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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교회

LNCK 2015. 11. 8. 08:54

연약한 교회                고후12:7                        출처보기 온누리교회30주년 부흥비전집회 3일차

 

 

 

 

도입/ 오늘 설교제목은 연약한 교회입니다.

이 제목이, <교회창립 기념집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 같습니다.

그보다는 강력한 교회, 불굴의 교회, 영광의 교회..’ 뭐 이런 제목들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위험한 교회, 낮아진 교회, 연약한 교회..’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설교 제목

뭔가 설교제목을 잘못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모두가 역설적인 표현이죠. 참된 믿음의 신비는, 역설로만 설명됩니다.

예수님의 많은 교훈들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리라.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는 자는 구원하리라.

 

모든 교훈들이 다 역설로 주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가 바로 역설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무가치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그 역설은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기 때문에,

거꾸로 뒤집어보는 역설적인 시각으로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연약한 교회라는 설교제목은,

또 하나의 우리가 붙잡아야 될 역설적 진리를, 교회에 연관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고백이죠.

오늘 고후12:9~10절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그러므로 교회도, 연약한 교회가 되어야만 진짜 하나님께서 쓰시는 강한 교회가 됩니다.

우리 스스로 강한 교회가 될 때, 우리는 무너지고, 깨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온전히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많이 아파서 그래!

 

제가 하용조 목사님의 비서로 섬길 때,

어느 날 하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제게 던지셨어요.

온누리 교회에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왜 이렇게 건강하게 성장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줄 알아?’

 

제가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다 내가 많이 아파서 그래!’ (회중들 일제 웃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목사님의 음성이 생생이 생각났습니다.

그게 다 내가 많이 아파서 그래!’

 

지난 30년의 온누리교회 역사를 보면,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마다,

온누리교회가 성령안에서 더 강건해지고, 영적 군사가 되고, 선교에 놀라운 그 능력이 부어지는,

또 선교사님들이 불일 듯 일어나는 모든 터닝포인트마다,

다 살펴보면, 하목사님이 아프셨을 때입니다.

 

하목사님이 아프셔서 안식년을 떠난 후에,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성령사역이 시작되었어요.

 

목사님이 소천하시기 3년 전에는

일본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실 정도로, 한국에 들어오시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위중한 상황속에서,

하목사님은 내가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런 내적음성을 들으시고,

일본 CGN TV를 만드시고, 러브 소나타를 시작하셨습니다.

건강해서 그렇게 다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 정도 아주 심각한 위기 상태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투석을 마치시고,

바로 공항에 가서 또 그 도시에 도착해서 일정을 마치시고,

러브 소나타 다 마치고, 동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여정에서

 

그 병원에 가야될 시간을 못 맞추면, 해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몸이 위독해 지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여행하기 어려운 거리를,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하시면서

그렇게 러브 소나타를 하시고, 일본 전역을 다니셨습니다.

생전에 러브 소나타를 15번 하셨습니다.

 

일본에 많은 목회자들은, 하목사님의 그 상황을 알기 때문에,

하목사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이 소천하셨을 때,

한국에 있는 성도들보다, 일본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더 슬퍼하셨습니다.

 

마치 자기들 때문에 목사님이 빨리 돌아가신 것 같은 그런 죄책감이

일본 목사님들에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십시오. 가장 연약한 그 때에,

일본 CGN TV, 두란노 서원, 러브 소나타의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어요.

 

하목사님께서 러브 소나타 때, 그 관동 지역에 집회를 하며 다니실 때,

그 지역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쓰나미가 몰려와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다 러브 소나타가 한 번 지나갔던 도시들이었습니다.

 

러브 소나타의 집회를 참석하고 돌아가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 러브 소나타가 필요했는지를, 대지진 그 쓰나미가 몰려온 직후에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는 저희가 유명한 연예인과 함께 가지 않아도,

일본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해서, 러브 소나타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볼 때,

하목사님의 가장 연약한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본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불씨를 남겨두고 가시게 하셨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역시 지난 30년에 많은 고비 고비마다,

변화의 그 순간마다 거기에는 바로 하목사님의 연약함이 숨어 있었다는 것,

그 말씀이 이제 해석이 됩니다. ‘내가 많이 아파서 그래!’

 

그러면서 그 뒤에 이런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들이 교회에 뭐 좀 따지고 싶은 것이 있다가도,

에이 뭐 목사님 아프신데 이것까지..’ 그러면서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한 교회

 

교회는 연약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비한 공동체입니다.

