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눅7:18~35 15.06.14. 출처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B5-f4HPr4tI
◑문제 제기 / 예수님, 하나님에 대해 혼동하는 신자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은, 다 하나님에 대한 해석들이 각기 다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심판주이시다’ 라는 생각을 주로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생각이 강한 분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신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본인의 희망상황인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그럴 것입니다.
몸이 많이 아픈 분은, ‘하나님은 치유자’라는 사실을 붙잡고 싶을 것이고,
나쁜 사람들에게 피해를 많이 당한 분들은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셔!’ 라는
심판주 하나님을 믿고 싶으실 것이고,
하시는 일이 많이 힘드신 분은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시다’를 믿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분이었으면..’ 하는 자기의 희망사항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셔야 한다’는 잘못된 자기 신념으로 굳어지기 쉽습니다.
편협적인 신관이 가장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기도 하지만, 정의의 하나님이기도 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을, 우리는 크고 넓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려야지
내게 가장 필요한, 내 입맛에 맞는 하나님으로만 골라서, 편집해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세례요한의 스토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7: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세례요한이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바깥소식을 항상 스승님께 감옥에 면회 가서 전해줬어요.
위 구절에서 ‘모든 일’은 나사렛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만나주시고,
전도하시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살려주시던 그 놀라운 스토리들을,
요한의 제자들이, 감옥에 있는 스승에게 전해줬어요.
그랬더니 세례요한이 너무 기뻐 좋아한 것이 아니라,
급히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뜻밖의 질문을 합니다.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쉽게 말해서 ‘예수님 당신이 진짜 메시아 맞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딴 사람도 아니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선포했던 세례요한이, 그 질문을 한 것입니다.
가장 예수님에 대해서 확신해야될 사람이, 예수님께 대해서 물음표를 던져버린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는,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의 리포트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들었잖아요?
그것이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생각과 크게 달랐습니다.
자기 현실에 딱 붙잡혀 있던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모습, 즉 심판주, 정의의 메시아 이미지만 딱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쪽 뿐이었단 말입니다.
백성들이 오히려 왕으로 삼으려 할 때는, 그것을 거절하시고..
그래서 세례요한이 잠시 혼란해졌던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례요한처럼, 예수님께 대하여 실망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 상과, 하나님과,
실제로 자기가 느끼는 예수님, 하나님이 다르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런 책도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책이죠.
그런데 이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잘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희망사항일 뿐이지
진짜 하나님의 큰/모든 실체는 아닙니다.
현실이 너무 힘드니까, 우리는 당장 자기 현실에 답을 줄 수 있는
어떤 하나님을 원하는 겁니다. 자기가 만든 하나님 상이죠.
당장 내 입맛에 맞춰져서, 현실 돌파구를 열어주실 그런 하나님이 되어주셔야 속이 풀리겠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진짜 몰라서 물어본 것이기 보다는
‘예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건 제가 생각한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지금 현실이 당장 힘들다고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혼동되고, 실망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해답 / 사역의 현장을 보면 된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대신 보내어 질문한, 세례요한의 질문을 받으시고,
그 대답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보여 주셨습니다.
눅7: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마침 그 때에’ .. in the same hour, 질문을 받은 그 시간에,
예수님은 사역하고 계신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셨습니다.
마침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그 질문을 할 때,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그 사역의 현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대답을 이어서 22절에 이렇게 해 주십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요지는, 사역의 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아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을 뿐이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을, 그렇게 실제적으로 따라다니며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 남의 얘기를 듣고 평가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또 남의 얘기를 듣고 말하는 자기 제자들의 얘기를 듣고서
예수님을 평가하니까
이게 얼마나 그 평가가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현장에서 체험을 해야 합니다.
