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확신 요일5:1~5 15.08.23 출처보기
※맨 아래 ◑거듭난 사람의 세 가지 DNA가 하이라이트입니다.
◑서론
▲옛 아라비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이니, 그를 멀리하라.
알지 못하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니, 그를 가르치라.
알되, 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잠자고 있는 사람이니, 그를 깨우라.
알되,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그를 따르라.”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은, 바로 알되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 잠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를 알고, 자신이 아는 바를 확실히 아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요한일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안다’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는’
이런 ‘안다’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그 성도들을 향해서,
‘당신이 아는 바를 진짜 아느냐, 아는 대로 그 안에 거하느냐?’
‘여러분이 아는 것을 진정 무엇을 아는지를 아느냐?’
이런 질문을 계속해서 던짐으로써, 더 깊은 확신에 거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확신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천국은, 죽고 나서야 아는 천국이 아닙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습니까?’ ‘그거야 가 봐야 알죠.’
가 봐야 아는 천국을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은 확신에 속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탈 때 공항에서 게이트 앞에 앉아 있으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무리들은, 그 티켓의 좌석표를 받아서 편안하게 앉아있고요,
또 한 무리들은, 좌석표를 못 받아서, 마냥 불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미국은 국내선 비행기가 많기 때문에, 좌석을 못 받으면, 게이트 앞에 대기하면서
즉석에서 좌석표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놓치면, 또 그 다음 비행기에 빈자리가 나기를 또 기다리며 안절부절 합니다.
언제 자기 이름을 부를지 몰라서, 화장실도 못갑니다.
이름 불렀을 때 안 가면, 다른 사람에게 좌석을 주니까요. 아주 불안해합니다.
우리 믿음의 생활이, 확신을 가진 사람과, 또 확신이 없는 삶은 이처럼 다릅니다.
요한일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확신입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5장에 이르러서, 3가지 확신을 차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승리의 확신’, 요일5:1~5
두 번째는 다음 주에 살펴볼 ‘구원의 확신’, 요일5:6~13
세 번째는 ‘기도응답의 확신’입니다. 요일5:14~21
이 세 가지 확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밖에도 사죄의 확신, 인도하심의 확신 등 여러 확신들이 있지만,
특별히 이 세 가지 확신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 생활에 연결되어 있는가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그것을 확신하는 그런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
오늘 본문은, 승리의 확신입니다.
승리를 확신하려면, 먼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합니다.
요일5:4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5 세상을 이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특정한 교리에 동의하는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거기에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인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거듭나게 한 사람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요일5:1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5:4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표현할 때, 본문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체험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아주 열띤 논쟁을 하는데,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 먼저인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함으로써 태어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해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인가요?
역사적으로 많은 신학자들이,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둘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분, 인간의 DNA를 보면,
두 개의 나선형 구조의 선이 서로 꼬여서 하나를 이루어 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죠.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사람이 살아나지만,
-동시에 그 던져진 밧줄을 내가 붙잡아야, 내가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 할 때는, 절대적으로 밧줄을 던져 주는 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믿음조차, 가질 수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하시기 때문에, 우리 믿음은 아무 필요가 없다 라고 하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책임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믿는다’ 라는 동사는 현재시제입니다.
*요일5:1a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그런데 1절 중간에 ‘하나님에게서 났다’라고 할 때, 시제는 완료시제입니다.
*요일5:1b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사건으로
우리가 믿게 되었다 라는 설명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믿었다면,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내 안에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새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동사의 시제를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사람은, 믿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거나
요청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주1)
◑거듭남이 첫 출발지점 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출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속한 인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인생으로 태어날 수 없는 거죠.
육체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서, 우리는 배고픔의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눈을 가졌기에 보는 것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고,
귀를 가졌기에 들리는 것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출생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인생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제한을 받습니다.
세상속의 인간으로, 그 시대의 역사속에 우리는 파묻혀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인생으로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삶은, 첫출발이 하나님에게서 나야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리라’
여러분, 내 안에 이 거듭남의 체험이 있는지,
거듭남의 그 경험과 그 새생명이 내 안에 있는지.. 확인해봐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많은 것을 해서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이후로, 내가 진정 거듭났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몇 주간이 되겠는데)
내 안에 이런 영적 새생명, 거듭남의 체험.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첫출발입니다.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불안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했어요..’