사회는 지도자가 아프고, 병들고, 연약하면 무너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대기업의 오너, CEO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면, 뭐 주식 값 떨어지고, 사람들도 떠납니다.

은행은 대출 안 해주고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할 때 강한 것입니다.

 

교회의 연약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신비스럽죠. 우리가 강하고 우리가 능력이 있으면, 더 우리가 잘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교회는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누리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강자와 약자로 사람들을 분류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이 사람이 나보다 강한가, 약한가?’ 그것을 먼저 머리 속으로 잽니다.

 

여러분, 성공을 거듭한 사람은, 그 성공에 도취되어서,

늘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자기는 승자라고, 그렇게 강자'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한 사람은, 그 실패가 가져오는 상처 때문에,

자신은 약자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속는 것입니다.

다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연약한 자일 뿐입니다.

 

강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그 연약함에 대해서 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강자처럼 보이는 것이고,

약자로 보이는 사람은, 연약함에 대해서 약하게 반응했을 뿐입니다.

이 사회에 모든 교육을 보면, 약자로 반응하지 않고, 강하게 반응하라고 가르치죠.

 

신앙처럼 보이지만, 신앙이 아닌 것 중에,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연약하게 반응하지 말고, 그 연약함을 어떻게하면 잘 숨길 것인가,

그 모든 연약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용기를 내서 극복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진 못합니다.

 

강자처럼 보이지만, 소리 지르고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 연약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보면 목소리가 클수록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 두려움, 연약함을, 강한 반응으로 포장했을 뿐이지,

실제 그 두려움, 연약함이 사라지는게 아닙니다.

약자처럼 보이고, 강자처럼 보일 뿐입니다.

 

바울의 연약한 자기 고백

사도바울의 고백의 보십시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

이것은 세상의 틀을 벗어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강자처럼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나는 강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용기로,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외면하면서

나는 강자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실존, 그 현실, 그 아픔과 고민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그 연약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역설적인 고백은,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전체를 읽어보면, 마치 사도바울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해서 그는 자신의 많은 고백을 합니다.

 

왜 이렇게 사도바울이 다른 서신서들은 모두 교회에 일어난 사건,

또 성도들에게 일어난 어떤 이슈들에 관해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인데,

고린도후서는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명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전도하고, 목회했던 교회 가운데,

가장 속 썩인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반면에 가장 기쁨을 주었던 교회는, 아마 빌립보교회일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가장 사랑하는 교회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고백하지만,

고린도교회는 아마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수치요, 가장 고민이요, 가장 염려꺼리요,

가장 도전을 많이 준, 사도바울을 대적했던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을 거짓 교사라고 모함하기도 하고요,

사도바울이 몇 번 방문하려고 했다가 못 갈 수도 있잖아요.

오늘 이 시대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계획이 바뀔 수 있잖아요.

그 시대에는 비행기로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여행이 오늘처럼 자유롭지 않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거짓교사다. 거짓말 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의 말은 믿을 필요도 없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도일 수 없다며, 사도권을 문제삼기까지 했습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을 가장 힘들게 했던 대적자들, 바울은 그토록 그들을 사랑했건만

배신의 화살을 쏘아댄 성도들이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사도바울이 자신을 변호합니다.

부득불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연약함을 그는 간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자신이 얼마나 능력이 많은 존재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데 처해 있었는가를 고백합니다.

 

고후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6:4~5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그 외에도 그가 어떤 위험을 많이 겪었는지를, 고린도후서에서 고백했습니다.

그가 죽도록 이렇게 고생한 이유를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가운데 처해 있었는가를 고백합니다.

 

바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성도들만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육체의 가시, 사단의 가시를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안질, 간질 등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육체의 가시라고 했으니, 육체의 질병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있는 건강의 어려움을, 자신이 받은 계시와 연결합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다는 말은, 고후12:1절 이하를 보면,

그는 14년 전에 삼층천을 경험해서, 셋째 하늘 곧 낙원,

곧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14년만에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어떻다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그냥 삼층천을 경험했다고만 짧게 말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자신이 그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고 위대하기에,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육체의 질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는 왜 14년동안 셋째 하늘을 경험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그 하늘을 설명해 봐야, 말로 형용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이 교만해질 것 같으니,

그는 그 계시를 경험한 그 능력을 가지고,

그는 오히려 고난을 참고, 복음을 증거하는 에너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가 본 것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라이렇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나만 알아야지가 아니라, 그 계시로 인하여

그는 고난을 참을 수 있는 그 능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셋째 하늘을 봤으면, 그 다음날부터 간증집회 하고 돌아다녔을지 몰라요.

