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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애틀의 하수도 역류

LNCK 2015. 8. 18. 08:48

옛 시애틀의 하수도 역류            4:18~31          출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수도 역류 현상이 나타납니다.

 

 

 

옛 시애틀의 하수도 역류

 

시애틀과 하수도가 역류하는 현상을 연결 짓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애틀에 대한 이미지와는 좀 다릅니다.

시애틀은 스타벅스 제1호 매장이 세워진 커피의 본고장이고,

저는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지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유명합니다.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 주연의 이 영화로 인해서,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잊을 수 없는 도시로 각인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시애틀에 가보면 첫 번째 들어서며 받는 인상이 참 깨끗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겨울에는 비가 많아서 잘 씻겨 내려가기 때문인지,

별명이 물의 도시로 워싱턴 호수가 있고, 그 호수와 바다를 이어주는 하이렘 운하가

도시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와서, 수상 비행장도 있으니, 물의 도시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겨울에는 비가 많고 기온이 온화하여 깨끗하고 산뜻하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낭만으로 가득하다는 인상 깊은 도시입니다.

 

그런데 100여년 전만해도, 물의 도시 시애틀이 이 물 때문에, 또 다른 인상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보행자의 안전이 위협받을 정도의 질퍽한 수렁들이 많았고,

도시의 뒷골목은 금을 찾아 몰려든 광부들이 도박과 음주로 일관된 삶을 살면서

도시 전체 분위기가 퇴폐적인 색조였고,

 

특히나 유명한 것은 하수도 역류현상으로 지저분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도시였다고 해요.

똑같은 물이지만 지금은 깨끗하고 산뜻해 보이는데, 같은 물 때문에 예전에는 지저분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오늘날의 시애틀이 되었느냐고요?

 

188966일에 어마어마한 화재가 시애틀 중심부에서 일어나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화마에 휩싸이게 되는데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어느 정도로 강력한 화마였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들쥐가 100만 마리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의회가 시애틀의 재건을 위해서 불탄 도시의 중심부를 철거하고

화마의 흉터를 다 지워내면서 재건을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 자체를 다 평지로 만들어서, 재건한 것이 오늘날의 시애틀입니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도시 전체를 괴롭히고 악취를 풍기게 했던 하수도 역류현상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이전의 도시에서는 왜 그렇게 하수도가 역류했을까요?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당시의 도시 건설 기술로는, 높은 언덕에 집을 지어서 생긴 하수가 낮은 지역으로 흘러드는데

그 양이 늘어나면서 역류하게 되고 악취가 나고 질척거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역류 현상을, 우리의 삶에 그대로 가져와 봅니다.

 

하수도가 역류해서 집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겠습니까?

거실에 하수가 가득 차고 질척거린다고 생각하면, 이 거북함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삶에 대해서 거북하고 질척하다면

바로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역류현상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없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백합화가 피었다가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계속해서 흘러들어 오고 있다는 증거이고,

개 한 마리가 태어나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그 개에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삼라만상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 각자에게 하나님의 뜻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살아갑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하늘에서 나를 향한 오늘, 내일, 모레, 글피의 계획이 쭉 있는데,

 

내 마음이 그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오늘 분량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버려져서 하수도로 들어가게 되고,

하수도로 들어간 것들이, 내게로 역류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상수도 근원지가 높은 곳에 있으면서 낮은 곳으로 들어온다면, 수압도 세고 좋습니다만,

하수도일 경우에는 역류하면서 걱정이 생기고 불안하고 화가 나고, 마음이 평강 가운데 거하지 못합니다.

 

높은 곳에서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고 버려서

그것이 하수도로 들어가 나에 의해서 거부된 하나님의 뜻이 역류하므로

내 마음에 걱정, 불안, 근심, 초조, 분노, 원망으로 삶이 질척거리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면 상수도 물처럼 생명이 됩니다.

생명현상은 반드시 만족과 기쁨으로 표현되고,

만족과 기쁨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이 아니고,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은, 사망의 기운을 거부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뿐입니다.

온전히 만족하고 기쁘고 행복한 것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작정되어진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살아있게 되고,

나를 통해 들어와서 나를 통과하며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때에

그게 바로 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내 마음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하늘이 됩니다.

 

그런데 먹구름이 가득 차있다면,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고,

높은 곳에서 결정되어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수도로 버려지고,

그 높은 곳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하수로 역류할 때에, 내 삶에는 불행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소명을 받은 이후에

모세와 관련된 세 가지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이제 장인인 이드로에게 가서 애굽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하니 보내줍니다.

도중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와의 만남을 예견해 주시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가는데

많은 기적들을 담아줄 테니 다 이루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 바로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장자를 죽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와의 이야기가 나오고,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만남이 이야기됩니다.

이 세 이야기가 관련성 없이 나열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오늘 읽은 부분에서 2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고 하셨고,

 

앞에서 본 12절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리고 15절에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라고 하십니다.

 

참 멋져요. 내가 할 말을 하나님께서 담아 주시고,

내가 할 일을 쥐어주신다고 하시는데, 이게 바로 기독교인과 선민의 삶입니다.

 

그 때에는 모세 밖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십자가 복음으로 모세에게 행하셨던 일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멋있죠.

 

이렇게 모세 외에 없던 시절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세상으로 흘러들어오는데,

바로가 그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흘러들어온 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가 자기의 삶에서 하수도로 버려버리는데,

 

그 때에 바로의 삶의 영역에서 버려진 하나님의 뜻이 역류하게 되면서

장자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는 왜 거부할까요?

