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가 된다는 것 수19:49~51 15.05.17.설교스크랩, 출처
▲문제 제기 : 엘르아살과 여호수아 – 이 순서가 과연 옳습니까?
수19: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여러분, 이 구절에서, 혹시 눈에 특별히 들어오는 게 있습니까?
‘이 부분이 정말 이상하다’ 라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이 여러분 시야에 드러납니까?
우리가 본문을 향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위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51절에서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여러분, 이 부분에 한 번 시선을 고정시켜 보십시다.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모세와 아론
그렇다면 출애굽기의 내용과, 오늘 이 여호수아서의 본문을 비교해서 살피면서,
이 설교의 논지를 추적해 들어가 보겠습니다.
출5: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출6:27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여기도 ‘모세와 아론’의 순서로 나옵니다.
출7:6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도 ‘모세와아론’의 순서로 나옵니다.
7: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
7: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모세와 아론’의 순서로 나오는 구절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도 계속 나옵니다.
대강 계산하면 무려 70여번 나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본문에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아니라 ‘엘르아살과 여호수아’ 이니까요.
그 순서가 이상합니다.
모세오경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라고 한 것은, 모세가 지도자 이기 때문에 당연하고요,
심지어 오경에는, ‘모세와 아론이’라고도 기록합니다.
누구를 앞세웁니까?
모세가 아론보다 항상 앞섰니다.
아론이 모세보다 나이 많은 형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모세와 아론’이란 순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모세’라는 구절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론은 연장자요, 형일 뿐만 아니라,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순서는 언제나 ‘모세와 아론’입니다. 40년 동안 그 순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무리 하면서, 모압 땅에 이릅니다.
저 앞에 요단강이 보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같은 해에, 아론과 모세를 하나님 품으로 부르십니다.
아론은 123세를 일기로 호르 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부름을 받기 직전에, 아론은 자기의 직임을 아들 엘르아살에게 인계합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12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때 모세는 자기가 지금까지 맡았던 일을, 여호수아에게 맡깁니다.
▲여호수아와 엘르아살 순서가 되어야 옳을 것 같은데요..
출애굽 여정에는, 언제나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나안 땅 정복의 여정에서는, 언제나 누구의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합니까?
여호수아의 이름이 먼저 나와야 정상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모세가 아론보다 항상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을 비교하면,
여호수아는 엘르아살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습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할 때 나온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았던, 바로 그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서 1장에 보면, 엘르아살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엘르아살은 여러분, 가나안 정복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것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 관계로 보나, 나이로 보나, 지금까지 혁혁한 공로 여부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순서는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렇게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이렇게 엘르아살이 앞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특별 케이스겠지.. 라고 생각하고,
여호수아서 전체를 제가 뒤져 보았습니다. 엘르아살과 여호수아가 함께 등장하는 부분이
본문을 포함해서 4구절이 있었습니다.
수14:1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여기에 ‘엘르아살과 여호수아’ 이렇게 나옵니다.
수17:4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아와서 말하기를..
역시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입니다.
수21:1 그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역시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입니다.
한 번도 여호수아가 앞장 서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가 기록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록하면서,
자기보다 엘르아살을 항상 앞세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제가 이상하게 생각한 이유를요.
모세는 항상 ‘모세와 아론’이었어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항상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여호수아에게 계승되었고,
아론의 역할이 엘르아살에게 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관례가 ‘모세와 아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항상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의 순서입니다.
◑여호수아로 산다(본 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바로 이 수19:51절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해답이 이 본문 51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는 누구를 앞세웁니까? 자기보다 엘르아살을 앞세웁니다.
그런데 엘르아살을 앞세우는 이유가 뭐냐면, 엘르아살이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엘르아살은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 어떤 다른 이유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시에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3가지였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째, 제사장은 언약궤를 맡아서, 언약궤를 지고 책임지는 일을, 제사장이 맡았습니다.
언약궤 속에는 하나님이 친히 쓰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제사장 엘르아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엘르아살을 앞세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하나님께서 먼저 언약궤를 진 제사장들로 하여금, 요단강에 먼저 들어서도록 했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11절에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제사장이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언약궤가 건너갔다’고 표현합니다.