바로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처럼 십년이 지나도록 입 딱 다물고, 그 본 계시를,

고난을 참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는 에너지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걸 내가 뭘 봤다라는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셋째 하늘을 체험한 14년 동안, 그 계시를 가지고 인내했고,

그 계시가 너무 확실하기에, 그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고난을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하목사님께서 정말 말할 수 없는 육신의 어려움을

일본선교사로 나를 보내셨다고 해석하신 것처럼,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 그것이 육체의 질병이든, 경제적인 어려움이든,

인간관계의 갈등이건, 말할 수 없는 시댁의 시달림이건, 그저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원동력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는 이 약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대부분 한 번의 정확한 기도로 끝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네가 약한 데서 온전해 지기 때문이다.’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인정하고 수긍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목사님이 그 연약함을 그렇게 해석했잖아요.

내가 아팠기 때문에 온누리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한 것이다.’

교회성장을 본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의 약함을 들어 사용하셨다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목사님을 이어 담임이 되자, 언론 인터뷰를 했습니다.

가장 깊이 생각하는 구절을 제게 물었습니다.

제가 하목사님을 생각하면서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그 구절로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목사님의 삶이었습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여러분에게 어떤 약함이 있습니까?

그것이 궁핍입니까, 연약함입니까? 육신의 질병입니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약함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는 거죠.

우리의 약할 때, 우리는 주안에서 더욱 강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들이 좀 많아지고 헌금액수가 높아지고, 많은 어떤 성도들이 모이면,

자기도 모르게 일부 목회자가 교만해지고, 힘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게 오히려 자기를 교만하게 만드는 거죠.

 

저희 교회의 능력은, 많은 성도가 모여있기 때문에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자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그 믿음이 바로 저희 교회의 능력입니다.

 

복음만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저희 교회에 많은 성도가 모여도, 복음을 의지하지 않으면,

능력 없는 교회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교회가 얼마나 연약한지 많이 보시죠?

그렇게 건강하고 든든했던 교회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다 연약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여주여' 기도했던 사람들이, '죽여죽여' 하면서 싸울 때도 있습니다.

한때 성령의 사람들이, 너무 사납게 변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약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은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한 순간에 믿음도 깨지고, 감정도 깨지고, 사랑도 깨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많은 수의 군중이 내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만, 우리는 진짜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 예수님은 도망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강자로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달려 죽으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입으로 모든 무릎을 꿇고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를 지는 연약한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가 가진 사회적인 어떤 파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연약한 모습으로 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능력!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목에 거는 십자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못 박히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우리가 지는 십자가, 무엇이 차이입니까?

못이 있느냐/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게 지극히 연약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정말 능력있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가 못 박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못 박혀야 됩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조롱할 때, 너무 강하게 대적하면 안 됩니다.

대신에 그들의 조롱, 비난의 말이 못이 되어 우리를 찌를 때, 우리가 못 박히는 겁니다.

그게 교회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욕 먹을 일이 하나도 없으신데도, 그냥 욕과 조롱을 다 받으셨어요.

선한 일을 하시고, 의로운 일을 하면서도 못 박히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얼마나 못 박혀야 되겠습니까.

 

연약한 교회는, 세상 일에 있어서, 예수님처럼 연약하게 못 박히는 교회가 될 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고백하며 나아갈 때,

우리가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제가 3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역경이 변하여 장점이 됩니다. Adversity Advantage

 

역경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면, 그것은 우리의 장점이 됩니다.

 

1장을 보시면, 자기가 기뻐하는 이유를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는 감옥에 매여 있지만,

나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에 진보를 가져왔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기뻐하리라.

내가 자유로울 때보다 매여있으므로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어떤 이들은 시기와 질투로 복음을 전하나,

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리라.’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역경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는 거죠.

 

선교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영국의 패트릭 선교사입니다.

그는 아일랜드에 파송되어, 선교역사에 획기적 역할을 했는데요,

알고보니 그 분의 과거에 엄청난 역경이 있었습니다.

 

패트릭은 16세 때, 아일랜드의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일랜드로 붙들려가서 거기서 노예생활을 6년 동안 합니다.

6년째 되는 해, 그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노예생활을 할 때, 하루에도 수백번씩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그래서 가까스로 탈출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너는 잘 견뎠다. 보라 너를 위한 배가 준비되었다.’

그런 음성을 듣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서 수도사가 되고,

이후에 영국에서 다시 아일랜드에, 이번에는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그가 어떻게 선교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미 아일랜드에서 노예생활을 6년 동안이나 해 봤기 때문입니다.

