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성품을 훈련하라 갈5:22, 롬8:29 출처보기
◑1. 우리 성품의 변화는, 반드시 변화되도록, 작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언어와 성품을 훈련하라’입니다.
혹자는 이 주제를 보고, 마음속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성품이야, 이게 타고나는 건데, 이게 훈련으로 변화될 문제인가?’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질과 성품은 다릅니다.
기질은,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향적이고, 반대로 내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두 면이 다 있습니다. 개인사를 얘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중학교 때까지 성격이, 반에서 제가 있는지도 다들 몰랐어요.
어머니가 남의 집에 저를 데려가면, 오줌이 마려워도 꾹 참고 앉혀놓은 그 자리에 그대로
말 한마디 안 하고 앉아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1학년 때, 자퇴를 한 번 하고, 또 3학년때는 휴학을 한 번 하고
가정적으로 개인사에 큰 풍랑이 일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환경이, 사람을 확 바꾸더라고요.
그때부터 성격이 좀 거칠어지고, 또 외향적이 되고.. 소리도 막 지르고,
그때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내성적인줄 알았는데
이런 면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저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못된 인간은 절대 안 바뀐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복음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질은 안 바뀝니다. 그러나 성품은 바뀝니다. 달라집니다. 변합니다.
▲그래서 오늘 ‘언어와 성품을 훈련하라’는 주제이지만,
사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입니다.
A W 토저는 ‘사람됨과 인간의 행동사이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그런 인간 됨됨이 속에서
나오는 태도이고,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행동은, 그의 내적인 인품의 진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꼭 토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는 그 사람의 성품에서 나오고,
성품은 언어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품을 중심으로 해서, 성경은 우리 성품을 어떤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고,
어떤 차원으로 끌고 가고 있는지를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잘 아는 성경구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우리를 부르셨대요.
이것을 ‘예지예정’, 미리 알고 미리 정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도록 부르신 자들은, 29절에 이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8:29
이렇게 예정하신 목적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해졌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의하든 안 하든,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것은, 목적이 명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획을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런 확정적 설명을 미리 해 놓으셨습니다.
사46:9b ‘나는 하나님이라. 나같은 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 뜻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이 계획을 하셨어요. 그 계획을 그분이 친히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셔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계획하셨어요.
그러면 그 계획은, 이사야에게 일러주신 말씀처럼, 반드시 될 일입니다.
그건 우리들과 상관없이 이루어질 일입니다.
잘 보세요. 우리의 성품의 변화는, 주도권이 내 의지에 있지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그 분의 주도권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변화가, 우리 속에 가능성을 부추기고,
우리의 어떤 의지를 발동시키는 싸움이라면, 우리는 절망스러운 존재입니다.
내가 나를 잘 알잖아요. 우리는 절대 우리 힘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인간의 성품의 변화 문제도, 그 주도권을 하나님이 붙드시고 계세요.
그리고 그 분이, 뜻을 정하시고 주도적으로 그렇게 하시겠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설명을 확증학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하나님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시겠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그 성품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2.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그 성품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오래 전에 이런 제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를 찾아오더니, 자기가 자원해서 운전도 해주고,
3개월만 저를 따라다니면서, ‘저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나한테 배울 것 없어. 쓸데없는 말 말고, 네 할 일이나 가서 해’
그렇게 해서 쫓아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에 A간사가 정말 훌륭한 크리스천입니다.
그 사람을 배우고 싶으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사람을 좇아다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면
우리를 누구에게 밀어 넣으실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밀어 넣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너무 감사하게도 주님의 형상을 배우려면,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주님께로 가야되는데, 주님이 먼저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사도요한은 하늘의 예배현장에서 ‘이리로 올라오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배도, 그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11:28절에도 ‘다 내게로 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로 와서 배우라’
자 여기서 우리가, 온유와 겸손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랍니다.
▲자, 예수님의 멍에가 뭘까요? 그걸 메고 배워야 된답니다.