부흥의 소문을 듣지 말고,
저는 우리 교회가 부흥의 주체이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직접 현장을 체험하고, 그러고 나서 판단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랜드 캐니언,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해, 말로만 듣는 것과
바로 그 앞에 가서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떠들지 말고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됩니다. 자기 삶으로 체험하셔야 됩니다.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손들어버린 절망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고치시고, 회복하시는지.. 그 현장을 봐야 됩니다.
(이걸 봤으면, 세례요한도 그렇게까지는 실족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교회에도,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낫고, 자살하려던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고
예수님 때문에 가정이 회복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거 국가가 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을,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행하셨는지요.
살아있는 교회 지도자들은요, 현장을 뛰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홍민기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를 했는데,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분의 핵심은, 교재가 중요하지 않고, 프로그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시간과 물질을 써서, 아이들의 현장을 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중고등부가 안 된다고 그러느냐?
교회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니까 안 오지,
학생들이 있는 삶의 현장으로 찾아가서, 발로 뛰라는 겁니다.
이 분이 중고등부 학생 사역을 할 때는, 밤10~11시에 학생들이 학원 끝나고 나올 때,
그 학원 앞에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학생들이 반가워서 뛰어오는 것은,
교회에서 만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답니다. 왜냐면 떡볶이 사주니까요.
집에 가봤자 엄마가 또 공부하라 그러는데,
목사님과 함께 있으면 좋다는 겁니다.
현장을 뛰었다는 겁니다. 애들이 징계를 받으면, 학교 교무실에도 찾아가고,
그렇게 발로 뛰니까, 아이들이 감동을 받더라는 겁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목회자, 장로, 지도자들이, 현장을 뛰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로는, 당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역의 현장을 뛰는 분입니다.
목사는, 앉아서 설교준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양의 현장을 뛰어야 합니다.
심방을 하지 않으면서 설교준비만 하면, 살아있는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안수집사, 권사님들은, 그저 제직회 등 회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역의 현장에 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목사, 장로, 집사님들이, 목양의 현장에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의 현장에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들을 전도하고, 격려하고, 사역팀들을 만나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현장에서 목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현장에서 같이 뛰어줘야지,
그래야 지도자로서, 영적인 권위가 생기는 겁니다. 또한 실족하지도 않습니다.
저도 요즘 공동체를 심방하고, 사역팀들과 교대로 식사하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듣고, 감동 받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사역의 현장을 체험하게 하신 후에, 말씀하셨어요.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이사야서에 다 예언되었던, 메시아에 관한 말씀들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말씀과 동떨어진 사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메시아가 이럴 것이라고 예언한 말씀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너희 스승에게 가서 전하여라.
세례요한은 자신의 ‘하나님 관’과 잠시 맞지 않아서, 흔들리던 터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부분이 없습니까?
자기랑 안 맞는 부분은, 다 편집해 버리는 ‘내가 복음’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고, 기도응답이 이루어졌는데도
내 마음에 드는 기도응답이 안 왔다고 해서, ‘자꾸 응답을 못 받은 척’하는 겁니다.
자녀가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기도응답이고
자녀가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면.. 응답을 잘 모르겠다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뜻을 편집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내 선입관만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왜 그 시대의 선입관, ‘메시아는 군사적 영웅이다’를 탈출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감옥에 갇혀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이 피폐해지면, 신앙도 무너지기 쉬운데요.
자기 환경이 부정적이면, 하나님 관도 부정적이 되기 쉬워지죠.
광야에서, 그가 메시지를 외칠 때는, 메시아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정확히 선포했어요.
메시아의 핵심 사역은, 십자가 라는 것을 그때는 알았고, 선포했는데
-자기 환경이 너무 어려워지고
-또한 당시 예수님의 사역을, 그 현장을
여러 가지 이유로, 직접 목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귀로 듣기만 했어요.
여러분, 이게 인간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는, 어떤 난관이라도 그 ‘현실’을 초월하지만,
갑자기 중병에 걸린다든지.. ‘현실’에 부딪히면.. 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병든 교인을 심방가서는, 온갖 성경구절을 다 인용하면서 위로하다가
막상 자기가 몸져 누우면, 하나님께 섭섭해지고, 성경구절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얏볼 게 아닙니다.