 

패트릭 선교사로 인해 일어난 아일랜드의 부흥이,

이제는 영국와 유럽과 오히려 역선교하는, 그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서구에는 매년 317일을, ‘성 패트릭 데이로 지금까지 명절로 지킵니다.

 

저희교회에서 교역자들을 청빙하는데, 지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사위원회에서 인터뷰를 하고, 제게 두 배수로 리스트를 주십니다.

그러면 제가 한 분 한 분 인터뷰하면서 물을 때,

다른 설교나 뭐 인품 이런 것은 다 우리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이 스크린(걸러냄)을 합니다.

 

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그가 역경을 얼마나 경험했는가?’,

그 역경의 점수를 저는 많이 줍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 인터뷰를 하는데, ‘인생에 가장 어려운 순간이 뭐였습니까?’

그러자 어떤 목사가 제가 고3때 아버지가 사업이 망해서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제가 그 지원자 분께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온실 속에 편안한 환경속에서 자란 것보다는,

뭔가 어려움을 겪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을 것이라 봅니다.

이 역경이 오히려 advantage 요인이 되는 거죠.

 

우리가 연약할 때, 주님을 의지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advantage가 되는 줄 믿습니다.

 

이건 사실 역경도 아닌데요, 제가 목회학 박사과정을 코스는 다 마쳤는데,

논문을 못 썼어요. 목회를 하다 보니, 거기에 전적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죠.

학교에서는 논문을 써라고 계속 연락오는데, 아직까지도 못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여기저기서 논문 사건 때문에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어느 권사님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논문 괜찮으십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아직 논문을 못 썼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온 답신이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참 이렇게 논문을 못 쓰고 칭찬 받아보기는 처음입니다.

역경은 아니지만, 제 부족함이 이렇게 어드벤티지가 될 줄은 상상을 못했습니다.

논문을 못 쓴 것이 어드밴티지가 되었습니다. 역경이 변하여 어드벤티지가 되는 겁니다.

 

2. 두 번째는 깨어짐이 변하여, 아름다움이 됩니다. Brokenness Beauty

우리의 깨어짐이 아름다움이 되는 겁니다.

 

한나가 구약에 보면, 자녀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웁니다.

그 자녀가 없는 것 때문에, 그 가정에서 브닌나로부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습니까.

그 한나의 마음이 깨어지죠.

그 한나의 깨어짐은, 사무엘이라는 아름다운 아들로,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책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선천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래부터 겸손한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비전이나 야망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매우 겁이 많아서 위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겸손은 사실, 우리 모두가 깨어짐을 통해서만 배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휴밀리에이션(모욕), 휴밀리티(겸손)이 같은 어원입니다. *humiliation, humility

 

보면 겸손에 이를 때는, 항상 휴밀리에이션을 어느 정도 겪으면서,

우리가 겸손해 지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존심이 깨지면서 사실 우리가 겸손을 배웁니다.

우리는 깨어지지 않고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내 인생에 상처 받아본 적이 없고, 깨어져 본 적이 없고,

고난 속에서 내 마음이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아름다움이 없는 겁니다.

 

제가 영상을 잠시 보여드립니다. 35:34~

예쁜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져서, 못 쓰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깨어진 스테인드글라스가

하나님의 손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변하는지 슬라이드를 잠깐 보시겠습니다.

 

멀쩡하던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집니다. 소용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깨어진 조각들이 변하여 더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무너뜨리고, 우리 인생을 깨트리실 때가 있습니다.

구약의 나오미가 그랬죠?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으로 이민가서 멋있게 살아보려고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이민을 가서, 거기서 두 아들도 다 결혼시키고,

잘 사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여자 세 명만 남았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모압 드림이었죠.

 

그 드림이 완전히 깨져버려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불러라.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

그녀의 꿈은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하나님께 상처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인생은 깨지는 것 같았지만,

함께 따라온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함으로써,

그의 후손 가운데 다윗이 태어나고, 그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결국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그저 모압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역사에 중요한 통로가 되지 못했을 그의 인생이,

그의 꿈은 깨어졌지만,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꿈이 때로는 깨어지고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 깨어짐을 통해서,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연약해져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 연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킨다는 믿음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강 나루에서 습격을 받아

어떤 사람과 싸우면서 환도뼈가 위골됩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보낼 수 없다고

간절히 매달리는 그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어 매달리는 사람이, 진 사람입니다.