멍에란, 짐승이 메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내 인생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가거나, 살거나 할 운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땅에 오실 때는 멍에를 멘 짐승처럼 오셨어요.
그 말은, 이미 이 땅에 보내어질 때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생과 계획대로 살기 위해서 오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말이, ‘내가 멍에를 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신 멍에는 십자가요, 그 쓴 죽음이었습니다.
멍에는, 어떤 멍에든지 쉬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멍에가 얼마나 힘겨웠던지, 그 멍에를 지시기 전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름 틀’이란 의미를 가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와 대면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드리죠. 얼마나 힘들고 그 순간이 싫었던지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런데 결론은 ‘할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겠지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로, 겟세마네 동산의 밤은, 새벽을 맞이합니다.
◑3.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온유와 겸손이라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정직히 세워져서,
그 뜻 앞에 순응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온유와 겸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동양적 미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즉 온유란, 부드럽고 나약한 힘없는 존재가, 계속 당하고,
그래서 뭐든지 손해보고.. 푹 쑤시면 쑥 들어가고, 이런 게 온유인줄 압니다. 아닙니다.
또한 겸손도.. ‘찬양대 좀 하시죠.’
‘저 못합니다. 다음에 할게요.’
이건 겸손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찬양대 좀 하시죠.’
‘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은사로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이게 겸손입니다. 이건 잘난 체가 아닙니다.
음악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못 해요’하며 거부하는 사람은, 교만이죠.
하나님이 주시면, 받은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적 겸손입니다.
▲온유는, 겸손과 사실상 같은 의미인데요.
온유란, 헬라인들이, 어떤 때 사용했느냐 하면,
어떤 사람의 이마에 열이 펄펄 끓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투약을 했습니다.
약을 먹고 한 잠 푹 자고 났더니 열이 다 떠났습니다.
그때 헬라인들은 ‘프라우스, 온유해졌다’
즉 어떤 힘이 통제에 의해서 잘 다스려진 것이 온유입니다.
또 하나는, 들개를 한 마리 잡아왔습니다. 들개이니까 처음부터 말을 안 듣지요.
그래서 명 조련사에게 보내서, 개 훈련을 시켰습니다.
명 조련사가 3개월동안 이 들개를 매일 훈련을 시켰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주인이 개를 찾으러 와서 보니,
뛰라면 뛰고, 앉으라면 앉고, 물어오라면 가서 척 물어옵니다.
3개월 전의 개가 아니라,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 프라우스. 온유해졌다’
자, 온유라는 덕목은 정확하게 힘없는 자가 겪는 어떤 나약한 태도가 아니라,
‘어떤 하나의 힘이, 통제에 의해서 잘 다스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성령의 열매와 같습니다.
갈5:22~23절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줄이고 축약해서
딱 두 단어로 정리를 하자면, 온유와 겸손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외워보십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그런데 헬라말로 보면, 그 열매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원래 ‘복수’여야 맞겠지만, 단수입니다.
그 의미는, 이것은 각각의 열매가 아니라, 한 인격속에 9가지가
유기적으로 다 함께 맺어야할 덕목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은 온유한데, 사나워’ ..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자비한데, 거칠어’ .. 말이 안 됩니다.
9가지 열매는, 한 인격속에 유기적으로 맺어야할 덕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우리에게 초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와서 내게 배우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이, 그리고 십자가 지셨어요. 즉, 온유와 겸손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덕목은,
우리 동양적 미덕에서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인생사에 나에게, 내가 정말 하기 힘들고,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과제들이 수없이 밀려옵니다.
인생사에 똑같은 파도가 없듯이, 늘 밀려오는 파도마다 얼굴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덤덤히 주의 뜻으로 수용하는 삶의 태도까지를,
성경은 겸손, 온유라고 얘기합니다.
▲앤드류 머레이가 쓴 조그만 책자에 ‘겸손’이라는 주제를, 기가 막히게 정의했어요.
‘겸손이란,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여기에 순응하지 못할 때, 우리는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Why me? 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기가 못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세네카가 쓴 <화>라는 책에 보니, 이런 설명이 있었어요.