언약궤와 제사장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제사장 엘르아살을 앞장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앞세우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시16:8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그 말씀을 좇아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2.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은,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제사장이 맡은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를 집례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제사장만이 했습니다.
사울 왕은, 제사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사를 집례하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도 선지자였지만, 제사장과 함께 제사를 드린 듯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아론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께 분향을 하면서, 다른 불을 담아 드리다가 거기서 즉사했습니다. 레10:1~2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자를 찾으시는데, 그런데 참된 예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네, 주일날에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이 정말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 안에만 계시지 않고, ‘한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소자와 주님이 함께 계시며, 소자를 당신과 일치시키고 계십니다.
어제 우리가 ‘사랑의 바자회’를 가졌습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 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오셔서, 같이 교제도 하고, 하루 종일 시간을 가졌는데요.
저는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어제 밤늦게까지
제 뇌리에서 한 사람이 지금도 떠나지 않고 기억납니다.
그 형제는,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이미 받았습니다.
어떤 경우에 병원에서 특별약을 가지고 임상실험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그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최악이었습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전국에서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맑은 공기 마시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어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목사님, 오늘 교회 행사가 있는데, 제가 와야죠.’
그 형제는, 주일 3부예배 때 찬양대로 섬겼습니다.
호흡이 가빠서 찬양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그 형제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3.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일을, 제사장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민수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6: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비는 권한을, 모세에게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을 비는 이 권한은, 제사장에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론으로부터 엘르아살에게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호수아가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제사장 엘르아살을 자기 앞에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다 헛된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갖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적용/ 나는 여호수아가 되어있는가요?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 수19:51에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놀랍게도,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51절에 있기는 있는데, 문장 뒤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엘르아살이 등장하는데, 언제나 엘르아살로 그냥 시작합니다.
이것은 특이합니다. 우리말 번역이 잘못되었느냐, 저는 잘못 번역되었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번역을 두 종류로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렇게 번역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번역은,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이것이 정확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호수아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엘르아살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어려도, 경험도 일천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 엘르아살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셨기 때문에,
나는 그를 앞세운다, 존중한다..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매사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이 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셨다.
이런 자세가 시종여일하게 변치 않았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여호수아로 사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와,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 일을 부족하지만 감당하고 있는 자를, 앞세우고 존중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로 살았던 조덕삼 장로
저는 지난 2월에 전북 부안에 다녀왔습니다.
가니까 거기에 김제 금산에 아주 오래된 교회가 하나 보였습니다.
1905년에 설립되었으니, 110년 된 교회이지요.
그 교회는, 110년 전에 한 선교사와 조덕삼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지금 현재 이 교회는 새로 복원되어서, 기역자 모양의 기와집으로 되어있습니다.
당시에는 남녀가 유별해서, 남자와 여자가 나누어 앉았기 때문입니다.
금산에 조덕삼이라는 거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금광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금산 땅은, 조덕삼의 땅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 전부가 조덕삼의 소작인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라이트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고, 자기 집과 땅을 기증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모든 중심적 역할을 조덕삼이 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대문을 똑똑 두드리는 한 거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서,
전국을 그냥 그렇게 떠돌면서 거지 비슷하게 살다가,
흘러 흘러 금산에 와서, 큰 집이 보이니까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조덕삼은 이 거지 청년을 자기 집에 머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머슴이 되어서 그 집에서 일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주인이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같이 교회를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던 얼마 지난 뒤에,
금산교회에서 장로 투표를 하게 됩니다.
모두 다 조덕삼이 초대 장로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의결과가 나왔습니다.
머슴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조덕삼은 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전에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853년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장로투표를 했습니다.
그때 백정 출신이 박성춘 집사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양반측 교인들이 반발을 하면서, 그들은 그 교회를 떠나서
저들이 세운 교회가 안국동에 위치한 안동교회입니다.
1894년에 연동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에서 장로투표를 했는데,
이번에는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 집사가 덜컹 장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주1)
그러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나와서 세운 교회가, 종묘 근방의 묘동교회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장로투표를 하고 나면, 보이지 않게 분쟁이 많습니다.
장로투표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그 일은 거론하지 않더라도
다른 일들에 대해 불평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잦습니다.
