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을 치라 물이 나리니 출17:1-7 15.08.02.출처
◑서론/ 광야
▶광야 생활 40년은 이스라엘에게는 신혼생활과 같았습니다.
광야의 단순함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유혹하는 것이 없어 한 눈을 팔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이스라엘과 하나님만이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수도사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유혹이 있고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때론 이상적인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불신이나 우상으로 타락할 때, 광야시절로 돌아가자고 외치곤 했습니다.
호2:16~17 “이제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들(광야)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 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치리라. 애굽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이렇게 광야는 순수와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불편합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위험하고 문화생활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이 “원망” 주제입니다.
출애굽 하고 짧은 1년여 동안에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민수기 말씀은 전합니다. 민14:22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벌써 여러 차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듣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잘못된 것인가? 아닙니다.
불편하면 당연히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백성들의 원망을 그대로 듣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고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본론 / 원망
▶B. S. 차일즈라는 학자는 그래서 원망을, 제1유형과 제2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제1유형은 먹을 것과 마실 것 등 생존의 필요에서 나오는 원망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망에 대해서 백성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막 출애굽 하였을 때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여기서 우리를 죽이려느냐고 원망했습니다. 출14:11-12
그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 군대를 막아주셨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무사히 건너게 하셨습니다.
다음에는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 하였지만 써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먹느냐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출15:24
그러자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지난 시간에 묵상했던 대로, 식량이 떨어져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며
너희가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만든다고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만나를 비같이 내리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네 번째 원망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17:3
모세는 원망이 너무 커 돌로 칠 것 같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할 정도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솟구치게 함으로써,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하는 원망은, 당연하게 받아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민수기 20장의 므리바 사건입니다. *민20:13의 므리바, 시내산 이후
여기의 지명도, 오늘 본문과 똑같은 므리바입니다. *출17:7의 므리바, 시내산 이전
므리바가 ‘다투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광야 생활 중 식수 문제로 여러 번 원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20장, 이때는 광야 생활이 근 40년 가까이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20:4-5
이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지팡이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20:8
그런데 모세가 이번만은 매우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분노하면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20:10-11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모세는, 그가 그렇게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민20:12
이들이 나타내지 못한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야 수없이 보았을 터입니다.
저는 그것이 ‘사랑의 거룩함’이라 생각합니다.
거룩함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분노함과 마지 못해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려는데, 종이 주인보다 화를 낸 꼴입니다.
▶물론 이 정도 잘못으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하나님은 옹졸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은 모세 시대로 마감하길 원합니다.
가나안 땅은 여호수아라는 새로운 지도력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건수를 잡아서 모세를 퇴장시킨 것입니다.
크든 작든 어쨌든 모세의 잘못은 잘못이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안전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존권이라고 합니다.
생존권이 위협을 받을 때 인간은 불평이나 원망을 터트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원망을 하나님은 중요하게 들으시고 응답해 주심으로
자신의 하나님 됨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기본적인 욕구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1-32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뢰입니다.
이런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여행가이며 구호활동가인 한비야 씨의 <구호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에 소개된 간증의 일부입니다.
한비야가 아프리카 잠비아를 지날 때의 일입니다.
에이즈가 창궐한 지역에 설상가상으로 지독한 가뭄이 든 어느 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쓰러져가는 집 벽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호기심에 한비야 씨가 집안에 들어가 보니
스무 살 전후의 한 청년이 마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얼굴이며 목이며 양손에 부스럼이 가득한 게
한눈에도 에이즈 말기 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읽고 있던 책은 성경이었고, 담벽뿐 아니라 집안의 벽에도 온통 성경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청년은 마을에서 성실하기로 이름난 교사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재작년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수술을 받다가 그만 에이즈에 걸렸다고 합니다.
“성경 어디를 읽고 있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욥기요. 하나님이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고통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죠.”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나요?” 하고 이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원망은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죠.
지금은 솔직히 몰라요. 왜 하나님이 에이즈에 걸리게 하셨는지.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고통 중에 있는 저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욥기의 욥처럼 말이에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죠.’ 하는 말이
한비야의 가슴에 닿았습니다.
그 후로 한비야는 매일 저녁기도 때마다 아프리카 청년식 감사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신뢰입니다.
◑제1유형과는 다른 제2유형의 원망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넘어선 원망입니다.
이에 대해선 하나님은 분노하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 진격을 앞두고, 백성들이 보인 원망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메뚜기 같고 가나안 족은 거인 같다며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밤새도록 울며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이 때문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당시 어른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문제 앞에 주저하고 원망할 때였습니다.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할 때는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민11:1).
