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눅17:16~21, 롬14:17 출처보기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오늘날 그걸 우리는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세상’이라고, 아래 설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리는,
반드시 올바른 교회론과 올바른 종말론과 연결되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질문 드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이라고 그동안 생각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이런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당시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 라는 것은,
언제 메시야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해서,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가 회복될 것이냐?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구약에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언젠가 평화로운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열방을 판단하시고 다스리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가운데 으뜸으로 세워지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샬롬,
그 평화로운 안전한 시대가 분명히 올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럼 그때가 언제인지 빨리 말씀해 주세요..’
그런 질문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예수님께서 3년간 공생애 동안 가르치셨던 그 내용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처음에 오실 때부터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4:17절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그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온갖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에 대한,
그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 어떻게 지금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사역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그 위대함, 그 힘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가,
지금 예수님께 이렇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겁니다.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겠습니까?’
자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을 우리가 한 번 살펴봅시다.
본문 눅17:20~21절에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두 가지, 아주 중요한 교리적인 답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1. 주님께서 답을 하시는데, 뭐라고 하시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기에 있는 저 국경선을 중심으로 해서,
저기에 있는 저 지역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여기는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통치”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느냐?"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개념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나라’, ‘국가’를 말할 때, 항상 영토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 간에 분쟁이 일어나면, 결국은 영토의 분쟁입니다.
자 우리가 국가 간의 분쟁을 말할 때, 영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라는 개념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 그런 영토, 그런 땅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지금 누가 통치하고 있느냐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느냐, 누구의 주권 아래서 생활하고 있느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자 여기서 ‘나라’라는 말,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인데,
이 개념은 '영토'라는 개념보다는, '주권'이라는 그 개념이 굉장히 강합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서, 그 넓은 그 전체를 다 장악했던 나라가 로마제국입니다.
그런데 그 넓은 터를 어떻게 다 국경선을 긋겠습니까?
어떻게 거기 사이사이에 보초를 세우고, 여기는 로마 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여기가 로마 제국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여기에서 로마의 통치가 인정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긴 로마의 주권이 통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로마 제국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 개념을 생각할 때,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가서.. 그런 장소/영역 개념보다는
누가 통치를 하고 있느냐, 누구의 주권/통치권 아래에서 살아가느냐?
이렇게 우리가 이해를 할 때, 훨씬 더 다가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눅17장의 바로 전에 일어난 사건을 한 번 보시죠.
눅17:11~19절에,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 보면, 10명을 고쳐주셨는데,
다 이제 병고침을 받고 기뻐서 다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딱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 사마리아인은 너무 고마워서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 이 내용이, 바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질문이 나오기 바로 직전에 들어가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0명이 병고침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정말 경험한 사람은,
이 중에 아이러니하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라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고침을 받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내가 이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느끼는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이런 땅의 개념,
영토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그런 영역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라고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주권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이렇게 잡은 이유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신학을
한국교회가 그 동안에 좀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릇된 생각 중에 하나가, 마치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이라는,
교회의 테두리라는 그 영토 안에서 성장하고, 확장된다 라고
잘못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아마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그게 그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면 이 가르침이 굉장히 혼란스럽게 지금까지 진행되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라는 영토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교회의 테두리를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교회성장이었습니다.
교회성장을 아무리 시켜도, 세상은 정화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그건 많은 교인들의 생각에는, 교회가 할 일이 있고, 교회와 신자들이 할 일이 있고,
또 국가가 할 일이 있고, 또 믿지 않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 할 일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기에 있는 저 심령들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고,
그리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의 가는 길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에 아주 심각한 이원화 현상이 생겨버렸습니다.
세상과 나는 상관할 바가 없다는, 일종의 도피의식이 생겼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버렸습니다.
그럼 그 에너지를 어디다 쏟아내느냐?
그 모든 에너지를, 교회 건축에, 교회 성장에
교회 안에 복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만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가 성장되면
그 다음에 더 이상 더 갈데가 없으면, 교회를 더 크게 짓고, 더 이상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그 다음에는 지교회를 짓고, 여기 저기에 지교회를 지어서, 영토를 확장시키고,
그래서 '교회의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에 매서운 눈초리로 비판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는 성장했는데, 사회에 대해서 너무 외면했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주권의 개념으로만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서든지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있는 어느 곳에, 그곳이 직장이든, 학교이든, 일터이든, 이웃이든, 내 가정이든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가 인정되는 그곳이라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분의 주권 아래서 내가 생활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아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구나!' 하고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성도가 해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일부 교인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로 꽤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십시오.” :19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나 여러분, 싸우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투고, 서로 마음을 하나가 될 수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화평과 덕을 세울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아무리 성장하고 대단한 조직과 건물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이란 강좌도 열었습니다.
선교적 교회의 성도들은,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reality를
자기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중요한 교리를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교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라고 했고요, 두 번째로 조금 더 나아가면,
◑2.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부터 임합니다. Here and Now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시작되어서
이제 주님 오실 때 완벽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터인데,
영생이라는 것과 같이 연결되는 겁니다.
영생은, 지금 내가 죽고 난 다음부터가 영생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영생은 내가 하나님을 나의 삶에 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그 순간부터
영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에 중요한 교리적인 진리는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라는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already이죠.
