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6∼17, 시46:10 1996.03.10.설교스크랩, 출처
※아주 오래된 설교가, 인터넷에 아직 남아 있어서 스크랩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장 10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원문의 뜻에 더 가깝게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줄 알아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우리 입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잠시 우리 모두 멈추어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 이신 줄 알고, 또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는 멈추어 내가 하나님인줄 알아라’ 당부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망각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영원자시요 전능자이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정말 이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그는, 그와 같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뜻과 계획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아는 자요,
반면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뜻, 내 계획만을 고집하고
그것이 무산되었을 때,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망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평안이나 감사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지방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50대 중반의 여성도님이 있습니다.
결혼한 뒤 30년 동안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을 걸어오면서도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책임에 결코 소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년전, 그 분은 갑자기 심각한 조울증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 희생의 대가가 도대체 무엇인가?
진액이 빠질 대로 다 빠져버린 내 인생,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
이런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들이
그 분을 조울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온갖 약을 다 써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증세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 그 분의 조울증은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도대체 내 인생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생각하며 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잘못된 결혼의 동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매장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남자의 집안은 돈이 많고 또 하나님을 잘 믿는다."
그녀는 중매장이의 그 말을 듣고, 선뜻 결혼을 했습니다.
‘돈도 많은데다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늘 복을 내려 주실 테니,
그런 집안에서라면 자기의 계획과 꿈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펼칠 수 있으리라’ 라는 판단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망상이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완고한 시부모님은 며느리의 사회활동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때부터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희생당하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끝내 30년만에
그녀를 조울증 환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날,
그녀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매장이의 말을 잘못 판단하여 결혼한 뒤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가지도 없었지만,
그러나 자기와 남편과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아름답게 펼쳐졌고,
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부부에게 아름다운 자녀들을 주셨고,
그 자녀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또 자신의 가족들을 통하여, 도처에서 향기로운 복음의 열매를 거두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습니다.
그처럼 자기 인생 속에서 무산되어 버린 자기의 뜻이 아니라
이미 찬란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피해의식과 조울증은 치유되었습니다.
가만히 멈추어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을 때,
그녀는 평안과 감사를 되찾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얼마 전까지 이 여인의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뜻, 내 계획만을 붙잡고 고집하다가,
몸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도, 영혼은 심각한 조울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아침 우리는 모두 멈추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본문 16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 앞에서 흥분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하고 싶은 것 다하며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의 참 의미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원하는 것만 구하느라
심각한 영적 조울증에 빠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기도드릴 때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린다'는
고백으로 기도를 끝맺습니다.
죄인 된 우리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없으므로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이름을 빌어 기도드린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다 받게 해주신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고백으로 기도를 끝마치기만 하면, 모두 응답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석달 전 요한복음 14장에서 배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한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14절을 통하여 연거푸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말씀의 무게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는 쪽에 실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히 말하여 참되시고 신실하신 그 분의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의 자식인 제 아이들이
옆집에 가서, 목사인 제 이름으로 술을 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을 구해야 한다면, 목사의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같은 이치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잡한 내 욕망이나 정욕의 것을 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구할 때에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이름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요,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을 도우시고
책임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지금 주님께서는 못 박히시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내고 계십니다.
즉,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끝내신 뒤,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고 계시는 바,
그 내용이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유언의 전반부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3번씩이나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것만을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당을 좇는 자의 행태일 수는 있겠으나
주님의 이름으로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일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주님을 포도나무에, 우리를 가지에 비유하고 있기에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포도나무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정말 포도나무가지라면 오직 한 가지,
포도나무 가지다운 가지가 되기를 구하는 것, 그것뿐일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사과나무 가지나, 배나무가지를 구할 리가 만무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정말 가지다운 가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가지가 구하지 아니해도 포도나무는 자기의 모든 진액, 수분, 영양분, 엑기스를
가지에 공급해 주므로, 가지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도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다운 가지가 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공급하시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가지가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 할 때, 우리는 결코 나를 뛰어 넘을 수 없고,
영적 조울증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가지가 됨으로서
주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것을 다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뛰어 넘을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진리와 더불어 비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첫째 내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주님의 가지라면,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고 받는 시기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게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갖고 싶어하는 것이 많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이거나 해로운 것이라 판단되면
아무리 떼를 써도 거절하고,
왜 그것을 가져서는 안되는 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때가 이르지 않거나, 형편이 맞지 않을 때는
'기회가 되면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위에 있는 세 아이들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기회가 되기를 기다리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제 만 4년 3개월 된 막내아이가
자기에게도 형들처럼 책상을 사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회가 되면 마련해 주겠다’ 약속하자, 아이가 재차 다짐을 했습니다.
"기회 되면 꼭 사주세요"
이제 4년 3개월밖에 안된 아이가 기회의 의미를 알고
기회 되기를 기다릴 줄 안다면 보통 아이는 아닙니다. 정말 대견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시 한번 굳게 약속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래 기회가 되면 꼭 사줄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가 돌아서더니 두 손가락을 대고는 뭔가 세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아홉 열"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들고 외쳤습니다.
"야! 기회 됐다. 아빠 기회 됐으니까 지금 사주세요."
기회의 때는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아이는 근 30분 동안이나 막무가내로 울었습니다.
그 아이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가지가 되기 위해
진정 기도하는 자라면, 모든 것의 때는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 때를 내가 정하려 하면
우리는 평생 울며 살아가는 조울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2. 둘째로 내가 진정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주님의 가지임을 믿고 기도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반드시 범사에 감사함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에게 해로운 것을 결코 주지 않습니다.
무엇을 주든지 가지에게 없어서는 안될 이로운 것들이요,
열매 맺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가지 된 우리에게, 유해한 것을 주실 까닭이 없습니다.
무엇을 주시던 참되고 신실하신 주님의 것이요,
우리를 참되고 신실하게 만드시려는 주님의 은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가지가 된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술을 받고 보름동안 바로 눕지 못한 채
가만히 엎드려 있어야만 하는 교우님이 있습니다.
꼼짝 못하고 보름동안 엎드려 있어야만 한다면, 얼마나 짜증스럽고 성가신 일입니까?
그런데 그 분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람이 바로 누워 잠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분을 위한 저의 기도가 끝났을 때, 그 분은 울먹이는 소리로 다시 말했습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예수님의 편지'란 글을 읽으신 적이 있죠?
'오늘 아침 나는 나의 포근한 햇빛으로 네 방을 가득 채워 주었지.
그런데도 넌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구나'로 시작되던 그 글 말입니다.
그건 바로 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저는 이렇게 엎드려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엎드린 채 방바닥만을 쳐다보면서도,
바로 누워 자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하나님의 은총인지를 깨닫는다면,
당신의 모든 것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고 감사드린다면,
그의 투병이야말로 정말 그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은총이요,
없어서는 안될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가지 된 자는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주는 것 치고,
유익치 않고, 필요치 않고,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아침,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다시 기억하십시다.
그 하나님 앞에서 나의 헛된 욕망, 정욕의 것만 구하느라
영적 조울증에 빠져 있었던, 우리의 잘못된 삶을 내려놓으십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므로,
정녕 나의 욕망을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것으로 채움을 받으십시다.
그리하여 만사의 때를 주님께 맡기며, 범사에 주님께 감사드리는
참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드리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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