내 사업이 실패하거나, 내가 감옥에 처하는 상황이 되면,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흔들릴 수 있는 겁니다. 시험에 듭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당장 내 고통을 해결해 줄, 인스턴트 하나님을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가 가장 큰 어젠더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그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구원의 완성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십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은, 자기의 구출을 원했지만
그게 답이 아니었어요.
사실 이스라엘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것은,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호막을 거두셔서, 외세의 침략을 계속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면, 당장 군사적 메시아가 오시는 게 아니라
복음을 듣고, 자기들의 마음을 고쳐야 했습니다.
그래야 눈에 보이는 나라의 주권도, 언젠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하시는 순서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영을 먼저 고치시고, 다음에 육을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빨리 내 육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다음에 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절대로 하나님은 그런 순서로 가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젠가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정치적인 자유를 주시겠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영적인 회복이 있은 다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자기 인생이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순서를, 거꾸로 뒤집을수는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행하시는 일이
여러분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최선의 선택임을, 믿어 의심치 마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마무리 하십니다.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시험 들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자기 기대에 차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실족한 사람, 즉 시험 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은혜가 되어야지, 시험에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시험에 빠지기 시작하면, 마귀가 또 옆에서 불을 붙입니다.
‘그래 봐, 하나님은 웬수야’
그러면서 우리를 더욱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빨리 돌아올수록 이익인데, 더 늦게, 더 멀리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당장 내게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고 불편하더라도,
내 현실의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이 당장 확 뚫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롬1:17, 합2:4참조
하나님께 대해 실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우리도 주변에 보면, 세례요한처럼, 잠깐 실족하는 성도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돌아선 것은 아닌데, 자기 환경이 너무 어렵다 보니까
잠시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이 냉담해지고,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변의 신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처럼, 사역의 현장으로 데려가 줘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며, 말씀을 선포해 주고
성령의 생기가 그를 다시 살리도록,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역의 현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잠시 실족한 세례요한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눅7: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이렇게 하나님은, 잠시 실족한 세례요한을, 또한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런 사람을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진짜 실족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9.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았던 사람들,
즉 정의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말씀도 믿게 되었습니다. :29
왜냐하면 진리는 통하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런데 세례요한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도 거부합니다. :30
그 거부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이 거절하는 세대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은, 자신과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전혀 반응하지 않던 당시 사람들에 대해,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오늘 시대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세례요한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부정부패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청빈한 사람입니다.
남을 험담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같이 험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래서 싫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도 비판했습니다.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사람이 미우면, 앉아도 밉고, 일어서도 밉습니다.
뭘 해도 다 미운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맞추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비난과 미움으로 반응했습니다.
그건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무서운 죄이지요.
여러분,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사역의 현장에 내보내야 합니다.
사역의 현장은 뛰지 않으면서, 교리 따지고, 전통 따지면서
항상 남을 비판하고, 어른 대접 받으려 하고, 공격적입니다.
이들은 요한이 전했던 회개의 메시지도 거부하고,
예수님이 전하셨던 인자와 진리, 축제의 메시지도 거부했습니다.
어떤 핑계라도 찾아서, 자신들의 불신앙을 합리화시켰던 것입니다.
▶최고의 변증은 변화된 삶입니다.
:35 지혜(소피아)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는, 예수님 자녀로 인해 증명됩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의 옳으심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변증은, 논리가 아니라, 변화된 삶입니다.
부흥은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 예수님의 사역과 그 메시지(지혜)는,
그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서, 옳다 인정함을 받았고요,
그들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곡을 해도 울지 않았던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구약)을 가르치며, 복음 사역을 비난했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변화된 사람들이 과연 있었을까요?
진짜 하나님의 역사는, 현장에서 입증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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