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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양식이 비같이

LNCK 2015. 7. 28. 10:08

하늘 양식이 비같이           16:1-36, 6:25-26                 15.07.26.출처

 

 

밥은 하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입니다고 노래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밥이 하늘인 까닭은 그만큼 인간에게 먹을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도 자신의 제1계명을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뭄 때에는 경회루 옆에 소박한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서 기거를 하며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우리의 아침 문안 인사는 진지 자셨습니까?”였습니다.

그만큼 못 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TV 프로를 보니

정글에서 매일 하는 일이 먹을 것 구해서 요리하는 것이 주입니다.

지겨울 정도로 먹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아마 인류 역사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흘러왔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식량생산과 기술이 발달해서

예전에 누리지 못하던 풍족함을 맛보고 있습니다.

가난해서 식사를 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밥의 문제는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밥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밥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직장이나 사업을 그렇게 부르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부자유하고 비겁해지고 불의를 행하기도 하는 이유는

이 밥줄이 끊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공직자나 검판사가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까닭은

자기 밥줄이 끊길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밤낮으로 일하고 또 상사의 눈치를 보는 까닭은 밥줄 때문입니다.

여전히 밥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삶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고민하던 청년은 자신이 존경하던 선생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 스승은 그것은 자네가 스스로 인생을 경험하며 찾아야 할 답이라네.”하며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산사의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스님은 그 걸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나. 나무관세음보살!” 하더랍니다.

 

삶이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청년은

뜻밖에 어느 포장마차 앞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삶은 계란!”(유머)

그렇습니다. 계란이 상징하는 밥이 문제이고, 삶의 문제는 밥의 문제입니다.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더구나 큰 문제였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지 45일째 쯤 되어 가지고 나왔던 식량이 바닥이 났습니다.

광야라서 먹을 것도 없고, 인근 마을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굶주림의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 원망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한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인간은 부자유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건너갔던 이유는,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면서 애굽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도 역시

애굽의 고기 가마를 잃을 것 같은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근원적인 이유도, 악한 종교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우상이 먹을 것을 보장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의 주된 우상은 바알이었는데, 바알은 비와 폭풍을 주관하는 농경의 신이었습니다.

건기인 여름에 죽고, 우기가 시작되는 가을과 겨울에 살아나는 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라야 농사가 잘 될 줄 알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런 우상의 세력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2:8)

 

먹을 것에 대한 공포에서, 그들은 바알을 섬겼던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안 먹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에 매이지 않고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아무런 농사나 수고하지 않았지만, 40년 동안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신명기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

 

떡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굶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신다는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밥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밥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산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밥을 먹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매일같이 이 사실을 경험하였습니다.

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비범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셨다는 데 주목하십시오.

 

사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자연적인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만나는 지금도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만나는 연지벌레가 유성류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나오는 분비물의 일종입니다.

서늘한 밤에는 딱딱하게 굳어서 사람들이 수확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낮에는 녹거나 벌레가 먹습니다.

맛이 달아 식량이 부족한 사막에서는 오늘날에도 식량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메추라기 또한 실제 봄과 가을에 떼를 지어 시나이 반도를 지나갑니다.

아프리카나 지중해에서 몰려오는 메추라기는, 손으로도 잡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이것이 매일같이, 40년 동안 일어났다는 점에서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기적이 신기했을 것입니다.

 

만나라는 이름도 아침에 메마른 땅 위에 둥글고 서리 같은 것을 보고는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히브리어 만후(이것이 무엇이냐)’에서 만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뿐이었을 것입니다.

기적이 일상화되니까 더 이상 기적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만나를 먹다가 질린 백성들의 불만이 민수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11:6)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이 분명 먹이시지만, 그것이 일상화 되면 의식하지 못합니다.

감사를 잃습니다. 그러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잃고 나면

그제야 다시 그 고마움을 깨닫습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일상적인 것에서, 기적을 찾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기적이든 자연스러운 형태이든지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5-26)

 

물질중심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특히 필요합니다.

자본주의라는 돈의 우상체제는, 먹을 것을 가지고 우리를 굴종시키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때문에 죄도, 불의도 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2)

우리 또한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대가 중에 평생 동안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는

2천여 명의 고아를 먹인 고아의 아버지며, 300만 권의 성경을 보급했던 선교사입니다.

 

이분은 고아원을 운영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방법으로 하겠다고 뜻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후원자를 모집하지 않았고, 인간적인 술수나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뮬러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 고아원을 운영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기 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아들에게 먹일 식량이 매일같이 모자랐습니다.