‘화내는 사람이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두 번 다시 화를 안 낼 것이다.’
누가 화 낼 때, 거울 쳐다보면서 화를 냅니까? 그냥 격발시키죠.
누가 분노합니까? 자기 인생에 숙명처럼 부디끼는 문제에 대해서 용납이 안될 때,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라는 거대한 힘겨운 짐앞에서,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이걸 뭐라고 그러냐면 온유와 겸손이라고 얘길합니다.
◑4. 그래서 하나님은, 온유와 겸손한 성품을 만들어 가는데,
우리 인생들에게 3가지 도구를 쓰십니다.
▲1. 첫 번째는 성경의 도구입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 성품을 깎고 빚고 자르고, 둥글게 만드는데
하나님이 첫 번째로 사용하시는 도구가 성경입니다.
저는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인간 못된 것은 절대 안 바뀐다’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너무 징그러운 인생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그런 소신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복음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요. 믿으십니까? 반드시 바뀝니다.
왜냐면, 그 주도권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면 되는 겁니다.
성경을 많이 배우고, 많이 읽게 만들고, 많이 듣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2. 두 번째는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 속에 분별력과 가치관을 설정하십니다.
여러분, 리더가 갖추어야될 덕목 중에, 저는 일차적으로 제일 필요한 덕목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서슴없이 ‘분별력’이라고 말합니다. 리더는, 일차적인 덕목이 분별력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제사장으로서 사회의 리더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갖춰야될 덕목 중에서 열정, 부드러움, 의로운 분노.. 다 필요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분별력과 가치관과 판단력입니다.
그건 어디서부터 생성되는가 하면, 성경에서 생성되는 겁니다.
그 가치관이 제대로 들어있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판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대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어 합니다.
그래서 분별력이 그 인생 속에 깊숙이 새겨지기 까지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이 우리 성품을 가꾸고 빚어가는 세 번째 방법은, “환경”입니다.
환경에는, 말 그대로 환경이 있고, 인간이라는 환경도 사용하십니다.
그걸 시편에선, 다윗이 ‘인생 막대기’라고 표현했죠.
자, 성경에 족장시대부터 훑어볼까요?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의 별명이 믿음의 조상인 것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는 가를 가장 잘 설명한 인물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창11장에서부터 인생을 추적해 보세요. 얼마나 치사하고 야비한 인간입니까.
오죽했으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은금패물을 받고 넘기는가 하면,
평생 그걸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실수하고, 못 기다리고,
아내를 괴롭히고 치사하게 굽니다.
그러던 아브라함이, 창22장 즈음에 가서는, 아들을 내어놓는 자리까지 달라집니다. 변화됩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이 뭐냐를, 정확히 정의하라면,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설득작업이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걸 우리가 스스로 믿었다고 우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까지 가도록,
우리 인생에 한 번도 눈 떼지 않으시고, 밀어붙이시고 설득하신 결과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입니다. 그 수많은 가나안에 입성 과정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가꾸고, 뽑을 걸 뽑아내고, 빚어내고, 만들어가셨습니다.
또 우리가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야곱과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의 분노를 사서, 죽을 뻔 했다가 노예로 팔려갑니다.
종살이도 모자라서, 가서는 안 될 감옥에까지 들어갑니다. 뭘 배웠을까요?
아무 것도 배운 것 없습니다. 끝없는 분노만 가슴에 쌓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꿈을 해석해 주는 바람에, 총리가 됩니다.
그래서 요셉의 클라이맥스를 총리에 오른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요셉의 일생의 절정은, 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천지사방에 기근이 임합니다. 가나안에 살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결국 총리가 된 줄도 모른채 동생 요셉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그제야 요셉이 깜짝 놀랍니다. 그제야 요셉의 이 엉클어졌던 분노와 좌절과 절망과
이해할 수 없는 인생사가 쫙 퍼즐이 맞춰지면서,
하나님의 큰 그림에 눈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아, 이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로구나. 그리고 그 목적을 그제야 깨닫습니다.
