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라파 치료자 하나님 출15:22-27 15.07.19. 출처
◑광야
“출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치던 적들이 몰살을 당하는 통쾌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이 감격에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하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이제는 완전한 해방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없고 행복만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불과 3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는 위기를 맞았고 백성들의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불편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가서는 식량이 다 떨어지는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곳곳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리는 적들이 있었고
이들의 행진을 환영하는 부족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낮의 태양이나 밤의 추위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모래와 먼지투성이의 땅을 걷는 것 또한 힘에 부쳤습니다.
▲모든 면에서 애굽보다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미래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와 희망은 어떤 고난도 감내하게 만드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입니다.
신약의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애굽의 편안한 삶을 ‘죄악의 낙’이라고 하였습니다.
광야 길은 고난이고 수고지만,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얻는 길이요
영원한 미래를 향한 길이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잠깐의 낙’과 ‘영원한 고통’, ‘잠깐의 고통’과 ‘영원한 낙’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광야는 광야학교라고도 불립니다.
애굽의 노예근성과 물질과 우상에 매인 삶의 태도를 벗고
자유인의 가치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훈련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광야 40년을 마치며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이스라엘은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광야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을 갖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여, 우리 인생이 갑자기 낙원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광야 길처럼 힘든 것이고
예배당 밖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바뀐 것이 있습니다. 그 길은 이제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 고통과 맞서 싸우시며,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든든한 우군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부르짖으십시오.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맛보십시오. 그 안에 참다운 생명과 진리와 지혜가 있습니다.
◑마라의 쓴 물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로 접어든지 삼일 만에 위기를 맞았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했는데 먹을 수 없습니다. 물이 써서 그랬습니다.
사막에서 발견되는 샘물에는 쓴 물이 간혹 있습니다.
염분이 높아서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중동 아프리카 지역은, 과거에 해저가 융기된 곳으로, 지금도 소금 사막도 많습니다.
쓴 물이지만 목이 너무 말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쓰러지거나 배앓이를 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26절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여호와 라파)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23절의 쓴 물 때문에, 병이 난 자들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을 보면서도 마실 수 없으니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켰습니다.
물에 이 나무를 던지자 물이 달아졌습니다.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효험이 있었던가?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 여기서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여호와 라파’ 곧 좋은 치료자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못 먹는 물을 고쳐 생수가 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기적은 우리 인생을 향해서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 인생길이 마라의 쓴 물처럼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는 시편의 고백처럼
우리 인생에는 수고와 슬픔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잃었을 때, 물질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그 자리만 맴돌고 있을 때, 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
인간관계에서 아픔을 경험할 때, 자신의 잘못과 실수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인생의 쓴맛을 처절하게 경험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망가지고 마음은 심한 상처를 앓습니다.
그때 우리가 붙잡아야 될 하나님이, 바로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
또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입니다.
▲‘마라’처럼 쓴디 쓴 인생을 살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라는 여인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는 남편과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멀리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만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맙니다.
며느리 룻만 데리고 고향으로 처량하게 돌아옵니다.
고향 사람들을 보자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1:21)
나오미라는 이름에는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곤고한 인생을 인하여 ‘마라’라 고쳐 부르라 합니다. 쓰다는 것입니다.
그 인생은 ‘마라’로 끝날 것인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룻이라는 복 있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보아스를 통하여 다시 가문을 잇게 되고, 이 가문에서 다윗이 출생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노년에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를 찬양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룻4:15)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회복자이십니다. 쓴 우리의 인생을 달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청교도들이 즐겨 사용했던 인사법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
우리 함께 이 말을 옆 사람에게 건네 보세요. 사실 그래요.
이들이 물 때문에 불편을 겪으며 원망하였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엘림이라는 샘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물 샘이 열 둘이나 됩니다. 종려나무도 풍성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마라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지 순례 가면 마라와 엘림이라는 곳을 방문하는데, 불과 11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쓴 것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정의의 태양
이스라엘은 여호와 라파 하나님을 자기들 인생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경험했습니다.
자연이나 역사의 어그러진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상처를 고치시는 분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이 기도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난 후,
하나님이 솔로몬 앞에 나타나셔서 주셨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서 겸비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그들의 땅을 고쳐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땅이 상처를 받고 질병을 앓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땅이 가뭄이나 지진이나 역병 등, 자연재해로 고통을 당할 때를 말합니다.
