그리고 흉을 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미움의 실체와 속성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다는 구절입니다.
미움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미움...
▲우리는 미움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합니다.
미움이 그냥 나쁘다라고만 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미움이 왜 생기느냐를 알아야합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움의 문제입니다.
이건 정치적인 문제도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도 아니고 문화적인 문제도 아니고
심리적인 문제인데, 사람들 마음속에 미움이 해결되지 않고
그 미움이 하나의 힘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나보다 잘 되는 사람이 미운,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밉고,
나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미운 이 미움의 문제.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예요. 이건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 사람이 웃으면서 가는 것을 보고 묻지마 살인을 벌였죠.
왜 죽였느냐 물었더니
자기는 불행한데 저 사람이 행복해보여서 죽였다고 그랬어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우연히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나는 불행한데 너는 왜 행복하냐하는 마음으로 죽인거죠.
여러분, 이것이...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이 미운 것이예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미운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 계층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지위에 있는 사람도
자기 또래나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 위에 있는 사람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 자기보다 더 앞서가고,
자기보다도 성공적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조차도
장차 이스라엘의 족장이 될, 위대한 미래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아버지가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요셉을 미워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이런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보다도 더 사랑받는 사람, 자기보다도 더 아버지의 은총을 입는 동생이 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움은, 어떤 특정 계층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많이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
그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생각하면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걸 본 친구들이 왜 우느냐? 그랬더니 줄리어스 시저가 대답하기를
“알렉산더는 서른 살에 세상을 정복했는데, 나는 나이 50이 다 됐는데, 이룬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왜 이룬 게 없습니까?
로마에서 그처럼 이룬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시저는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보다도 더 많이 이룬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비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시저가 알렉산더를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알렉산더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았어요.
만일 알렉산더가 여전히 살아있었더라면 미워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목사님! 그럼 목사님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예요. (ㅋㅋㅋ) 당연히 있지요.
“누구를 미워하십니까?”
그런 것도 물어보면 안돼요. (ㅋㅋㅋ)
저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미워한다기보다는 얄미워합니다.
목회자의 세계에도 질투와 시기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갖고 있냐를 가지고 경쟁하지 않아요.
누가 더 좋은 집에 사느냐를 가지고 경쟁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포기했어요. 그런 욕심은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경쟁하는 부분이 더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이 더 뚜렷합니다.
그만큼 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시기와 질투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언사가 불편하였더라.
그러니까 마음속에 품은 미움이, 말을 통해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말에 가시가 돋히고, 말을 한마디 하더라도 가시가 돋힌 말을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하는 것은, 결국은 말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고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면,
BMW 회사의 전무가 미워하는 사람은
무슨 토요타 전무나 현대자동차의 전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같은 회사의 동료를 미워해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BMW와 토요타가 서로 경쟁관계이기 때문에
미워한다면 경쟁회사의 경영진을 미워할 것 같지만
그게 아니고 같은 회사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개신교 목회자가, 멀리 있는 교회 타 종교의 성직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같은 동네 다른 교회 목사님을 미워해요.
왜냐하면 경쟁이 되니까... 우리가 그걸 이해해야 해요.
▲야곱의 아들들이 무슨 이방의 족장의 아들들을 미워한게 아니고
자기의 동생을 미워했죠. 똑같은 원인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느냐?
쉬운 해결책이 없습니다.
미워서 미운데 의지로 그 미움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서 미운데 그 감정을 의지로 "아냐, 안미워! 안미워!" 그런다고
미움이 없어지는게 아니지요.
애초에 미움을 자아냈던 이유가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 감정이 그렇게 쉽게 없어질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생긴 형이 엄마가 보지 않을 때 동생을 꼬집지요.
눈도 파고 그래요. 그런데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만일 엄마가 안보는데 동생을 물에 빠뜨린다면 그건 병적인 것입니다.
꼬집는다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병적인 것이 되는 것은 막아야하지요.
그건 비극이 아닙니까?
이 야곱의 가문에서 일어난 현상이 병적인 현상.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그 대신 노예로 팔아버리고 그 아버지에게는 짐승이 물어갔다고 말함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이 찢어지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동생보다 덜 받는다는 이유로 동생을 미워한 것입니다.