이 환란과 기근의 때에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그러셨구나.
그제야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새로운 인생의 해석이 주어집니다.
그때까지는 재수가 없고, 팔자가 기구해서 그냥 애굽에 팔려온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고 고백합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고백을 그제야 합니다.
여러분, 그제야 요셉은 온유해지고, 겸손해진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이란 것은, 설명 안 되는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 앞에서,
내가 승복하는 인생의 태도를 뜻합니다.
요셉만 바뀌었나요? 아니죠. 머리를 조아려 무릎 꿇은 형들을 보는데,
기가 막히게 옛날 그분들이 아닙니다. 배다른 형제이긴 했지만, 죽이려 했고,
모함에 빠뜨리길 좋아했고, 서로가 비난, 고소 고발했던 형제들이,
베냐민 동생을 놓고, 요셉의 친동생이요, 그들에겐 배다른 동생입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을 대신한 아버지의 생명같은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 베냐민을 애굽에 남겨야 한다고 하니까, 유다가 나섭니다.
이 아들은 우리 아버지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대신 볼모로 잡히겠습니다.
이게 옛날 형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고난의 역사입니다. 환경의 고난입니다.
매일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형들은 끔찍한 추억을 하나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미쳤지, 미쳤지. 우리가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쩌자고 아버지를 우리가 저렇게 슬프게 만들었을까’
그 아버지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가 무슨 짓을 했나?’ 그러면서 형제들이 달라집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내놓겠다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기가 막히게 달라진 겁니다. 그런데 아들들만 바뀌었나요? 아니죠.
아들들이 돌아가서, ‘아버지, 무슨 연고인지 막내 동생 베냐민 데려와야 한답니다.’
그런데 그 얘길 듣던 야곱의 입에서, 기가 막힌 고백 하나가 터쳐 나옵니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라’
이게 야곱이 맞습니까? 야곱의 평생 주장이 무엇입니까? ‘이것만은 안 됩니다.’
얍복 강가에서 어둔 밤을 홀로 고독하게 지낼 때에도, 자식들까지 다 건너게 하고도,
하나님을 이겼을 정도로,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랬던 야곱이 그 아들을 잃고, 딸을 상처받게 만들고 하는 이 가정사의 아픔을 통해서,
야곱이 다 벗겨집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돈,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러면서 요셉을 대신한 생명 같은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 앞에 야곱이 꺼내는 말이 ‘내가 잃으면 잃으리라’
이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인간을 만들어 갑니다.
첫째는 성경, 둘째는 분별력, 셋째는 환경으로 인간의 성품을 만들어 가십니다.
자, 우리 또 왕정시대로 넘어와서 다윗은 어떻습니까?
평생 주군인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살인적 추적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나라로 식객이 되어 떠돕니다.
마지막에는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까지도 배반의 칼끝을 자기에게 겨눕니다.
그리고 다윗은 또 맨발로 도망하죠.
그거 그런가보다 하지, 그걸 한 번 왕의 입장에서 내가 겪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시편 기자가, 그런 다윗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시132:1
다윗이 겸손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 돕는자가 없었도다’ 시107:12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지로 밀어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인생 막대기와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깎아 내세요.
욥은 그 질곡의 고통을 겪고 나서, 신앙의 한 꺼풀이 벗겨지면서 꺼내놓았던 유명한 고백.
‘전에는 내가 귀로 듣기만 했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제는 피상적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깊게 만들었던 가요? 고난입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 이것만은 못하겠어요. 이것만은 정말 감당이 안 되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우리로 하여금 내려놓게 밀어붙이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온유와 겸손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삶의 태도. 어렵죠.
또 이 한주간도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와서 내게 배우라는 주님의 초대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 주님의 초대 앞에, 기꺼이 눈물 뚝뚝 흘리며, 비명을 지르면서도
‘주님, 저는 못하지만, 주님이 저를 붙잡아 주실 줄을 믿습니다.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신음같은 고백으로 일어설 수 있는, 승리할 수 있는 우리 모든 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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