나라가 패망하여 온 땅이 불모지요, 황폐한 곳이 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때 악한 길에서 떠나 겸비하여 기도하면
다시 그 땅이 자연의 생기를 되찾고 번성함을 회복케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음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58:8)
이사야 58장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에게 (또는 내다보며) 주신 예언입니다.
이들에게 무슨 치료가 필요합니까?
예루살렘 성벽이 서지 못함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
성전이 서지 못함으로 예배들 드릴 수 없는 것,
나라가 부강하지 못하고 영광을 잃은 것,
이 모든 것이 다 나라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의 자존심을 세우고 영광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다음은 말라기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이스라엘 땅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이 비추어야 합니다.
이 빛이 세균과 질병들을 환히 비출 때
악한 것들이 다 불태워지고 건강을 회복합니다.
시름시름 앓던 사람이 그런 나라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풀밭 위에 기뻐 뛰듯이
그렇게 활기찰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때의 모습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3:11-12)
이것이 치료받은 땅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라나 역사가 왜 병이 듭니까?
치료와 관련된 말씀들을 보면 모두 의, 곧 정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의로운 태양’
나라가 불의하면 나라가 병들게 됩니다.
곳곳에서 고통으로 부르짖음과 신음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그게 병든 것입니다.
수술이 필요합니다. 정의는 태양입니다.
고대인들은 아침에 태양이 비치면서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정의의 태양이 비치면서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정의의 강물이 흘러야 그 땅이 삽니다.
▲그래서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의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관점입니다.
동양 고전 『논어』의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스승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경제) 군비를 충분케 하며(군사)
백성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공이 연이어서 묻습니다. “만약 버린다면 셋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군사를 버려야 한다.”
자공이 다시 묻습니다. “부득이하여 버린다면 둘 중에 무엇을 버려합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식량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의 정치는 순서가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제일 먼저 신뢰를 버리고, 다음에 경제를 버리고, 최후로 붙잡는 것이 군사력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관점이 맞습니다. 군사력이 월등했던 옛 소련이나 독재국가들은
늘 불안했고 대부분이 망하거나 해체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경제를 좇아갔던 많은 국가들은 빈부 격차의 심화로 분열과 갈등이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대공황기 때의 모습이요, 여기서 제국주의라는 폭력 국가로 나갔습니다.
백성들의 신뢰 그것은 곧 정의를 기초로 형성됩니다.
그래야 국민이 서로를 믿고 하나가 됩니다. 국민이 지도자와 정부를 신뢰하게 됩니다.
근로의욕과 창의력과 책임감과 성실함이 바로 정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나라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정의이고, 정의가 회복되어야 경제가 곧 땅이 살아납니다.
◑말씀 순종
하나님이 치유의 손길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보다 더 중요한 치유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순종입니다.
26절입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여호와 라파)임이라”
질병에 걸리는 이유도, 질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 길도, 단 한가지입니다.
말씀 순종입니다.
기도보다, 금식보다, 어떤 정성보다 말씀 순종이, 우리의 치료를 더 급속하게 만듭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닙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미6:8)
잠언 서에서는 말씀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3;1-2)
말씀 순종하며 장수한답니다.
이어지는 8절입니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말씀 순종이 우리 보약이 되고 뼈도 건강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육신이나 마음의 병이 있을 때
먼저 자기 행실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라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른 정치나 역사를 펼쳐갈 때 그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지
맨날 구국기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정책 하나하나에 정의가 담기고,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정치를 할 때
치료가 급속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무
마라의 쓴 물에 나무를 던지니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 나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나무를 주셨습니다. 바로 십자가 나무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십자가는 치료의 나무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는 나무입니다.
저주와 슬픔으로 가득한 우리 인생을 기쁨과 사랑의 단물로 바꾸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의 등에 맞은 채찍의 상처는, 바로 우리의 상처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상처와 질병들을 가져가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질병을 치유하십니다.
영화 《쿼바디스》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비가 쏟아집니다.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가 문둥병자였는데, 그 비를 맞자 문둥병이 씻은 듯 낫습니다.
시편의 찬양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가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류 없음 >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굽의 장자를 치시다 (0) | 2015.08.11 |
---|---|
사탄의 공격 3 / Charles Stanley (0) | 2015.08.04 |
골방 믿음과 현장 믿음 (0) | 2015.08.01 |
하늘 양식이 비같이 (0) | 2015.07.28 |
하나님의 형상의 정체성이 무너진 인간 (0) | 201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