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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장자를 치시다

LNCK 2015. 8. 11. 10:02

애굽의 장자를 치시다                11:1~36                 15.06.14.  출처

  

*부제 : 약한 자를 편드시는 하나님 

 

 

 

※직접 동영상을 들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스라엘을 편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쳤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한 밤중에 애굽 전역을 급습했습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날을 우리는 유월절이라 부릅니다.

한자로 넘을 유() 넘을 월() 해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날입니다.

첫 태생들이 죽었기에, 모든 가정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어린아이들도 많이 죽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윤리성을 따지기보다

이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성경 읽기입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는 윤리성이 잠시 유보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이 기적을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약자입니다.

 

하나님은 억압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통쾌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는 사건은

마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건에 비할 수 있습니다.

 

원자폭탄으로 말미암아 수십 만 명의 인명이 살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민들에게는

그것은 통쾌한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폭압적인 일본의 압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해방을 맞게 된 계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와 가난한 자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는 분입니다.

반생명적 문화와 폭력과 전제로 억압하던 애굽의 통치세력을 일시에 물리치셨습니다.

 

전쟁에서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더구나 강자와 약자 사이의 싸움에서 윤리성을 물어야 할 것은 강자들에게입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자기 Israel 와 같은 약자를 철저히 편드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에서 악인이나 원수라는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악인이 누구일까요?

도덕적 기준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민족적 기준입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이방인들이 바로 원수들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 되어 이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하나님은 중립의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싸움이 벌어졌는데 아버지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고 중립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매우 섭섭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약하기도 한데.

 

사사기에 보면 여성 사사 드보라와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의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이깁니다.

시스라는 전쟁에 패하였고 여인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스라엘의 승리와 이방인의 패배의 실상을

한 가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시녀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5:28-30)

 

반대로 지금 시스라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을 '조롱시'라고 합니다.

시스라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매우 통쾌한 장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중립적인 분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편드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에 통쾌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 번째 재앙을 계기로 애굽에서 해방됩니다.

해방되어 떠나는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1235, 36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여기 취하였다고 하였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plunder 곧 약탈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리거나 구입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자들이 약탈하는 전리품과 같은 것입니다.

한밤중에 쫓겨나듯이 떠나는 탈출이 아니라 승리의 해방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은

이제 좁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를 믿는 자녀들을 위하고 편드시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실상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짖는 하나님은 어떤 보편적인 중립자가 아닙니다.

나에게만은 내 인생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대우를 해주길 원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윤리성이나 보편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모르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고

우리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관련글 : 하나님이 당신만 사랑하시나?

 

 

장자를 치다

 

애굽의 젖줄인 나일 강을 피로 물들여도 바로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최고신으로 추앙받는 태양을 무력화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퍼부은 열 가지 재앙들은, 실은 애굽을 다스리고 있던 우상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나일 강의 신 하피나 오시리스가, 다산의 신들이, 태양신 라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바로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열 번째 재앙은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적은 우상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신들이 주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우상이란 것도 실은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에 대해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조롱합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44:15, 17)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의 본산인 인간을 마지막으로 쳤을 때서야 비로소 바로가 무너졌습니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자연 재해가 어떻고, 사탄이 어떻고 하지만

결국 이 세계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사탄도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이용할 뿐입니다. 악은 인간이 만들어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뱀이 유혹했다고 하며 이 뱀이 사탄이라고 해석을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그런 언급을 일절 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그것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재앙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바로가 결정한 것입니다.

경고를 듣고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왜 반생명적 문화 체제를 구축했습니까?

자기들의 안정과 자기들만의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반생명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그 반생명의 끝을 보여주는 열 가지 재앙 심판이었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탐욕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편리를 가져다주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리능력입니다.

관리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역병이라는 대재앙을 만들어냅니다.

 

심판 운운하기 전에 인간의 태도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고

함께 엮여 살아가는 하는 공동체가 겪게 되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애굽 백성들의 비극은, 그들이 바로 체제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친 것은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가였습니다.

출애굽기 422, 23절입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죽인 벌로, 애굽의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애굽의 폭력 체제 하에서 이스라엘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산파들의 손에서 또는 나일 강에 빠져 죽임을 당할 때 울부짖었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인한 고역으로 못살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는 그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은 애굽이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116절입니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1230절입니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을 괴롭게 하면 그만큼 내가 고통을 당합니다.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우주의 종말에 왜 대파국이라는 우주의 철저한 해체가 있는가요?

 

그것은 이 세상이나 인간이 저지른 악에 대한 응징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저지른 죄가 감추어졌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폭력의 결과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와 동일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 속죄론이 대표적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인류가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죄는 어마어마해서 하나님의 죽임이 아니고는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응징한 대신 하나님이 응징을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도 복수의 법칙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짓지 마십시오. 죄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가 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나에게, 동일한 선이나 행복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크게 되고 바로는 작아집니다. 8절입니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1232절입니다.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제는 바로가 모세에게 축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참된 신이 누구이며

누구를 통해서 신의 복과 재앙이 쏟아지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준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는 것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는 권세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권세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존엄한 사람들입니다.

 

이 권세를 잘 활용하십시오. (지금 나라가 메르스 사태로 어렵습니다.) *20156월 설교

이 음부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길 함께 기도합시다.

교회가 안식을 잃은 우리 사회에 참된 복과 평화를 주는 근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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