즉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일어날 그런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인 사고를 갖고,
다가올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참자,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체제가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샬롬이 오게 될 것이다.’
라는 미래적 기대를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이 종말에 대한 개념은,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혀지는
대 격변적인 미래관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구조와 질서가 다 무너지고,
메시야를 중심으로 한 왕국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눈에 거슬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부정부패가 가득하다 할지라도,
조금만 참자, 조금만 기다리자..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겁니다.
그들의 사고는 대단히 미래지향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완전히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지금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다가올 것만 기대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즐기라는 것입니다. 있다는 것입니다.
here and now입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한국교회는
그동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것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현실을 자꾸 부인하고, 미래에만 소망을 두는,
그런 편향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분이 요한계시록을 1만번 읽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완전히 머리에 꿰 차고 살았던 분입니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시면서 집회를 인도하셨는데,
그때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있는 종말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뭐냐면 우리 한국교회가,
길선주 목사님의 이 종말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종말론은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는, 그런 종말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흥회는 물론 성도들을 많이 위로하는 데는 좋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일제치하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있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때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고통에 집중하지 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자' 라는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고,
우리 신앙이 현실도피적 신앙이 되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일부의 분석도 있습니다.
꼭 길선주 목사님의 종말론 뿐만 아니라, 대부분 우리 한국교회의 종말론이 미래적입니다.
편향되었다는 뜻이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천국'이라는 말을 쓰는데,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금방 떠오릅니까?
미래적인 천국이 금방 떠오릅니다.
물론 미래적인 요소가 있지만,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단어가 마태복음에 수도 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미래적으로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천당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막상 우리가 찬송가를 뒤지면서,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땅의 개념이 아니라, 주권적 개념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때가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런 개념의 찬송가를 한 번 불러보려고 눈을 비비고 봐도,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이제 찬송가 앞에 목차가 나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의 찬송가를 묶어놓았습니다. 하나씩 열어보면 실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 시켰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찬송을, 정상적인 교리로 부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최근에 복음성가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노래를 신학적으로 조금 더 가깝게,
올바르게 작사해서 부르는 노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좋은 씨앗’이라는 CCM그룹이 부른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노래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미 시작된 나라
주님이 오시는 날, 영원히 완성되는 나라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 기다렸던 그 나라
수많은 세월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이던 땅
미움도 분쟁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나라
사자와 어린 양이 다함께 뛰어놀 거룩한 땅♪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시작한 나라,
주님이 오시는 날에 완성되는 나라 라고 가사를 붙였습니다.
여기에도 100%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일부 들어 있지만,
그래도 찬송가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 찬송보다는 백 배 낫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한 겁니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중심,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 안으로만 들어오게 만들면 되는 것처럼..
이것은 교회가 하나의 도피적인 신앙센터가 되어버린 겁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를 방주라고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그런 이미지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방주 바깥을 너무 무시해 버리니까요.
자꾸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가 인정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참 우리가 저도 그랬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할 때만 해도 별 생각없이 말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 표현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합시다.’
자 이런 표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 확장한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매우 비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건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순종해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발전되고 확장된다는 그런 어마어마한 오류를 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확장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해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럼 성경에는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받으라’고 되어있고, ‘들어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받고 인정하라고 ,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서 살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개념에 확장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모아지고 커져서,
어디를 가든지 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에 너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런 두 가지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교리가 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영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토가 없습니다. 왜요?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통치가 인정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 10명 중에서 9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이방인, 사마리아인은 다시 주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마음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
교회라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 항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서로 다투고, 분쟁이 일어나고, 누가 더 머리냐,
이런 계속 싸움이 일어난다고 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마5~7장에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귀한 설교를 하신 그 배후에는, 바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도덕관과 세계관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에서 가장 중심되는 메시지가 6:33절인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인정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의를 너희 삶 가운데서 구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럽게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삶을,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보여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아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구나!' 라고 감탄하며
주께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밖혀 돌아가시고,
나의 구세주가 되었다고 믿으신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삶에 주인 Lord가 되신 다는 것도 믿으셔야 합니다.
▲골프 치시는 분들이 늘 그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골프라는게, 골프를 통해서 인생을 배웁니다.
어깨에 힘 좀 줘 보세요. 이게 안 됩니다. 누가 내 스윙을 보고 있으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해 가지고,
'그래 한 번 너희들 보는 앞에서 내 비거리를 보여주겠다' 하고,
힘을 꽉 주고 쳐 보면, 공이 휘어서 엉뚱한 데로 가든지,
아니면 아주 낮게 깔려서 멀리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다음 홀에 가서, 회개하고, 어깨에 힘을 다 빼고,
내 모습 이대로,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고, 겸손하게 힘을 다 빼고
적당히 몸에 힘을 주고 치면, 생각했던 것보다 멀리 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깨에 힘주면서 살면 안 됩니다.
살아가면서 '이건 다 내꺼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들,
뭐 다 내꺼야.. 이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여러분 이런 생각 가지면 안 됩니다.
주님이 하루 아침에 다 가져가실 수도 있으십니다.
어깨 힘을 빼고, 내 모습 이대로, 오늘도 주님, 나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선교적 교회의 성도로서, 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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