결국은 아버지의 가슴을 찢어지게 했으니까
도대체 여기에서 이득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 불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미움의 비극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버려요.
여기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행복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 공통적으로 불행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미움의 파괴력입니다. 미움의 파괴력.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 미움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1. 미움이라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둘러대서는 안됩니다.
‘아, 이게 미움이다.’
그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나는 아무개가 싫다.”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고
“나는 아무개가 나보다 더 잘 나가서 나는 싫다.” 이렇게 말하면,
적어도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내가 마음속에 어떤 갈등을 갖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듣는 앞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칭찬은 안할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안 미워하는 것처럼... 그것처럼 괴로운 게 없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한다. 누가 싫다.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2. 미움이라는 감정은 내 안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내 속에 시기 질투, 불안, 두려움, 박탈감, 열등의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박탈감, 내 안에 어떤 두려움, 시기심, 상대적인 박탈감
이런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부분을 다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성자인 척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안에 미움·다툼·시기·질투가 있는데
겉으로 “할렐루야! 형제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건 완전히 연기하는 겁니다.
내 안에 미움·다툼·시기·질투가 있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다루시기를 원하는 부분이예요.
내가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의 성장이 필요하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내가 믿음 안에서 변해야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것을 무시한 채
내가 거룩한 것처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이렇게 하면
아무런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가 없어요.
아무런 영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죠.
내 안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내게 믿음이 필요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내 내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거룩한 것처럼, 믿음이 좋은 것처럼
그렇게 행사하면서 많은 세월을 허송세월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연도는 긴데 정작 그의 성장의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적나라한 부분에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3. 미움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것을 정당화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잘난 척하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그렇다.”
“나의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건 다 내 미움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려서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내 미움은 정당하다.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 저 사람은 미워할 만하다.”
이런 식으로 나의 미움을 정당화하면 안됩니다.
설사 세상이 나에게 잘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결국 어느 것이 쉽나요? 내 하나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바꾸는 것이 쉽습니까?
어느 것이 쉽습니까?
내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불행해지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내가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더 쉽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이 내 비위를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게 미움이 되고 내가 미워하게 만드는 ‘그 사람들이 바뀌어지기’를 바라는
그런 경우가 많지요.
이것은 결국은 어떻게 되냐면,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남들도 불행해져야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주 파괴적이죠.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남들도 불행해야 된다...
그러니까 길을 가다 누가 웃는다는 이유로 묻지마 살인을 한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처럼 불행하면 아마 아무도 안 죽였을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자기처럼 불행하면 괜찮았을텐데 자기처럼 불행하지 않으니까 미워진거예요.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나의 어떤 불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병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의 저변에는 불행을 더 퍼뜨리려는 그런 사상이 있지요.
그래서 공산주의는 언제 끝났는지 아십니까?
모든 국민을 가난하게 만든 다음에 끝이 났어요.
그게 공산주의의 성공이고 동시에 실패입니다.
공산주의는 성공했어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가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성공했어요.
그 이론에 따라서 성공했어요. 하지만 그게 성공이 아니고 실패였어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가난하게 만들었어요.
그것이 그 사상의 궁극적인 결국입니다.
불공평을 해결하자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박탈감에 의한 미움이 그 뜻을 이루려고 하면
결국은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 미움의 뜻을 이루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요셉을 팔아버리고 그 옷에다가 짐승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가서는 “짐승이 잡아갔습니다.”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수십 년을 자기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가슴이 찢어졌지요.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자기들을 요셉처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자기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가슴을 찢어놓았습니다.
가정이 불행해졌어요.
내가 불행하기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처럼 못된 생각은 없는 것이죠.
▲4. 현실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이예요.
어른은 현실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현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우리 아버지가 연세가 드신 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을 조금 더 사랑하신다.’
‘그렇다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걸 인정해야합니다.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레아도 이미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레아도 자기남편 야곱이 자기보다 동생인 라헬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수용했어요.
수용했으니까 살았죠.
수용하지 않았으면 동생을 죽이겠습니까? 어쩌겠습니까?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이 정신건강에 아주 중요한 조건입니다.