‘제가 30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어요..’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예’라고 짧고 확신 있게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거추장스런 다른 설명이 나오면, 거듭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만큼 분명한 체험이요, 확실한 것이요,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새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 순간에, 내가 간절히 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먼저 찾아오는 성도도 있고,
그러나 간절히 원했지만 한참 후에, 이 체험이 나에게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후에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의 역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듯이, 우리 안에 영적인 새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태어남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
확실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나에게 체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새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거듭남을 ABCD로 설명했습니다.
admit 내가 죽을 수밖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believe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commit 의탁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do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나는 영혼에 나타나는 영적 체험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세 가지 DNA
▲여러분, 출생한다는 것은,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홀로 세상에 존재하는 그러한 존재는 없습니다. 부모가 있습니다.
한 생명이 존재하면, 그는 그를 태어나게 한 부모의 DNA, 부모의 형질,
부모의 성품까지 닮고 태어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공동체안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의 DNA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DNA를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DNA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에게 3가지 영적인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 첫 번째 DNA는 <사랑>입니다.
요일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자녀를 왜 사랑합니까? 낳았기 때문입니다. 낳은 자녀를 사랑하듯이,
나를 낳게 하신 부모를 사랑하듯이, 사랑은 그 자연적 본성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 자리로 나와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어디서 났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끌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가족된 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듯이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듯이, 하나님에 대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거죠.
요일4: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DNA는 <순종>입니다.
사랑에서 순종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인 순서이죠.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감정적 체험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죠.
사랑은, 순종을 낳습니다.
사랑하면, 순종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사랑은, 어떤 수고와 헌신도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새에게 두 날개가 부담입니까? 새가 두 날개를 거추장스러워합니까?
힘들어 합니까? 새가 나는 힘이 그 날개에 있듯이,
진정한 사랑이 사랑되게 하는 것은,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첫 번째 하나님께로 난 사람의 영적 DNA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둘째,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세 번째 DNA는 승리입니다.
▲3. 세 번째 DNA는 <승리>입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자기 소원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군림하는 권세를 가진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역사상 세상을 정복했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알렉산더, 나폴레옹,
역사적으로 세상을 정복했다는 사람들은, 사실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정복당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모두가 세상을 얻기 위해 싸웠고, 세상을 이기기 위해 싸웠고,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이 그들을 정복한 것 뿐입니다.
이 세상에 탐욕, 야망, 이 세상에 포로가 된 것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또다른 세상의 포로된 사람들에 무너졌고,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나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주관적 믿음, 주관적 체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알고,
그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심과 같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4절에,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의 시제는 부정과거입니다.
*4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5절에 '세상을 이긴 사람' 여기서 현재시제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왜 시제를 달리 했을까요, 4절의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5절의 이김은.. 우리가 매일 매일 이겨간다는 것입니다.
4절, 5절을 함께 연결시키면, 과거에 예수께서 이루신 승리가,
현재에도 우리 삶속에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승리가 된다는 겁니다.
▲요16:33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예수님이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내가 승리하였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으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일까요?
그 모습 자체로는 세상에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죽음 가운데 다시 부활하시는 승리로 인해서,
그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고 할 때는,
우리 자신의 승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고지에 오른다고 해서, 그것을 승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는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라고 하는 그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승리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승리 이전에, 이것이 약속된 승리입니다.
그것을 내가 얼마나 체험하는가는, 우리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믿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의탁하고, 그대로 행할 때
그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도록, 내어드리는 믿음,
그 믿음으로 우리가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국가대표가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그 몇 명의 선수들이 나가서 경기를 하죠.
국가대표가 이기면, 국민 모두가 이겼다고 환호합니다.
내가 가서 경기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이겼다고 말합니까?
우리는 한 나라, 한 민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가, 왜 나의 승리가 되죠?