거부하는 이유를 보면 당연합니다. 이 히브리 노예의 숫자가 200만이 넘고

애굽 경제의 하부 구조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없으면 애굽인들이 그 노역을 다 충당해야 하는데 엄청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으니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이 하나님의 뜻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현재의 이익과 너무나 대치될 때 거부하게 되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해타산과 대치될 때에 하나님의 뜻이 버려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현실의 상황에 대한 이해타산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데,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라는 나의 계산이 죽어야 됩니다.

내 생각과 계산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아요.

 

자식을 볼 때에도 내 아들과 딸이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내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흘러 들어와서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이것이 좋고, 나쁘고의 이해타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고 하수도로 버려지면서,

이 높은 곳에서 흘러들어온 하나님의 뜻은, 내 삶 영역 안에서 역류해버리고 만다는 것이고,

이 역류현상이 애굽을 초토화시켜버리고 맙니다.

 

21절에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를 악을 행하도록 조장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생각하는 그 악을 그대로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이 무엇이죠?

이 지상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을 받아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행하지 않고,

내가 말하고 나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전능하신 분, 무소부재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 지혜가 무한하신 분이라고만 압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내 삶에 대해 유일하게 생각하시고,

내 삶에 대해서 유일하게 계획하시고, 내 삶에 대해서 유일하게 할 말을 넣어주실 수 있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삶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악이라는 말이고, 우리가 생각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이 거부되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론과 이스라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왔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고 경배합니다.

 

31절에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라고 하면서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받아들이면 실현됩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 아내인 십보라와의 에피소드에 있습니다.

 

모세가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면서, 여행객들이 쉬고 가도록 만든 숙소에 들어갔는데,

24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라고 하십니다.

 

이상하죠? 그렇게 안 가겠다고 했던 모세를 불러들여서 소명을 주시고

출애굽 사건을 위해 애굽으로 보내시는데, 도중에 왜 죽이려고 하셨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죽이려고 하셨을까요?

 

, 이해하기 힘이 드는데, 25절에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가 모세를 죽이시려는 사실을 알고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해서

그 포피를 모세의 발 앞에 두자 모세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십보라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게 됐는지.. 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정말로 죽이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다는 것은

지금 십보라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데,

십보라의 생각에 이 상태가 유지되면, 남편이 죽겠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병이었든지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십보라의 마음속에는 남편 모세가 이대로라면 죽겠다는 급박한 확신이 들었고,

마음에 켕기는 것의 이유가, 바로 아들의 포피를 잘라서 남편의 발밑에 두면서

피 남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들이 둘인데 첫째 아들이 게르솜인데,

게르솜은 할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유는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하려고 할 때에, 십보라가 강하게 반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십보라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의 친정아버지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으니, 미디안의 종교 습관을 따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인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할 때는 뭔지도 모르고 허락을 했는데,

둘째 아들에게 행할 때에는 할례가 특별히 다를 것도 없고

자기가 살고 있던 미디안 지역의 남자들은 할례를 안 했어도 아무 문제도 없었기에

하지 말라고 고집을 피웠던 것 같고, 모세와 충돌을 일으켰고

모세가 어찌할 수 없이 아내의 고집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할례라는 하나님의 뜻이, 모세를 통해서 분명히 전달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통해 막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던 것은, 모세가 못마땅해서 죽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남편이 죽으면 아내인 십보라에게는 불행이 닥치는 것을 보여주시고,

십보라가 할례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행한 후에

모세의 발아래에 두며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막히면 하수도로 버려지고,

(버려지면,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내 삶의 영역에서 역류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역류현상에 의해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애굽은 초토화되고 맙니다.

역류현상에 의해서 십보라도 큰 어려움에 처했던 것입니다.

 

 

상수도의 삶과, 하수도 역류의 삶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은

이렇게 초토화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면서,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의 뜻인 십계명을 시내 산에서 알려주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혼인계약을 맺게 됩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루신 그 뜻이 하수도가 아닌 상수도가 되게 해서

나의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이고,

내 삶의 평강과 행복과 만족과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와 구약시대에 없었던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내 삶에 대해서 내 생각을 죽이면 하나님의 생각이 흘러 들어옵니다.

 

내가 내 자식, 건강, 미래 문제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면,

내 자식, 건강,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생각들이, 하수도로 들어가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시애틀의 높은 언덕에 있던 집들이 하수를 버리면

그것들이 몰리고 몰려서 아래 부분에서 역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하수도로 들어가고,

내가 계획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하수도로 들어가고,

내가 판단하면 하나님의 판단은 하수도로 들어가서,

그것이 역류할 때에,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공포와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삽니까? 누가 이렇게 살라고 했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살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상수도가 되면 아름다운 열매인데,

하수도로 버려져서 역류하니, 말할 수 없는 불행과 악취를 풍기는 근심으로 내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 대해서,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건 앞에서 모든 상황 앞에서 내가 죽는 것이고,

오직 내 꿈과 만족과 기쁨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라는 고백을 하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

 

하나님의 계획이 깨끗하고 맑은 상수도처럼 내 삶에 흘러들어오고,

가는 곳마다 열매가 맺혀지는 생명의 근원이 나타날 것입니다.

 

옛날 시애틀의 하수도 역류현상이 시애틀에서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와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는

아직도 옛날 시애틀의 하수도 역류 현상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자만이

하나님의 뜻이 생명의 근원이 되고 상수도가 되어서 흘러들어오며,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께서 평강을 위해 준비하신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놓치고 내가 살아남으로 하수도로 버려져서 역류되어

내 삶으로 들어와 온갖 불행을 스스로 자초하게 되는

이 미련한 삶을 이제는 중단하게 하여 주시고,

새로 건설된 산뜻한 시애틀 같은 그러한 삶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하여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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