만나가 싫다고 고기 좀 먹고 싶다고 불평했을 때는
그 잇 사이에서 메추라기 고기를 먹은 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11:34
탐욕을 부릴 때였습니다.
우회해서 가는 길이 힘들다고 원망했을 때는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심판했습니다.
단순히 원망 한 마디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정도로 독재자가 아닙니다.
이들이 원망했다는 것은 조직적이며 장기적인 원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본적인 필요 외의 것에 대해서 원망하는 것은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욕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원망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원망스럽다고 하여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단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빌4:19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므리바는 아픈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대신, 다투고 원망했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곳의 명칭이 생수의 바위나 하나님의 기적 등의 이름이 붙었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므리바요 맛사가 되었습니다.
므리바는 ‘다투었다’는 뜻이며,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영광스러운 장소가 개운치 않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이든 좋은 추억의 장소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을 향하여는 오줌도 누치 않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성장시킨 곳으로, 감사의 곳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석의 물
우리 하나님은 반석에서 샘물을 내시는 분입니다.
시편에서는 더 화려하게 이 기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며” 시78:15-16
물이 강같이 흘렀다고 합니다.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물처럼 시원했다,
모두가 흡족히 마셨다고 말씀합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물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생명이 자랍니다.
제가 성지 순례 갔을 때가 여름이었습니다.
여름은 건기라서 모든 것이 누렇게 변해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푸른색 띠가 나타납니다. 물이 있는 곳입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동물이나 여행객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수와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낙원과 복을 말할 때 항상 시냇가의 나무, 물 댄 동산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에서 기원하였습니다. 지구 표면의 70%가 물입니다.
외계에서 생명체의 흔적을 찾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물이 존재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체도 70%가 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1-2%만 물이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고
5% 정도 부족하면 혼수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식물들도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반석입니다. 반석을 깨뜨려야 나옵니다.
반석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해도 기껏해야 며칠입니다.
다시 목마를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나라는 반석을 깨야 합니다.
내가 죽고 깨뜨려진 그곳에서 바로 사람을 살리는 물이 나옵니다.
완고해진 내 자신이 반석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내리치든 완고한 우리 자아가 깨뜨려져야 거기서 샘물이 솟구칩니다.
보들레르의 시 중에 ‘자신을 벌하는 사람’이란 시가 있습니다.
“분노도 증오도 없이
난 백정처럼 너를 치리,
모세가 바위를 치듯이!
내 사하라 사막 적실만큼.
네 눈가에서
고통의 물을 솟아나게 하리.
희망에 부푼 내 욕망은
짭짤한 네 눈물 위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배처럼 헤엄치리.”
보들레르의 시에서는 타인을 쳐서 물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수일 뿐입니다.
생명의 물이 아니라 죽음의 물입니다. 정작 깨뜨려야 할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칠 때 거기서 생수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웠던 것은 자신을 죽이는 훈련이었습니다.
자기 욕망이 죽고, 자기 힘이나, 자기 생각이나 자기에 대한 신뢰가 죽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목자로서 살던, 40년의 인생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감정, 욕구, 생각, 자존심마저 버렸습니다.
인간 모세가 죽었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백성들의 원망을 견디었고
출애굽과 광야 40년 동안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깨어지지 않는 반석은 마치 항아리가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항아리는 비워야 쓸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막힌 지하수를 얻기 위해서 암반을 깨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단단한 암반이 깨어지면서 그 곳에서 시원한 생수가 솟구쳐 오릅니다.
▶내가 죽는 것을 동양에서는 빈 배에 비유합니다.
배를 몰고 가다 다른 배와 부딪히면 화를 냅니다. 비키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 배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으면 화를 내지 않습니다. 빈 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비우면 다툼이 없습니다. 거기서 용서와 화해와 평화라는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신앙의 진리 또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거기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물이 나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7:37-38
나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나를 살리고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며 자신의 만족을 추구했던 그 욕망이 산산조각이 났을 때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안에서 영원토록 솟는 샘물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유대주의라는 완고한 편견이 깨어지면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폭력과 율법의 사람에서 사랑과 생명의 사도도 바뀌었습니다.
나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의 물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물입니까?
욕망의 강입니까? 아니면 자유의 강입니까?
나 혼자만 먹고 마시는 이기적인 물입니까?
아니면 모두가 마시고 누리고 그래서 살리는 생명의 강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고집과 무지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많이 살아나면 날수록
내 안에서는 더 많은 생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반석을 치라 그곳에서 물이 나오리니..’ 출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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