그때마다 뮬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정확히 기도한 만큼의 분량을 보내 주셨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뮬러는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서

손을 맞잡고 식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가 끝날 무렵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대의 마차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습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을 위한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조지 뮬러와 같은 체험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분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만이 우리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밥의 영성

 

밥 먹을 때도 법칙이 있습니다. 만나의 영성이고 밥의 영성입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각 사람마다 한 오멜입니다. 한 오멜은 대략 2가 조금 넘습니다.

딱 하루 분입니다.

 

요즘 시대야 하루 분의 식량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하루 분의 만나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먹거나 가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먹습니다. 그래서 헬스장이 붐빕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저장해 두려합니다. 그러니 과로하고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우리 삶을 절제하고 단순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 18절입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합니다. 남으면 어떻게 됩니까? 20절과 21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김지하 시인이 밥이 하늘이라 한 이유는

하늘은 독차지 할 수 없고 나누어 먹으라는 뜻에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나를 욕심껏 많이 가져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벌레가 생기고 태양에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하루 분량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자라고 하여 더 많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쌓아두면 썩습니다.

주님은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6:19)고 말씀합니다.

 

내가 많이 거두어가면 다른 사람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를 20:80, 1:99로 표현합니다.

적은 소수가 많은 빵을 가져가고 다수가 적은 빵으로 연명하는 불평등사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이 불평등과 불의의 문제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호세아서 127절에서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에브라임은 거짓 저울을 손에 든 장사꾼이 되어서, 사람 속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에브라임은 자랑한다. ,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너희의 장막에서 살았던 것처럼

나는 너희가 다시 장막에서 살게 하겠다.”

 

하나님이 다시 거지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서운 심판선언입니다.

사회가 불평등하면 불안해지고 분열됩니다.

그러면 폭동이 나기도 하고 경제가 활력을 잃습니다.

 

경제 민주화니 복지의 문제는 밥을 나누어 골고루 먹자는 정책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때 함께 살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잘 나누어 먹기만 하면 세계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2014년도 세계 곡물 생산량은 253,200만 톤입니다.

세계 곡물 소비량은 246,500만 톤이며, 곡물 재고량은 62,800만 톤입니다.

수치상으로 보면 곡물이 남아돌아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2013년도 통계를 보니 전 세계 기아 인구가 84,200만 명입니다.

세계 인구 중 8명당 1명꼴로 영양부족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서로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 사료로 수많은 곡물이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한 편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찐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 하고

헬스장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1초에 다섯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죄입니다.

 

셋째는, 일만 하지 말고 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만나를 거두기 위해 노동을 했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으러 나갔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1년 내내 그런 노동을 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주님은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고 말씀합니다.

 

23절과 22절 말씀입니다.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는 그 다음날 것까지 거두게 하여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게 만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지만

실은 율법보다 앞서 있는 창조의 질서입니다.

 

하나님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닙니다. 쉬어야 재충전이 됩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을 하기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일주일 중 가장 큰 날입니다.

 

안식일은 인간됨의 의미를 묻습니다.

인간이 먹기 위해서 사는 존재인지, 살기 위해서 먹는 존재인지를 묻습니다.

먹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의 보람이나 의미를 찾을 것에 대한 요구입니다.

그래야 밥맛이 납니다. 하루 쉰다고 굶어죽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전날 두 배의 소득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어느 백화점을 경영하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일을 쉬니 매상도 떨어지고 고객들의 불평이 이어졌습니다.

기도하다 이 분이 지혜를 얻어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요일에 왔다가 돌아간 고객들에게 할인권을 끊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월요일 매출이 배로 뛰었습니다.

고객들의 불만도 줄어들고 매상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를 쉬면 손해가 큽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쉬는 날의 매출의 두 배를 평일에 얻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밥이 아니라 말씀

 

밥 이야기만 하였지만 실은 밥이 아니라 영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밥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밥을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영혼의 배를 든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절제와 나눔과 쉼을 배웁니다.

이 절제와 나눔과 쉼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밥을 먹듯이,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육신은 살이 쪘지만 영혼은 말라 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입니다.

서구인들이 불교나 명상에 심취하고

인도나 동양의 가난한 나라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영성의 고갈 때문입니다.

 

영성은 곧 하나님 체험입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채우기 전까지는 만족이 없습니다.

 

물질보다 우리 영혼이 너무나 크고

탐욕은 우리 영혼을 채우기에는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홍수 때 정작 마실 물이 귀하듯이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예배들 드리고 교회로 모이고 봉사를 하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타성이 되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인간의 전통과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울리는데 게을러서,

또는 자신의 익숙한 방식에 젖어서 말씀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말씀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른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