현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그것이 마음에 안들더라도...
‘세상이 그렇다. 이것보다도 더 나쁠 수 있다.’
‘이것보다 더 마음에 안들 수도 있는데 그나마 이정도면 살만하다.’
이런 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하는데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대안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거기에 대해서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형들도 똑같이 사랑하게 해주실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인간의 자유의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야곱이 요셉을 좀 더 사랑하는 그것까지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훗날 이 요셉의 형들도 자기가 자식을 낳아보면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식을 낳아보면... ‘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겠다.’ 라고 깨달을 겁니다.
그들도 자식을 낳아보니까 자식이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자식들 중에는 아버지와 생각이 같은 아이도 있고, 같지 않은 아이도 있고...
그렇지만 손가락 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최대한 모든 자식에게 잘 해주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누구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경우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형제가 없이 자랐기 때문에 제가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란 분들은 자라면서 그런 것을 다 경험하셨을 겁니다.
부모님이 형은 공부를 더 잘한다고, 누나는 더 착하다고,
형과 누나를 더 사랑한 것 같다.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 같다.
당연히 상처가 되지요.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예요.
사랑하셨어요. 내 눈에 덜 사랑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만일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게 될 때
여전히 수십 년 전 어렸을 때의 얘기를 한다면
그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통해서 벌써 예전에 해결했어야했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유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벌써 옛날에 그것을 해결했었어야 해요.
잊어버리고 뒤로 했었어야했는데
여전히 나이가 들어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형에게는 떡을 하나 더 주셨고, 형을 더 대견하게 생각했고,
우리 언니가 나보다 더 공부를 잘했고...”
이런 말이 여전히 우리 입에서 나온다면 그건 어떻게 보면
이 귀한 세월을 우리가 헛되이 보낸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벌써 옛날에 그것을 해결했었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든...
마음속에서 용서를 하든...
받아들이든...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 속에서...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공평하게 대하셨다.’ 는 것을 깨닫고
마음속에 평화를 이루어내야 하는데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어렸을 때의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예쁘고, 나보다 더 재능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떠하냐?
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사람들도 다른 면에서 자기보다도 더 행복하고, 더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자기들보다도 더 뭔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다 마찬가지예요.
▲5.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가진 것으로도 족하다.’ 라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루저입니다.
루저라는 말이 요즘 유행하고 있죠?
키가 얼마 이상이 되지 않는 사람은 루저라고 누군가 말을 했어요.
그런데 정말 루저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도 족하고
이것으로도 내가 얼마든지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로 루저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루저입니다.
내 마음속에 미움이 있는 것만 해도 나에게 불행인데,
그것 때문에 내가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면
그것처럼 불행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렇죠?
내 마음속에 미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게 내게 갈등이 되고 불행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행복한 삶을 살 기회를 잃어버리면,
그래서 늘 원망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살았다면,
여러분 그건 하나님도 도울 수 없어요.
정말 하나님도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생각의 변화예요.
자기 신세타령하고, 자기에게 없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가 받지 못한 것만을 생각하면, 그건 믿음이 아니예요.
그건 불신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실수하셨다.
하나님은 내게 행복할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게 불공평했다.
하나님은 내게 좋은 것을 주지 않았다.
그건 불신이예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
불신이 그 마음속에 가득한 한 하나님도 역사하실 수가 없어요.
내가 가진 것이 내게 족하다.
내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내가 비록 남들이 가진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이 원하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삶을 창조할 수 있다.
이게 믿음이예요.
▲그래서 있는 자에게는 더 주시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아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예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가게 주인이 재고 정리를 해서, 뭐가 떨어지고 뭐가 있는지 이것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정직한 재고정리를 해서
내게 이건 없지만 다른 게 있다.
하나님은 이걸 안 주셨지만, 이걸 주셨다.
이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이것으로 나는 이웃을 섬기고
이것으로 나는 얼마든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이렇게 깨달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실 때 사용하신 재료는 진흙이예요.
진흙을 가지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진흙을 가지고 인간을 만드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진흙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외에도 다른 재료들을 하나님이 많이 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서, 성령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우리 각자가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다 실제적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타자 및 정리 :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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