 

패배자입니다. 간청하는 자가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이겼다. 승리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 패배자로, 항복하는 것이 우리 영적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극히 연약한 자로 엎드리는 것이, 우리가 승리자가 되고,

더 아름다운 정복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머물고,

우리의 깨어짐에 우리의 부서진 인생이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위기가 기회가 됩니다. Crisis Chance

혼란이 창조성이 됩니다. Chaos Creativity

 

여러분, 인생의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는 정체성의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법적으로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므로, 왕족입니다.

그런데 그의 혈통적 신분은 히브리인입니다. 그는 친모가 유모로 양육했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너는 애굽혈통이 아니라, 히브리 혈통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애굽의 관원을 쳐죽인 사건은, 그의 정체성이 폭발한 것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정체성의 위기가 폭발해서 분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정체성의 위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애굽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해외에 있는 많은 1.5세들이 이런 정체성의 갈등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이런 정체성의 위기는,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더 귀한 일로 사용하시려고, 변화시키는 기회인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든 종류의 위기는, 다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 위기 가운데 처할 지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볼 때, 그 위기는 변하여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인생이 엉망진창 되는 것 같은 상황, 혼돈과 카오스 가운데 있을지라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능력이 우리가운데 머물면, 거기서 창조적인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사실 혼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창의성이 뭔지를 모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부르심을 받은 조건이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는 부모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이방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다면,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내가 너를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창대한 민족을 주시겠다고 한다면,

아이를 잘 낳는 아내를 둔 남자를 선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정반대 되는 조건을 가진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여인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혼돈 속에, 그 암흑과 같은 절망속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창조적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조건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정반대되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 또 결점, 내 인생에 과거에 지우고 싶은 어떤 흔적,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어떤 과거, 가정의문제이건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이건

어떤 문제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연약한 그 위기든, 깨어짐이든,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연약함이 하나님께는 결코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택하셔서,

스스로 강하다고 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적용

 

여러분 우리가 선택해야될 메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지혜롭게, 강한체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나는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강하게 여기다가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바보가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스스로 연약함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스스로 존귀한 자가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아니면 비천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다 취하여 부끄럽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천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그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갈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어리석습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저는 비천합니다.

저는 멸시 받아 마땅합니다.’ 그 약함의 자리, 연약함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 선택받아, 우리 모두는 쓰임 받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하나님 앞에 어떤 것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육체에 속한 어떤 것이라도, 자랑하며 잘난 체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

 

대개 여러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면, 좀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작은 규모의 교회 성도들은 그냥 작은 교회 다녀요하면서, 교회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뭐가 부끄럽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 반대로 우리 교인들은 저는 온누리 교회 다녀요라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하게 그냥 작은 목소리로 말하시고, 그걸 자랑으로 삼지 마십시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연약한 교회가 될 것인가요? 우리에게 이것이 숙제입니다.

저희 교회가 스스로 강한 교회가 되는 순간, 하나님은 저희 교회를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연약한 교회가 될 것인가요?

그렇다고 힘없이, 헌금도 하지 말고, 모이지도 않고, 그렇게 되자는 게 아닙니다.

더 깊은 헌신을 하지만, 더 열심히 헌신하지만,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저희 교회가 어떤 사역을 할 때, 저희 교회 이름을 다 빼야 합니다.

저희 교회 이름표 다 떼고 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헌신을 해도, 자랑하는 것, 홍보하는 것은 하지 말고,

 

마치 소금이 물에 녹아지면 형체가 사라지듯이, 진짜 소금은 그렇게 사라져 버립니다.

녹아 없어져 버립니다.

소금이 물 속에 들어가서도, ‘나는 소금이다며 계속 남아 있으면, 물이 짜지 않게 됩니다.

 

그건 소금이 아니라, 흙이요, 돌입니다. 진짜 소금은,

물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은 녹아 없어지지만,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걸 촉매 catalyst라 그럽니다.

 

촉매제와 같은 교회, 지극히 연약한 교회는, 소금처럼 녹아져 없어지지만,

사라져버리는 것 같지만, 변화를 일으키는 겁니다.

 

저희 교회가 연약한 교회로서, 촉매제처럼, 세상에 소금되어

저희 교회는 녹아 없어져 버리지만, 그러나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래에 내다봐야 할 저희 교회의 비전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슴에 품어야 할 교회의 비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읽고 마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자기 의존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형선고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약하다는 것과,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야 말로,

바로 성령님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실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자신을 의존하고, 우리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의존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형선고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할 때,

바로 그때부터 성령님이 능력있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힘으로도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으로, 나의 영으로 이루신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지극히 연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그런 저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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