조덕삼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 결과를 받아든 조덕삼은
성도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조금전에 정말 훌륭한 일을 해내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은,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참 대단한 분입니다.
장로감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이자익을 장로로 받들면서, 잘 섬기겠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자기 집에서는 머슴인데, 교회에서는 장로로 섬겼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후에 조덕삼은
이 머슴 이자익 장로를, 평양에 있는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냅니다.
모든 경비를 다 보조합니다.
이자익은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그는 달려가서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합니다.
그리고 그가 장로로서 이자익 목사를 섬겼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담임인 이자익 목사를,
훌륭하게 뒤에서 서포트해서, 그 금산 촌구석에 있는 이 교회에 목사님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까지 역임하게 지원합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총회장을 무려 세 번이나 연임할 수 있도록
뒤에서 받들었습니다.
이 조덕삼의 후예들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의 손자가 우리가 잘 아는 조세형 국회의원입니다. *조순형 의원와 구분 요. 대도 조세형과 동명이인
그는 4선 국회의원을 연임했고, 장로로서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2009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그 일들을 감당하는 자를, 우리가 앞세우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는 대로, 스승의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이렇게 편지합니다.
갈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로마 군대에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속국나라 백성인, 저 갈릴리 촌구석에서 어부 노릇하는 베드로 앞에서 머리를 숙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올 때, 고넬료가 그 앞에 엎드리면서 머리를 숙이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행10:26
무슨 뜻인가 하면, 고넬료가,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베드로 앞에 엎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넬료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33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제는 모세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라는 뜻은 ‘구원 받은 자’입니다. 이제 구원 받은 자로서 만족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되어야 합니다. 즉 여호수아는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감당하는 자를 우리가 앞세우고 존중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여호수아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힘쓰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고찬익
고찬익은 1861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갖바치 천민 출신으로 태어났다.
고찬익은 전형적인 노름꾼, 사기꾼, 술꾼으로 유명하였다.
관가에 붙들려가 매도 수 없이 맞았으며, 이 일로 인하여 한때 벙어리가 되었던 일도 있었다.
당시 관가의 힘은 막강했으며 천민 정도는 죽여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던 시대였다.
고찬익은 한번은 빚 독촉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독약을 먹고 자실을 시도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반病身'이 되고 말았다.
이때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와 김영옥(연동교회 김형태 원로목사의 할아버지) 조사가
나누어준 전도지를 받아 읽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는데 잠결에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고찬익은 그 꿈이 하도 생생해서 가는 곳마다 꿈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게일 선교사는 고찬익이 회개하는 모습에 놀랐고
한문 옥편을 펴들고 남에게 좋은 일을 주는 사람이 돼라고 찬익(贊翼)이라 이름을 지어 주어
그 갖바치 출신은 고찬익(高贊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연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의 은혜를 갚는 길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전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의 사명으로 삼았다.
형편없던 인간이 예수를 만나 지난날의 술 주정꾼들하고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종로 5가에 살고 있던 갖바치들을 향해 전도를 하였으며,
다른 갖바치들도 자신들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던 고찬익의 변화된 모습에 다들 놀라고 말았다.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가 번역했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天路歷程)을 들고 다니면서
“내가 이 책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 책의 주인공인 기독도(基督徒)가 될 수 있습니다.”라며 전도했다.
그의 열심 있는 전도로 연동교회는 매주 새로운 신자가 등록했고
1900년 게일 선교사는 그에게 조사의 직함을 주고 자신의 일을 돕도록 하였다.
교인이 점점 많아지자 게일 선교사는 연동교회의 당회장으로서 상회에 장로 가택 청원을 하게 되었다.
1905년 장로 선출을 위한 공동의회가 개회되었다.
투표가 다 끝나자 게일 선교사는 회중들에게 발표하였다.
“이번 선거에서 첫 장로로 고찬익 조사가 선출되었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교회당이 떠나 갈 듯이 울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양반들이 장로선거에 낙선하자
일부가 종묘에서 가까운 봉익동에 묘동교회를 설립하고 나갔다.
그러나 종로 5가 일대에 사는 많은 천민들이 자신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연동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게일 선교사는 고찬익 장로의 신앙에 놀라 1908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시켰다.
고찬익 장로는 장차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고 꿈꿨지만,
안타깝게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식중독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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