그것은 예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출생을 통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탁하고 그 분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할 때,
우리는 그 분의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승리를 말하기 전에, 사도요한은 2가지를 먼저 말씀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계명에 순종한다.
이 두 가지가 사실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계명에 순종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 없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과 순종과 승리는 영적인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 승리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세상적인 요소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홀로 남았습니다. 가족들과 소유물들을 다 건너가게 하고,
홀로 남아서 어떤 사람의 공격을 받고 서로 씨름할 때, 환도뼈가 위골됩니다.
위골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사람을 붙잡고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네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정하고 매달리는 사람은 진 사람인데,
환도뼈가 위골되면 진 사람인데, 그런데 왜 그가 이겼다고 말씀하십니까?
환도뼈가 위골될 때, 야곱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뭔가를 내려놨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집착, 그것이 물질에 대한 집착이든,
장자권이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든..
그가 왜 모든 가족들을 다 건너게 하고, 혼자 남았습니까?
그것은 앞에서 공격을 받으면, 자기는 살아남으려고 그랬던 것이죠.
환도뼈가 위골된 순간, ‘나는 더 이상 도망도 못 간다’는 것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환도뼈를 위골시키신 것입니다.
다른 뼈를 치신 게 아니라, 환도뼈를 치신 것은,
야곱이 마지막으로 믿었던 자기 다리를,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그럴 때 그는 오히려 자유하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집착을 내려놨을 때,
하나님은 ‘너는 이제 승리했다’ 선언해 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순종하고, 내려놓는 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즉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바로 내 안에 있는 세상적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깨어질 때, 우리는 영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몇 개월 전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님이 한국에 오셔서 식사할 때,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교회를 목회하면서 가장 큰 도전, 가장 힘든 것은 무엇입니까?’
순간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It’s me’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접니다. 제 안에 있는 세상이 저를 힘들게 하지,
누가 다른 사람이 저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큰 도전은 바로 제 자신입니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동안 저를 쳐다보시더라고요.
이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나를 정복하는, 내 안에 있는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고, 환도뼈가 위골되는 체험이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상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 그것으로 죽이려 했지만,
그는 생명을 내걸고, 기도하는 습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이긴 겁니다.
▲히브리서11장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많은 이름들이 나오지만,
후반부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에 보면,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름들이 나오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은 여러 가지 허물도 있고, 연약함이 있었지만,
이름이 나오지 않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11:36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 사람들의 이름이 뭡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이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떠한 위협과 순교할지라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는다는 거죠.
세상의 풍속에 휩쓸리고, 유행을 따라 살고, 시대의 관습에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연예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려지는 것을 꺼립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인기가 떨어질까봐 두렵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한다는게 아니라,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양심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행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풍조에 나는 휩쓸리지 않겠다’
나는 믿음의 결단, 세상을 이긴 믿음의 사람의 결단인 것이죠.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때,
거듭난 새생명으로 인해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이 점점 자라갑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점점 온전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구세주로서만 아니라, 주님으로서 그 분이 온전히 사실 때,
그리스도의 새생명이 내 안에 온전히 주장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날마다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누구나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셨사오니,
우리 모두가 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정복되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에 휩쓸리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에 위협과 세상의 두려움과 세상의 유혹에 무너지는 인생이 되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나타나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의 그 믿음으로 승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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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사람은, 믿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거나
요청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면 이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언제 역사하시며, 주시는가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들이 믿음 가운데 나아오도록 결단하도록 요청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 얻는 믿음을 주시고,
거듭나는 역사를 동시에 행하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롬10: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그때가 언제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실하게 증거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들 가운데 거듭남의 역사,
하나님에게서 태어나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거듭났다’ 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믿게 된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이 믿을 때에, 또한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하고 선교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왜 선교해야 되고, 왜 전도해야 됩니까?
극단적인 칼빈의 예정론에 빠진 사람들은, 전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자기가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다 거듭날 것인데,
내가 아무리 전해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을 건데,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만 돌리게 되면, 우리가 전도해야 될 이유가 없게 되지요.
왜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라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들려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새생명의 탄생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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